박남일 - 「혁명의 세계사(청소년을 위한)」
때는 1600년대 중반,
러시아 볼가 강 중류의 어느 영지에서 한 마름이 농민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날마다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 다 주인 나리의 덕이다.
나리의 토지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니 너희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마름은 대단한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말했다.
농민들은 고개를 숙인채 마름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마름은 헛기침을 해 가면서 말을 이었다.
"해마다 돼지 한 마리와 양 두 마리,
새끼 돼지 네 마리 그리고 거위 한 마리와 암닭 네 마리를 바쳐라."
17세기 중엽,
러시아 각지에서는 이런 광경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자유롭게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농민은 귀족의 영지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갔다.
그들은 쉬는 날도 없이 1년 내내 들판에 나가 일했다.
게다가 힘들어 수확한 농작물도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 이런 생활을 견디지 못한 농민은 귀족의 영지에서 도망치는 일이 잦았다.
러시아 남쪽 지방의 우크라이나와 돈 강 유역,
우랄 산맥 부근, 볼가 강 유역등은 이렇게 자유를 찾아 도망친 농민이 무리를 이루며 떠돌아 다녔다.
이들은 주인 없는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거나,
병사의 추격을 피해 배를 타고 볼가 강 물줄기를 따라 이리저리 오르내렸다.
하지만 농민 대부분은 여전히 차르와 영주의 지배 아래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그럴 즈음, 러시아 농민에게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 입으로 입으로 은밀하게 전해졌다.
'스텐카 라진이 우리를 도우려 온다.'
농민들은 영웅 스텐카 라진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
러시아 농민의 영웅 스텐카 라진.
돈 강의 하류 지방에는 카자크(Kazak)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을 코사크라고도 하는데 '자유인'을 뜻하는 터키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들은 러시아 각지에서 영주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나온 농민이었다.
스텐카 라진(Stenka Razin.1630년경~1671년)은 바로 카자크의 두목이었다.
그는 1630년경 비교적 부유한 카자크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투철하던 그는 풍족한 생활을 버리고 가난한 카자크의 비참한 생활 속으로 뛰어들었다.
1667년, 스텐카 라진은 카자크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무리를 별도로 모은 뒤,
그들을 이끌고 볼가 강 줄기를 따라 카스피 해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곳을 경유해 우랄 강 중류까지 거슬려 올라갔다.
1670년,
스텐카 라진은 무리를 이끌고 카스피 해의 검은 물결을 가로질러 페르시아로 진격했다.
스텐카 라진이 이끄는 무리는 용맹스러웠다.
그들은 페르시아 군대와 싸워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
"스텐카 라진이 페르시아 군대를 혼내 주었다."
.... 이런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농민들은 통쾌해하면서 스텐카 라진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소문은 러시아뿐 아니라 독일 등 인접 국가에도 퍼졌고,
그 과정에서 스텐카 라진의 이름은 전설 속 영웅처럼 각색되었다.
... 그는 무리에게 외쳤다.
"모든 농민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형제를 저 악독한 영주와 간악한 관리의 억압에서 구해 내자!"
"와아!"
무리의 함성이 카스피 해의 검푸른 물결 위로 울려 펴졌다.
드디어 도적질이 아닌 반란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스텐카 라진의 반란군은 차리친, 사라토프, 사마라 등의 큰 도시를 차례로 굴복시켰다.
이들 대도시는 대부분 튼튼한 성으로 둘러싸여 대포 같은 신형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스텐카 라진의 군대는 성 안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승승장구 했다.
심지어 성문을 지키던 수비대가 스스로 문을 열어 주기도 했다.
"스텐카 라진이 도시를 점령하면
귀족을 몰아내고 주민의 밀린 세금과 빛을 탕감해 준다."
이런 소문이 돌자 러시아의 농민과 도시민 그리고 하급 병사는 스텐카 라진의 승리를 위해 적극 협력했다.
... "가자, 모스크바로!"
마침내 반란군은 차르 왕조가 버티고 있는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 소문을 들은 곳곳의 농민도 산발적으로 일어나 러시아는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670년 10월,
스텐카 라진이 지휘하는 반란군은
심비르스크(현재 울리아노프스크)교외에서 차르가 보낸 정부군과 큰 싸움을 벌였다.
전투는 나흘간이나 계속되었다.
전세는 점점 스텐카 라진의 반란군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 사이 차르의 지원군이 속속 도착했다.
나흘째 되는 날,
앞장서서 반란군을 지휘하며 성곽을 공격하던 스텐카 라진은 적의 총탄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라진의 부상으로 주춤하는 사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외국에서 잘 훈련된 차르의 군대는 카자크의 농민을 무지비하게 죽였다.
살아남은 반란군의 무리는 있는 힘을 다해 차르의 군대에 저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르가 보낸 진압군은 점점 강력해지는 반면 카자크와 농민군은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졌다.
스텐카 라진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볼가 강 하류 쪽으로 도망쳤다.
심비르스크에 남아 있는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한 차르 군은 도망친 스텐카 라진을 추적했다.
그러나 전설의 영웅 스텐카 라진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는 돈 강 쪽으로 도망치다가 카자크의 마을로 숨어들었다.
다시 반란군을 모집해 정부군을 반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카자크는 쫓기는 그를 숨겨 주지 않았다.
이미 차르의 군대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안 카자크가 스텐카 라진을 배신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카자크는 추격해 온 진압군에게 라진이 숨은 곳을 밀고해 버렸다.
그리하여 1671년 4월,
전설의 영웅 스텐카 라진은 마침내 차르의 군대에 붙잡혀 모스크바로 호송되었다.
1671년 6월 16일,
스텐카 라진은 모스크바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차르와 귀족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놈을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라.
반역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어라."
병사들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스텐카 라진의 손과 발을 잘라 냈다.
광장 바닥은 그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은 전설의 영웅 스텐카 라진의 최후를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한편 스텐카 라진의 처형 소식은 곧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도움을 기다리며 영주의 확대를 견디던 농민들은 절망했다.
농민의 유일한 희망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산들바람처럼 러시아 농민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스텐카 라진은 살아 있다.
처형된 것은 다른 사람이고, 그는 처형 직전에 탈출했다.
지금은 어딘가 숨어 있지만 반드시 다시 온다.
우리를 구출하려 올 것이다.'
물론 스텐카 라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스텐카 라진의 전설과 노래는 러시아 농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스텐카 라진이 죽은 뒤 200여 년이 지나도록 러시아 농민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스텐카 라진은 살아 있다.
러시아의 대지로 그는 다시 돌아온다.'
한편 러시아의 전통 민요인 이 노래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 강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페르시아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띤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돈 카자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무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의 볼가 강물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그 모습.
우리나라에서도 1900년대 초반에 독립군이 즐겨 불렸고,
1980년 대에는 민주화 운동가의 애창곡이 되었다. (p163)
※ 이 글은 <혁명의 세계사>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남일 - 혁명의 세계사 (청소년을 위한)
서해문집 - 2006.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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