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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모짜르트 이야기/모짜르트의 음악에 대한 칼 바르트의 마지막 증언

by 탄천사랑 2022. 3. 3.

칼 바르트 - 「모짜르트 이야기

 

부록 1.  초대 손님을 위한 음악

20세기 최대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1968년 12월 10일에 서거하였는데, 이 글은 바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68년 11월 17일에

‘독일-스위스 방송’(Das deutsch-schweizerische Radio)프로그램인  ‘초대 손님을 위한 음악’(Musik für einen Gast)에 초청을 받아 모짜르트의 음악과 자신의 생애와 사상과 신앙을 비교하며 인터뷰한 내용이다.

대담자는 슈말렌바하(Roswitha Schmalenbach) 여사이다.
이 글은 바르트의 사망 직후인 1969년에 발행된 ‘칼 바르트의 마지막 증언’(Letzte Zeugnisse) 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에는 바르트가 사망하기 4개월 전부터의 글과 인터뷰만 실려 있다. 바르트는 모짜르트의 열렬한 신봉자답게 생애의 마지막 인터뷰를 모짜르트에 관한 것으로 장식하고 있다. - 역주

 


슈말렌바하.   <모짜르트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
'내가 당신에게 소박한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은, 당신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좋은 날씨와 사나운 날씨,
밤과 낮으로 아름답게 질서가 잡힌 세계로 인도된다는 것이며,
20세기에 사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교만이 아닌) 용기와 (지나친 빠르기가 아닌)
템포와 (무미건조하지 않은) 순수함과 (방종이 아닌)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귓전을 맴도는 당신과의 음악적 대화를 통하여 사람들은 젊게도 되고 늙게도 되며,
일도 하고 휴식도 얻게 되며, 기쁨도 누리게 되고 슬픔도 맛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이 글은 칼 바르트 교수님께서
모짜르트 탄생 200주년이 되는 1956년에 모짜르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초대 손님이신 칼 바르트 교수님께서
이 방송 프로그램에 오직 모짜르트의 음악만을 원하신다는 사실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방송 첫머리에 우리는 작은 사단조 교향곡(kleine g-moll Symphonie)의 제 4악장(Allegro)을 들었습니다.
바르트 교수님은 신학자이지 음악가는 아니신데
왜 이 프로그램의 시작과 동시에 음악이 흘러나왔는가 의아해 하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바르트 교수님! 교수님은 <모짜르트에 관한 고백>이라는 글도 쓰셨는데
거기 어디엔가에 “그 누구도 아닌 모짜르트”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글에서 모짜르트의 아버지가 모짜르트를 '기적'이라고 말한 것도 언급하셨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음악가가 아닌 신학자로서의 교수님에게 모짜르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바르트.  제가  대답을 하기 전에 여사님에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왜 제게 하필이면 이 질문부터 하시게 되었는지요?
여사님도 언급하셨듯이 저는 모짜르트에 대한 책만 쓰지 않았습니다.
그 책은 아주 작은 소책자에 불과합니다.
내가 써 온 엄청나게 방대한 양의 책들은 당신도 아시다시피 전혀 다른 테마의 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의 질문부터 하시게 되었습니까?


슈말렌바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교수님! 이 방송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교수님 자신이시고, 또 다른 하나는 음악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신학적인 면을 제외한다면
교수님에게 있어서 모짜르트라는 존재는 음악적인 모든 것의 총체적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
(모짜르트는 어쨌든 제가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작곡가입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로마서 주해>(Römerbrief)나 <바르멘 선언>(Barmer-Erklärung), 방대한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또는 그밖에도 제가 알지 못하는 여러 책을 쓰신 것뿐만 아니라 모짜르트에 관한 책도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수님에게 있어서 모짜르트는 가장 적격한 테마가 아닐까 합니다.


바르트. 그래요, 모짜르트가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것은 약간 질투가 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가 모짜르트에 관한 책 속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많은 선량한 영혼'들이 그에 관하여 저와 함께 공감하고 그를 추앙한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모짜르트에게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삶에 관한 최고의 언어를 듣습니다.


이것이 한 음악가에 의해서 말하여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스스로 참됨을 증명하는 이 최상급의 언어는 (여사님께서 처음에 낭독하신 제 글에도 있듯이) 불변하는 언어인데
이 언어로 사람들은 되돌아갔다가, 다시 이곳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매일 아침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 있어서 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최상의 방법은 모짜르트의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슈말렌바하.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교수님은 모짜르트에게 아주 중요한 인간적인 ‘놀이’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고도 쓰셨습니다.


바르트. 그래요, 제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무엇이 일인가를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만이 올바른 놀이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 생애는 수많은 일거리로 가득 찬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과의 관계 속에서 저는 또한 모짜르트에게 있어서도
일에서 기인된 효과적인 놀이가 무엇이었겠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슈말렌바하.  그로 인해 사람들이 그를 가볍다거나
놀이에 미쳤다거나 혹은 로코코 음악가(Rokoko-Musiker)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는데...


바르트.  그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거기서는 일의 배경으로서의 놀이와 삶의 배후에 있는 즐거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란 모짜르트가 수없이 경험한 개인적인,
그리고 그 밖의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스러워했고 고뇌했던 삶이었습니다.

 

슈말렌바하.  꽉 채워진 양이군요...


바르트.  예, 안 그런가요? 제게 있어서는 어쨌든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다른 장소로부터,
즉 삶의 진지함으로부터의 어떤 것을 몰랐다면

모짜르트를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교의학을 쓰고 설교하는 일 등에 몰두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저는 한 장소를 생각하는데 거기로부터 제가 모든 것을 창작하고 듣고 자각했습니다.
그 장소로부터 나는 단음(單音)과 화음(和音)을 들었는데 그것은 모짜르트가 들었던,
하지만 작곡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선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속에서

언제나 모짜르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들었던 것과 화음(조화)을 이루며 존재했습니다.


슈말렌바하.  다른 어떤 곳이라니요?


바르트.  다른 어떤 곳... 그렇지요.
지금 저는 신학자로서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슈말렌바하.  성서 안에서 말씀입니까?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말인가요?


바르트.  바로 그렇습니다.


슈말렌바하.  신학적인 질문들에 관해서도 우리가 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네요.
그 전에 듣고 싶으신 모짜르트 음악을 말씀하시면 같이 듣겠습니다.


바르트.  좋습니다. ‘놀이’에 해당하는 음악을 하나 들읍시다.
예를 들면 5중주, 내림 마장조(Es-Dur), 제3악장 알레그레토(Allegretto) 말입니다.
이 곡이 여기에 제격 아닙니까?


슈말렌바하.  쾨헬 번호 452군요.
(역주 - Köchel-Verzeichnis는 Ludwig von Köchel에 의해 모짜르트의 모든 작품에 붙여진 일련 번호. K.라고 씀)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kenazy)와 런던 관악 주자들의 연주로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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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말렌바하

진지한 삶 가운데 있는 놀이에 관한 질문을 지나 우리는 방금 들었던 알레그레토(Allegretto)에 이르렀습니다.
놀이에 몰두한다는 것은 어린이들의 특성입니다.
여기서 저는 교수님의 어린 시절의 음악에 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 어떻게 음악을 접촉하셨죠?
음악을 실제로 해보셨나요?


바르트. 음악공부를 하기는 했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는 좋은 음악 감상자가 된 것이지요.
제 아버지는 음악적이신 분이었고 자유로이 피아노도 연주했었습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내 작은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제가 대여섯 살 때 아버지가 ‘요술피리’(Zauberflöte) 중에서
‘타미노, 오! 나의 행복이여’(Tamino mein, oh welch ein Glück)를 연주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것은 제 마음에 와 닿았고, 저는 ‘바로 이것이구나!’ 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슈말렌바하. 그 당시 교수님은 아직 초등학교 학생도 아니셨는데, 초등학교는 어디서 다니셨나요, 교수님?


바르트. 베른(Bern)에서 다녔습니다.


슈말렌바하.  베른에서 학창 시절을 모두 보내셨나요?


바르트.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거기서 보냈지요.
그 후 저는 베른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독일로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베를린에서 한 학기를 공부했는데 특히 하르낙(Harnack)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슈말렌바하.  교수님께서는 하르낙 밑에서 공부를 끝내고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까?


바르트.  아닙니다. 그 후 저는 베른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 학기를 공부했습니다.


슈말렌바하.  대학생 시절에 노래를 부르셨나요?


바르트.  예, 계속해서요. 전 학기 동안 노래를 계속 부를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를린에서는 정말 열심히 했었지만 베른에 와서는 학창시절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지냈습니다.


슈말렌바하.  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도 아주 중요하겠는데요?


바르트.  그렇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내 삶의 동인(動因)이었을 것이고, 그 안에서 제가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았으니까요.


슈말렌바하.  교수님께서는 후에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셨는데 그때 박사 학위를 받으셨나요?


바르트.  아니오, 아닙니다. 저는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슈말렌바하.  아하! 그래서 교수님의 강의록에는 ‘명예박사’(Doktor h.c.)라는 표시밖에는 없군요.


바르트.  나는 ‘단지’ 명예박사일 뿐입니다.


슈말렌바하. 그러나 ‘단지’라는 따옴표 안에 있는 말을 사람들이 교수님에게 할 수 있을까요?


바르트. 실상은 이렇습니다. 나는 학자로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보다는 목회하는 목사가 되기를 원했었고 또 실제로 12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네바에서 했고 그 다음에는 자펜빌(Safenwil)에서 목회 했습니다.
저는 그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슈말렌바하. 그런데 왜 목회를 계속하지 않으셨어요?


바르트. 목회를 하는 동안 저는 점차로 성경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박사학위 논문으로서 쓰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제 필요에 의해 쓴 것이지요.
제가 발견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흥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후에 괴팅엔(Göttingen) 대학으로부터의 초빙이 있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수가 된 것입니다.
제 신학 전체는 근본적으로 목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 신학은 제 개인적인 상황, 즉 가르치고 설교하고 상담을 해야 하는 상황가운데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제가 깨달은 것은 대학에서 배웠던 것을 목회현장에서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출발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을 시도한 것입니다.


슈말렌바하. 신학자로서의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목회자적 삶의 결핍을 느끼신 적이 있으세요?


바르트.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동일한 일을 다른 영역, 즉 학문적인 영역에서 실행한 것일 뿐입니다.
수업을 하고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말입니다.
제게 있어서 목회자의 삶은 단절되지 않았습니다.


슈말렌바하. 교수님, 제 추측이 맞는다면 교수님은 목사와 교수로서 양쪽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신 것이군요.
이런 현상은 모짜르트에게서도 계속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바르트. 그래요. 물론 필요 불가결한 아주 엉뚱한 변화와 자리바꿈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본래적으로는 언제나 그 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모짜르트의 음악을 듣는 시간이라면 가장조(A-Dur) 중의 어떤 곡을 원합니다.
그것은 제 삶에 있어서도 기본음(A) 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모짜르트 작품 중에서 교향곡 가장조의 제2악장 안단테(Andante)를 청합니다.


슈말렌바하. 이 작품은 ‘작은’ 가장조, 쾨헬 201번의 곡이군요.
부르노 발터(Bruno Walter)가 지휘하는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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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말렌바하.

젊은 시절의 모짜르트에서 우리는 다시 <로마서 주해>를 쓰시던 젊은 시절의 칼 바르트로 돌아와 봅시다.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은 바르트의 폭탄선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 영향은 정말 대단했어요.
히틀러 정권이 들어섰을 때 교수님이 분명하고도 명백한 선언을 하셨고 교회의 대다수가 이 선언을 지지했었죠.


바르트.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적 투쟁에 대한 일은 제 삶과 신학적인 활동과 훨씬 더 큰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결정적으로 성서로부터 정립하려고 시도한 신학은 사적인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즉 세상과 인간에게 낯선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위한 하나님, 인간을 위한 하나님, 그리고 땅을 위한 하늘이었지요.
이것은 언급되었든지 안 되었든지 간에 제 신학 전체가 언제나 강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여사께서 <로마서 주해>를 언급하셨는데 그 책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주후 1919년에 출판되었고
정치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정치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제로 제가 자펜빌(Safenwil)에서 한 교회를 담임할 때

그 교회가 노동자들의 교회였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와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동 문제에 개입해서 논쟁을 벌여야 했고, 그러다보니 ‘자펜빌의 빨갱이 목사’라는 악평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 (정치와의 관련)은 나중에 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후에 독일로 왔을 때 저는 우선 제 학문적 활동의 근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기에
이방 땅에서의 정치적 활동을 처음엔 약간 자제하였습니다.
그후 히틀러 정권이 들어섰을 때

다시 정치적 투쟁에 나섰고 여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르멘 선언’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 선언에는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한 말은 없었으나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그 선언의 발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제 친구와 적이 모두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저와 연관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후에 나는 바젤(Basel)로 왔을 때는 이때는 정치에 대해 다시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가 자펜빌에서 사회민주당원이긴 했어도 정치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했습니다.)
바젤에서 그것을 다시 할 욕구가 없었습니다.


슈말렌바하. 정당 정치적이었나요?


바르트.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정치적 입장은 공개적이었습니다.
1956년은 모짜르트의 해인데 같은 해에 헝가리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스위스 전체에서 비난을 받았지요.
왜냐하면 제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일을 돕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제게 쏟아진 비난의 이유는 무슨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즉 제가 거기에 나타난 고발인들과 입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정치에 관한 관심은 오늘날까지도 저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슈말렌바하. 오늘날까지 말입니까?
그렇다면 비록 반복은 아니라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사건도 1956년의 사건과 같은 선상에 있지 않을까요?


바르트.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다르지요. 역사에서 반복이란 없습니다.


슈말렌바하.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에 대해서도 한 말씀하시겠습니까?


바르트. 그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관계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이 필요한 말들을 더 잘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심 스위스에서의 반응, 특히 교회의 반응 방법에 대해 기뻐했습니다.
그때 정말로 많은 좋은 일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 덧붙일 말은 없습니다.
저는 더 말을 잘 할 자신이 없어요.


슈말렌바하.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고난, 예를 들면 아침 신문에서 볼 수 있는 고난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바르트. 물론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무익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희망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관점에서 조금씩 행보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말입니다.
사람들이 전체를 본다면 개별적인 것도 볼 수 있고, 그러면 의심이나 흥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때때로, 또한 아주 불 특정한 시간에 작은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다시 모짜르트로 화제를 돌려 봅시다.
오늘의 현실과 이 세상 정치 생활에의 참여 속에서 매일 제 마음은 크게 대조적인 것 사이를 움직이는데,
그 대조 안에서 모짜르트의 유희적인 작품 하나를 청하겠습니다.
거의 경박함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작은 노래하나 말입니다.
거의 그렇지요?


그러나 저는 단지 음색(Klang) 때문에 종종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침묵 -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네>(Die Verschweigung - Ich will nichts weiter sagen....)
맞아요. 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말을 사람들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지금 이 노래를 듣도록 합시다.


슈말렌바하. 이름가르트 제프리트(Irmgard Seefried)의 노래와 에릭 베르바(Erik Werba)의 반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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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말렌바하. 모짜르트의 작은 노래는 두 개의 진지한 대화 중에 숨 돌릴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희망에 찬 교회 일치 운동(Ökumene)의 영역으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이 운동을 위해 오늘도 사람들이 일하고 있으며 교수님도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교수님은 로마에도 가 계셨고 카톨릭으로부터의 교회 일치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보셨습니다.
이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바르트. 그래요. 이 일에 대한 제 공헌은 신중히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저는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소위 교회 일치 연합 운동에 참여했는데,
그때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만들어 졌지요.
거기서 제가 첫째 강연을 하였는데 그 주어진 주제는 <세계의 혼돈과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강연은 이 제목을 뒤집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슈말렌바하. 전형적인 칼 바르트 식이군요!


바르트. 그렇지요. 좋습니다. 그 후에는 내게 이 교회 일치 운동을 다룰 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일에 매달려 지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공의회(역주, Konzil: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게 되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적으로, 전적으로 나 개인의 일로, 어떤 위탁도 없는 가운데서 일치 운동을 약간 했었습니다.
아주 약간 말입니다.
나는 로마로 가서 바오로 6세를 방문했고 그곳의 예수회 사람들(Jesuiten)과
도미니끄파 사람들(Dominikaner)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든 것은 아주 감동적이었고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때때로 다른 일도 했는데, 우리는 지금 이곳 부루더홀츠(Bruderholz)에서
개혁 교회와 카톨릭 교회 사이의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곳과 저곳을 조금씩 왕래하고 있습니다.


슈말렌바하. 부루더홀츠라면 교수님 댁이 있는 곳이군요. 교수님의 가정에서 말인가요?


바르트. 그렇습니다. 여기서 저는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인 셈이지요.
나의 가정 주치의와 카톨릭 신자인 친구와 또 저를 치료해 준 좋은 의사들과 말입니다.


슈말렌바하. 교수님은 한번 크게 편찮으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래서 더더욱 오늘 교수님을 여기서 뵙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수님, 카톨릭 교회 내에서 지금 생겨나는 일들을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바르트. 그것은 너무 지나친 말 일겁니다.

 

슈말렌바하. 개혁(Reformierung)은요?


바르트. 좋습니다. 갱신(Erneuerung)이란 말이 적절하겠군요.
그러나 이것은 본래 같은데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 카톨릭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뒤늦은 불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조금 도가 지나친 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관련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어쨌든 저는 많은 카톨릭 신자들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때때로 제가 개신교 신학자들보다 그들을 더 잘 이해하기도 합니다.


슈말렌바하. 이제 좀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 다시 말해서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일으킨 우리의 신앙고백이
그 사이에 경직되거나 더 이상 진전이 없다는 어떤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바르트. 예, 경직되었지요. 그것은 명예를 얻었지만 그 자체가 위험입니다.
하지만 내가 꼭 말하고 싶은 것은, 매 주일 저는 라디오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설교와
개혁 교회의 설교를 연이어 듣고 평가해 보는데 거기에 어떤 조화가 있어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가시적인 교회 일치 운동은 없지만 이것은 진행 중입니다.


저는 낙관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구교 간의) 교회 일치를 경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그리고 ‘머리를 맞대고’ 화합(Zusammenklingen)의 방법을 모색하는 대화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슈말렌바하. 화음(화합)이라는 음악적인 개념이 다시 나왔군요. 모짜르트의 화음을 요청하시지요.


바르트. 이번에는 모짜르트의 세속 음악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후궁으로부터의 탈출>(Entführung aus dem Serail) 중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으리>(Nie werd ich deine Huld vergessen)'를 원합니다.
- 역주. 원 곡명은 vergessen이 아니라 vergessenen인데 바르트는 vergessen이라고 말함.

 

슈말렌바하. 선과 악의 화합이 있는 그 노래 말이지요.


바르트. 예, 예, 그래요.


슈말렌바하.

에리카 쾨트(Erika Köth), 로테 쇠들레(Lotte Schädle), 후리츠 분덜리히(Fritz Wunderlich),
후리드리히 렌츠(Friedrich Lenz), 쿠어트 뵘(Kurt Böhm)의 노래와 오이겐 요쿰(Eugen Jochum)이 지휘하는
바이에른 뮨헨 국립 오페라단의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


슈말렌바하. 이 <탈출>의 피날레와 더불어 오늘 우리의 이 방송 프로그램도 거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대담으로 저는 교수님의 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 하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모짜르트에 관해 완전히 열광하여 할 말을 더듬을 때, '이것은 ‘은총의’ 음악이다,
그는 ‘은총을 입은, 타고난’ 음악가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교수님의 신학의 핵심인 은총(Gnade)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바르트. 조금 전에 여사님이 ‘거의’라는 말을 하셨는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거의’ 목표점에 다 왔군요.
여사님께서 질문하신 것에 대해 말해 봅시다.
여사님은 제 생애와 사상에 관해 직접 듣기를 원하시는군요.
지금까지 우리는 신학과 세계와 정치에 관해 몇 마디 나누었습니다.
슈말렌바하 여사님,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신학에 대한 것도 아니오 정치 세계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예비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단지 예비적인 일일뿐이지요.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 안에 충만히 차 있는 것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즐거움의 경계에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 넘어서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사께서 조금 전에 말한 ‘은총’이라는 단어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은총’이라는 말은 약간 진부한 단어에 속하긴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많이 사용했고 지금도 사용해야만 합니다.
다시금 이 ‘은총을 입은, 타고난’(begnadet)이라는 말을 설명하자면 이는 여러 가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타고난 배우나 타고난 축구 선수 등도 있을 수 있으니 이를 어쩝니까!
마찬가지로 기적(Wunder)이라는 말도 여러 가지 의미로 쓰여집니다.
그러니 조심해야지요!


슈말렌바하. 하지만 사람들이 칼 바르트와 같은 신학자를 이야기할 때는 좀 다른 ‘은총’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르트. 그것은 다른 은총입니다. 지금 저는 본래의 제 자리 안으로 되돌아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본래의 제 자리 곁에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은총이라는 말도 하나의 일시적인 단어에 불과합니다.
제가 신학자로서 또는 정치가로서 해야 할 마지막 말은 ‘은총’ 따위의 개념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그분이 바로 은총이시고 또한 세상과 교회와 신학을 넘어서서 그 분이 맨 마지막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 분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과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제 오랜 생애 가운데서 제가 애쓴 것이 있다면 점차로 이 이름을 높인 것과 또한 '거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이름 외에는 구원을 얻을 이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바로 은총이 있습니다.
거기에 바로 일이나 투쟁의 원동력이 있고 사회와 인류를 위한 추진력이 있습니다.
거기에 제가 살아오면서 겪은 인생의 약함과 우둔함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마지막으로 교회음악가로서의 모짜르트를 듣기 원합니다.
저는 평소에 언제나 특히 라장조(D-Dur)의 작은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를 들었습니다.
이 또한 모짜르트가 약간 젊었을 때의 작품이지요.
이 작품은 우리가 처음 부분에서 들었던 교향곡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쾨헬 번호(KV) 194 입니다.

저는 이 미사곡의 끝 부분을 듣기를 청합니다.
바로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dona nobis pacem”이라는 가사가 나오는 곳 말입니다.
독일어로는

“O Lamm Gottes, das Du trägst die Sünde der Welt, erbarme Dich unser, gib uns Deinen Frieden”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평화를 내려 주소서)
이제 듣기를 원합니다.  (p61~83)
※ 이 글은 <모짜르트 이야기>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칼 바르트  -  모차르트 이야기

역자 - 문성모 
예솔- 2006.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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