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 「김지하의 예감」
오래전에 있었던 우스운 대화 한 토막이 기억난다.
흔히들 내게 묻기를 '해외는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늘
'제주도에 좀.....,' '?' 그랬다. 그래서 내 별명이 '최후의 국내파'였다.
내가 발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해외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국수주의자였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기인 감옥살이에서 풀려났을 때 독일의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초청했으나 사양했고
미국의 하와이 대학이 전 미국 대학 순회강연을 제의해 왔을 때도 거절했으며,
여러 번 여러 번 일본측 초청을 어물어물 뒤로 미루어 왔다.
한 번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노신영 씨가 나의 해외 유람을 집요하게 설득해 왔으나
완곡히 사절했으며 또 한 번은 저 유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미국 거점인 뉴옥 사회과학대학원 대학이
박사학위를 준다고 정중히 방미를 요청해 왔지만 이 역시 정중히 사양했었다.
생각난다.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목사님께서 언젠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미스터 김, 외국에 좀 다녀오지.
바쁠수록 외국 견문을 넗히는 게 중요해요.
평생 일할 텐데 뭘.
내가 한번 주선해 볼까?"
이 말씀에
"이때다 싶으면 제 스스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대답이었다.
그렇다.
까닭은 바로 '이때다 싶으면'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것만도 아니었으니 생각난다.
나 다니던 학교인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잔디밭에서 가까운 친구들이 흔히 기타를 치며 부르던 노래,
'머나면 아메리카로 떠나가고 싶네에...,' 이른바 '아메리카 동경론'이다.
그리고 또 생각난다.
가까웠던 같은 과 여자 친구 한 사람이 원남동로타리 부근 밤길에서 왈,
"이 나라는 글러먹었어.
나는 거지가 되더라도 구라파에 가서 살겠어!" 이른바 '구라파 거지론'이다.
그래
그렇게 해서 내 마음속엔 도리어 최초의 국내파가 새파란 눈을 뜨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원효(元曉) 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접고 '해외파' 되기를 포기하며 '국내파'로 남았던 사실.
그러나 결국엔 외래 사상까지를 다 융섭하는
커다란 독자적 사상의 길을 열었던 일이 때때로 나를 위로하였다.
그러나 당시 문리대 커리큘럼은 헤겔, 칸트, 베르그송, 하이데거 등 구라파 일색이었고
책방의 책이란 책 역시 카뮈, 사르프르 등 모조리 서양 것 일색이었으니,
'아메리카 동경론'이나 '구라파 거지론'이 결코 무리는 아니었음이 또한 사실이다.
나 또한 1960년대를 내내 그 분위기 속에서 공부했으니
어찌 '아메리카와 유럽 마니아'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만 다행인 것은,
4월 혁명 이후 문리대, 법대, 상대 등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문화운동과
동양학 바람에 깊이 뻐져들어가며 결과적으로 동. 서양 사이의 균형,
민족과 세계 보편 사이의 통합을 당연한 척도로 삼기버릇했음이다.
그러나 결국 '최후의 국내파'의 주된 원인은 역시 '이때다 싶으면'이 아직 오지 않아서였던 셈이다.
물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노자(老子)의 말
'집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不出戶知天下)'는 올연한 오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정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침(止, 艮者)'의 원리였다.
'최후의 국내파'란 별명은 사실 나를 인터뷰했던 외신 기자들이 붙인 것이다.
그들은 또 내 이름을 영어로 '언더그라운드 킴'이라고도 불렸으니 일단은 '저항자',
'감옥쟁이'의 뜻이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제 둥지에서 꼼짝 안 하는 '토굴족'이란 말로도 해석된다.
'토굴족!' 그리 달가운 말은 아니다.
내 속 깊은 곳엔 하루 빨리 토굴에서 벗어나 오대양 육대주를 훨훨 날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다.
특히 아시아와 서양을 둘러보며 동. 서양의 비교와 통합을 내 나름으로 한번 생각하고 싶었다.
나라가 조금씩 민주화가 되어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나는 위험인물 리스트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으니
바로 다름 아닌 '이때다 싶으면'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칠 곳에 그침'은 '그곳에 그침'이다.(艮具止 止具也)
내가 첫 나들이를 한 곳은 홍콩이다.
마침내 '최후의 국내파' 딱지를 뗀 것이다.
홍콩과 베트남 이외의 여행은 모두 아내 김영주와 함께였다.
삽화로 쓰인 선 그림들은 두 사람이 부러진 붓대로 그린 먹선이다. (p11)
※ 이 글은 <김지하의 예감>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이룸 - 2007.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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