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유아 어린이/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

02-2/1) 축소 전환형 부모

by 탄천사랑 2021. 10. 10.

·「 존 가트맨 -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

 

 

축소 전환형 부모

로버트는 자신이 축소 전환형 부모라는 소리에 분명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로버트가 딸 줄리엣을 무척 아끼고 상당히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내는 것은 분명했다.

딸애가 슬퍼할 때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아이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 주었다.

"아이를 안고서 뭐가 필요하냐고 묻죠.

'TV 보고 싶니?' '영화 보여 줄까?' '밖에 나가서 놀까?'

제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지 알려고 아이에게 이것저것을 묻죠."

하지만 로버트가 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아이의 슬픔에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는 것이다.

로버트는

"줄리엣, 오늘 기분이 안 좋니? 슬프니?"라고 묻지 않았다.

불편한 감정에 관심을 쏟는 것은 잡초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잡초처럼 더 자라나서 더욱 해로워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부모들처럼 로버트는 화나 슬픔과 같은 감정이 삶을 잠식할까 봐 두려워한다.

자신을 위해서도 소중한 딸을 위해서도 절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로버트와 같은 축소 전환형 부모를 연구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많이 접했다.

최근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제시카의 엄마일 것이다.

1996년 4월, 제시카는 일곱 살의 나이로

미 대륙을 횡단한 최연소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경비행기를 몰다가 추락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제시카의 엄마는 제시카가

"무섭다, 두렵다, 슬프다" 등과 같은 부정적 단어를 말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제시카의 엄마는

"아이들은 두려움을 몰라요.

어른들이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지 않는 한, 그게 자연스러운 거죠"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제시카의 추락 사고가 있은 후 그 엄마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요.

눈물이겠죠. 하지만 전 울지 않아요.

감정은 부자연스러운 거예요. 믿을 수 없는 거라고요."

비행기가 천둥 치던 폭풍우 속으로 이륙한 후

추락했을 때 조종타를 잡고 있던 사람이 제시카인지 비행교관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시카가 자유롭게 두려움을 표현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의 부정적 경험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축소 전환형 부모는 부정적 감정을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부분 그들이 어린 시절에 습득한 행동 양식 때문이다.

폭력 가정에서 성장한 부모들도 있다.

짐도 그런 경우다.

그는 30년 전 부모가 말다툼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자신과 형제들이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숨죽여 이 상황을 이겨내려고 애쓰던 모습을 기억한다.

짐과 형제들은 부모의 문제나 '그들의 생각'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아버지의 화만 돋우기 때문이다.

이제 짐은 결혼도 했고 자녀도 두었지만,

갈등이나 정신적 고통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 상황을 피하고 덮어버린다.

심지어 여덟 살 난 아들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도

아이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다.

짐은 아들과 더 가깝게 지내고 싶고,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지만

마음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경험이 전혀 없었다.

결과적으로 짐은 아들과 대화를 시작하지 못하고

아들 역시 아버지의 불편함을 감지하고는 문제를 꺼내려고 하지 않는다.

가난하거나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어른들 역시 아이의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어려워 할 수 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구조원' 역할을 맡는 데 익숙해 있는 터라 자녀의 상처 입은 마음을 모두 고쳐 주고

잘못된 일을 모두 바로잡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스스로 짊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초인간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부모는 곧 나가떨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부모들은 아이들이 슬픔이나 화를 표현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낙담하거나 아이에게 휘둘린다고 생각한 부모는

아이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린다.

아이들의 문제를 작게 축소시켜 캡슐에 넣고는 안 보이는 곳에 치워버리려 하는 것이다.

톰은 이렇게 말했다.

"제레미가 와서 어떤 친구가 자기 장난감을 빼앗아갔다고 말하면,

저는 그냥 '걱정하지 마, 돌려줄 거야'라고 말합니다.

또 '재가 날 때렸어요'라고 말하면, 저는 '몰라서 그랬을 거야'라고 말하죠.

저는 아들에게 가능한 원만하게 살라고 가르치고 싶어요"

제레미 엄마 마리안 역시 아들의 슬픔에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아이의 기분을 달래거나 그딴 일은 잊어버리게 하려고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줘요.

아이는 슬퍼해서는 안 돼요.

만약 아이가 슬퍼한다면, 그건 심리적으로 아이에게 문제가 있거나 부모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제레미가 슬프면 저도 슬퍼요.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가 행복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길 바라잖아요."

마리안은 축소 전환형 부모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축소 전환형 부모는 어두운 분위기보다 미소와 유머가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아이의 부정적 감정을 가볍게 여긴다.

슬퍼하는 아이를 간지럼 태우려 하거나 화난 아이의 격한 감정을 놀리는 부모도 있다.

"우리 예쁜이 미소가 어디로 갔나?" 같이 온화하게 말하거나

"월리, 아기처럼 굴면 되겠니?" 같이 모욕적인 투로 말하는 부모도 있다.

이때 아이가 받아들이는 메시지는 모두 똑같이

"지금 네가 이러는 건 다 네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야"라는 것이다.

아이의 감정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부모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자녀는 결국 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축소 전환형 부모는

부서진 장난감이나 놀이터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에 대한 아이들의 걱정은 실업이나 결혼생활의 붕괴,

국가 부채 해결 방안과 같은 어른들의 문제에 비교하면 너무나 사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녀의 감정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고 아이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아버지에게 딸의 슬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묻자, 어찌할 바를 몰라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애와 무슨 대화가 되겠어요.

딸의 슬픈 감정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존중해야 할 가치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딸에의 반응은 어른의 반응이 아니잖아요."

모든 축소 전환형 부모가 동정심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상당히 깊은 동정심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자식을 보호하려는 부모의 본능적인 충동에서 나온 반응일 뿐이다.

이들은 어찌 되었든 부정적 감정이란 해롭다고 믿으면서, 아이들이 이런 해로움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한 너무 오랫동안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들 부모가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참하려고 한다면,

아이의 감정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감정을 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사라는 애완동물 기니피그의 죽음에 딸 베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되었다.

"제가 베키 앞에서 슬픈 모습을 보이면, 딸애가 훨씬 더 홀란스러워할 것 같아 걱정이었죠"

그래서 사라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약간은 냉정하게 딸을 위로했다.

"괜찮아, 이런 일은 언제나 있는 거야.

주드는 나이를 많이 먹어서 하늘나라로 간 거야. 새 기니피그를 사면 돼."

사라의 냉정한 반응은 기니피그의 죽음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는 있으나,

베키는 자신의 슬픔이 이해를 받았다거나 위로를 받았다고 느끼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축소 전환형 부모들은 감정적이 되면 자제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이의 감정을 부인하거나 무시한다.

이런 부모는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 불, 폭발물, 폭풍우와 같은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퓨즈가 나갔다'거나 '너 때문에 폭발했다'거나 '불벼락이 떨어졌다'라고 말한다.

이런 부모는 아이가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슬픔을 느낄 때 끝없는 우울증에 빠질까 두려워하고

화가 났을 때 격분해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걱정만 한다.

가령 바바라는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 신경질을 낸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바바라는 화를 표현하는 것은 '이기적'이며 '위험하다'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화를 낸다고 해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고... 저를 혐오하게 만들었을 뿐이죠."

바바라는 이렇듯 화를 내는 것을 볼썽사납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딸애가 화를 내려고 할 때 유머를 이용하여 이를 무마시키려 한다.

"칼리가 화를 내려 하면 전 그저 웃을 뿐이에요. 딸애는 아주 어리석게 굴 때가 있어요.

전 그 점을 아이에게 지적하면서 '그만 좀 해!'라거나 '기분 풀어!'라고 말하죠"

칼리가 정말로 화가 났는지는 바바라에게 중요하지 않다.

화난 칼리를 보면 엄마 바바라는 그저 웃는다.

"그 조그만 게 얼굴은 새빨개져서 화를 내면 작은 인형을 보는 것 같아서 정말 재미있어요."

바바라는 칼리가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한 번은 칼리가 자기를 빼놓고 놀고 있는 오빠와 친구들에게 무척 화가 난 적이 있다.

"그래서 딸애를 제 무릎에 앉혀서 같이 놀아 줬어요"라며 바바라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바바라는 딸애의 진홍색 겨울 타이즈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다리가 어떻게 된 거니?

온통 빨간 보풀이 일었잖아! 네 다리가 선인장이 되었나 보고나."

이렇게 장난을 치자 칼리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분명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관심을 느꼈기에 자신의 화는 잊고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렸다.

바바리는 성공적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느낀다.

"일부러 그렇게 했어요.

그게 딸을 대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터득했으니까요."

하지만 바바라가 놓친 부분이 있다.

시샘과 소외감이라는 감정에 대해 칼리와 '대화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 일은 바바라가 딸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칼리의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인식하도록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칼리에게 오빠와의 갈등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칼리가 얻은 메시지는 화를 내는 것은 무의미하니,

화는 억누르고 생각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 이 글은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