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 어머니 발등에 입을 맞추고」
이희재라는 아주 고운 부인이 있었다.
올해 나이 일흔여섯이지만 아직도 아기자기하고 예쁘장한 것을 드러내고 좋아하는 그이는
소녀들과 잡담 나누기를 즐기고 주위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누어주지 못해 안달이다.
보도블록 사이로 앙증맞게 피어난 들꽃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해
'정말 예쁘다. 그렇지?'라며 꼭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녀 같은 구석이 있는
그이는 바로 나의 어머니, 내 마음속에 항상 고즈넉한 산사 같은 여유를 심어주시는 분이다.
어머니는 지금 이모와 함께 돈화문 근처에서 따로 살고 계시다.
이것저것 화초도 많이 기르고 있고,
집 안 곳곳에 예쁜 것 좋아하는 어머니의 취향이 살아 있어 당신의 말씀에 의하면
딸네 아들네 순례하다 지치면 찾아드는 보금자리라 일컫는 자그마한 집,
그 자그마한 집은 어머니 일흔여섯 평생을 두고 온전히 당신 손아귀에 보듬어지는 유일의 것이다
딸이니 아들이니 전부 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크게 불효하지도 크게 효도하지도 않고 그렇게들 살고 있는데,
어머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혹시라도 당신의 손이 닿지 않아
모자란 구석 있게 살아가는 자식이라도 있을까 봐서 항상 나누어주지 못해 애달아하신다.
그 자그마한 집도 시세로 치면 얼마나 될까마는 공평하게 네 자식에게 나누어주겠노라고 벌써부터
"똑같이 나눠줄 거니까 욕심내지 마." 하시며 못난 자식들에게 잔잔한 웃음을 안겨준다.
그 연배의 어른이라면 누구나가 그러하겠지만 나의 어머니는 참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살아왔다.
그렇지만 당신의 얼굴 어느 곳에도 삶에 찌들어 그늘진 구석 하나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고 보면 곱디고운 그이의 외양과는 달리
그 속내에는 참으로 올곧고 단단한 알맹이가 들어차 있는 듯도 싶다.
지난 삼월 <바람은 불어도> 촬영으로 한창 바쁠 때
첫째 딸 완주가 산달을 받아놓고 멀리 뉴질랜드에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마음으로야 당장 달려가 딸아이를 돕고 싶었지만 방송일이라는 것이 내 개인적인 사정을 봐줄 리도 만무했다.
못된 응석이 내 속 어디엔가 뙤리를 틀고 있었던지 나는 어머니께 내 딸아이를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말이 부탁이지 내 바람이라면 열이면 아홉 거절을 못하는 어머니를 이미 잘 알고 있던 터라
그것은 강요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제 더는 젊다 할 수 없는 몸을 이끌고 뉴질랜드로 달려가 손녀딸의 뒤치다꺼리를 도와주셨다.
어머니 당신이 자식을 낳을 적에는 따뜻한 미역국 한 사발 마음 편하게 먹지 못했지만
멀리 이국땅에서 버거워하고 있을 손녀딸이 안쓰러워 어머니는
순산을 하고 난 뒤에도 다섯 달 가까이 그곳에 머물면서 딸애를 보살펴주셨다.
출산 후 바로 이사를 가야 하는 손녀딸을 위해
자질구레한 것에서 큼직한 것까지 일일이 이삿짐을 챙겨주고 집 안 정리를 해주고
운전할 수 없으면 찬거리를 사러도 못 갈 만큼 넓디넓은 나라에서 면허가 없어 고생하는 손녀딸을 위해
운전면허시험공부도 시키셨다.
얼마 후 손녀딸이 당신의 채근으로 운전면허에 합격하자
그제야 가벼운 마음으로 훌훌 털고 일어나셨던 나의 어머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며 단정한 매무새,
집 안에서 소일이나 하시면 딱 좋은 인상의 어머니는 그러나 단 한순간도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으시다.
당신이 일남 삼녀의 집을 번갈아가며 들르실 때는
그날이 바로 집 안의 온갖 물건이 제자리를 찾는 날이고 미뤄두었던 집 안 손질을 하는 날인 것이다.
그런 일들이 오랜 시간 되풀이되다 보니 으레 그러려니 하는 고마움도 잊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보면 이제껏 나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불효자였던 것 같다.
어느 날이었던가,
방송일 때문에 집안일을 맡아하는 사람을 쓰고 있었는데,
그이의 일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철없던 내가 큰 소리로 그이를 나무라고 있을 때였다.
지금도 그런 기질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나 오랫동안 시간에 쫓기는 방송일을 하다 보니 성격이 급해졌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그 자리에서 표현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민망할 정도로 그이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때 옆방에 계시던 어머니가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문희야,
아무리 네가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라지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저이도 다 생각이 있을 텐데 네 입장만 소리 높아 얘기해서야 되겠니?
저이를 낮추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그리고 분명히 너는 저이를 무시하는 태도로 말을 하더구나.
설마하니 네 집안일을 해주고
네 돈을 받아가는 사람이라고 너보다 못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분명히 네 잘못이 크니 어서 저이에게 가서 사과하도록 해라."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
그렇지만 그 당시 아직 고집스러운 성격을 벗지 못했던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한쪽 귀로 흘리고 말았다.
성질부려 몇 마디 대꾸도 했던 듯싶다.
잠시 내 방에서 화를 삭이고 살펴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셨나보다 생각하고는 그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철없이 구는 자식을 나무라는 마음으로
어머니는 내 집이 있는 정릉에서 당신의 집이 있는 돈화문까지 그 먼 길을 걸어가셨다고 한다.
못된 자식에게 손 벌려 차비를 얻고 싶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차비 한 푼이 없어 젊은이도 걷기 힘든 만큼의 거리를 혼자 걸어가시면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끔해진다.
어머니를 처음 보는 사람은
그 살갑고 소녀 취향의 행동을 보고는 고생 하나 않고 살아온 부인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매 순간부터 지금까지
힘들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무슨 일이든 한 번이라도 마다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어렸을 적 허름한 한옥에서 살 때에는
비가 오면 지붕이 허술해서 빗물이 방 안으로 새어들고는 했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다른 이의 도움을 얻지 않고 당신이 직접 지붕 위로 올라가 낡은 지붕을 손보셨다.
집 안의 부실한 곳을 가만 두고 보지 못하는 성미의 어머니는,
언젠가 내 남편이 출장을 가고 없을 때 우리 집에 들르셨다가
개집 주위의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것을 보시고는 또 손수 시멘트를 개어 그곳을 메우셨다.
"얘,
유서방이 돌아와서 보고는 잘못했다고 흉이나 잡지 않을까?"
어머니는 그냥 내버려두라는 나를 말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별나다 할 만큼 깔끔한 성미는 길거리의 잡티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한다.
함께 대중탕 가는 것을 즐기는 어머니와 내가 목욕탕에 가려고 집 앞 골목길을 나서고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왜 그러실까 궁금해하고 있던 찰나 어머니가 신문지 하나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는 길가에 떨어져 있는 것을 신문지로 곱게 싸시는 것이다.
뭔가 하고 보니 개똥이었다.
참 별 걸 다 신경 쓰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작은 일에도 저렇게 깔끔을 떨고 주변을 챙기시는 어머니가 참 예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p62)
자유로운상상 - 2004. 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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