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미나 - 스페인 너는 자유다」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었던 훌리안 마리아스가 미국에서 지낼 때 이런 말을 했다.
"미국에서는 자유를 법으로 살지만, 스페인에서는 자유가 곧 생활의 냄새요 맛이다."
나는 손미나가 스페인 유학 생활에서 이 자유의 맛을 배우고 왔으리라는 상상을 해 본다.
진정한 자유의 맛에 익숙해지면 버르장머리가 없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밝아진다.
유학 후 의 손미나의 모습이 훨씬 더 밝아졌다.
그런 모습만으로도 나는 그녀가 30대 특유의 방황을 끝내고 자유와 생의 참의미를 만지고 왔음을 안다.
나의 사랑스런운 제자가 그런 좋은 경험을 책으로 펴낸다니 반갑고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 민용태(시인. 고려대 교수)
프롤로그
스페인에 가면 마음껏 춤을 출 거야
언젠가 내 생활에 '쉼표'가 필요해지면,
내 영혼에 휴식이 필요해지면, 꼭 다시 스페인을 찾아가 몇 달이고 머물고 싶었다.
그것은 지난 1995년 이후로 늘 꿈꾸어오던 일이었다.
대학 시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독립적이고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가족의 품을 떠나 힘겨운 상황에 뛰어들어 자신과의 싸움을 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3학년이 되던 해인 1994년 교환학생 자격을 얻어 호주로 떠났다.
1년간의 호주 생활은 고통스럽고 외로운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게 커다란 내면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욕심 많은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공부와 경험을 하기 위해 이듬해인 1995년,
한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스페인으로 향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스페인에 머물렀던 때의 나는
루이스 캐럴의 동화 <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주인공 엘리스와 닮아 있었다.
낯설고 당황스러운 온갖 일들을 겪으며 '나는 누구일까'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했고,
새로운 세상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 모두는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엘리스가 여행을 마치며
'이거야말로 더 흥미로운 인생이잖아!'라고 외쳤듯이,
사랑과 행복 지상주주의 스페인식 인생관을 온몸으로 흡수해
'그래, 난 꼭 이렇게 살고야 말겠어!'라며 스페인을 떠났었다.
그 후로 어느덧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렸다.
그사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치열하게 앞만 보며 달린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아나운서가 되어 꿈같은 나날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흥겨운 피티도 며칠 밤이고 계속되다 보면 지치는 법, 내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불규칙한 수면 시간과 식사로 나의 평범한 일상과 건강이 위협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보라나 태풍이 몰아친다 해도,
혹은 땡볕아래서 생방송을 하다 쓰러지거나 벌에 쏘인다 해도
절대 놓지 말아야 할 마이크를 고수하기 위해 꽤 위험한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
부지런히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더 바빠지기만 하는 방송국 생활의 딜레마를 끌어안은 채
일요일도 없이 일을 하느라 가족과의 시간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또 대학 시절을 몽땅 외국어 공부에 바쳤건만 그 열정이 무색하게도
8년간의 직장 생활은 쉬운 영어 단어조차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나의 기억을 흐려놓았다.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또 잊고 지낸것도 많은 날들이었다.
정말 쉬고 싶었고 너무나 간절히 공부를 하고 싶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가보지 못한 곳으로 여행도 가고 싶어졌다.
자유로운 새처럼 나는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휴식과 더불어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끼고 있을 즈음
때마침 읽게 된 두 권의 책이 있었다.
무라가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먼 북소리>에서 하루키는 마흔을 남기면 절대 하지 못할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갖고 있는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알기 위해 떠나는 일'
이란 결론을 내리고 그의 니이 서른일곱에 모든 것을 정리해 이탈리아로 떠났다고 했다.
그 여행에서 그는 <상실의 시대>를 탄생시켰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는 피라미드의 보석을 찾아 떠나고 싶지만
자기가 가진 양들을 포기하지 못해 방황하는 목동 산티아고가 등장한다.
고심하던 산티아고는 결국 용기를 내여 양들을 버리고 길을 떠나 피라미드에 도착하지만
그곳에 가서야 보물이 자기 집 마당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혹시 읽어봤니?
그걸 읽고 내게 있어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 봤는데
서른일곱의 하루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꿈을 찾아 나서는 일이 아닐까 싶더라고,
사실 꼭 뭘 찾겠다기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을 하면 일요일 하루는 쉬어야 하고,
1년간 일을 하면 한 번쯤은 휴가를 가줘야 하는 것처럼,
지금의 내게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거지.
가벼운 마음으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그리고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스페인에 가고 싶어.
내 몸도 마음도 그걸 간절히 원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홍대 근처 성수동의 한 강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친구 소정이에게 넋두리하듯 말했다.
장항 하게 말을 늘어놓는 내게 서정이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딱 한마디를 던졌다.
"참내, 그럼 가면 되잖아 가, 누가 가지 말래?"
자기 인생은 자기가 개척한다며
어린 나이에 무작정 혼자 미국으로 가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인공까지 된
그녀 다운 답이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 자신이 그렇게 바보처럼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녀 말이 옳았다.
사실 아무도 나를 잡는 사람은 없었다.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뿐.
내 마음속에 끌어 오르는 열정과 꿈을 위해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야말로 코엘료 소설 속의 목동 산티야고를 닮지 않았는가?
내 고민에 대한 진정한 답은 내 마음속에 있다는 소중한 진실을 몸소 깨닫기 위해서는
나도 나의 양들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모든 게 한순간에 해결되었어.
가고 싶으니까 가면 되는 건데...,
이렇게 간단한 것을 가지고 난 그동안 왜 고민만 하고 있었던 걸까?"
"근데 스페인에 가면 뭘 할 건데?" 소정이가 물었다.
"흠.... 난 춤을 출 거야. 정말 마음껏 춤을 추다 오겠어....."
다음 날부터 나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대학 은사님들께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인터넷 서핑도 했다.
스페인의 방송사에 직접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고
유럽 쪽에 인맥을 갖고 있는 선배들을 수소문해 닥치는 대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더니 일단 마음을 먹고 나니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갔다.
얼마 후 스페인 마드리드 소재 한 종합 방송사에서 주최하는
'각국의 전문 방송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부터는 비행기표를 마련하고 스페인에서 살 집을 구하는 일부터,
내가 맡고 있던 프로그램들을 정리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일까지
모든 것이 마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회사는 일단 6개월간 휴직을 하기로 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회사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갈 수도 있었지만,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춤추고 싶었던 나는 그 어떤 제약이나 굴레도 사양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혹시 그 방송사 연수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면
빨리 마치고 돌아오던지 실컷 여행이나 할 생각이었고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고 스페인에 머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듯이, 그렇게 나 자신을 놓아주고 싶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2004년 6월, 이제 내가 더 포기해야 할 양들은 없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떠나는 일만이 남았다.
정확히 9년 만에 다시 떠나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행' 내 영혼엔 이미 날개가 돋아 훨훨 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이 글은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웅진지식하우스 - 2006.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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