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 「읽고 싶은 이어령」
추위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한겨울 추위 같아서는 다시 봄이 올 것 같지 않던 것이 어느새 흰눈이 덮였던 자리에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있다.
이 계절의 순환을 믿고 있기 때문에 개구리는 땅 속에서 동면을 하고,
화초는 구근 속에서 찬바람을 견딘다.
그러나 인간은 계절의 순환에만 움직이는 벌레와 식물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들의 손으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계절,
말하자면 문화와 역사의 또 다른 시간의 순환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다.
코트를 입고 벗는 것만으로는 적응해갈 수 없고,
또 달력을 넘기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인공의 계절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정치일 수도 있고,
산업일 수도 있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가치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순환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살아왔지만,
농경민의 전통이 강한 탓인지, 문화와 역사의 순환에 대해서는 좀 둔감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의 리딩 인디케이터를 찾아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입춘'이라는 절기였다.
입춘은 문자 그대로 봄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입춘치고 춥지 않은 날이란 거의 없었다.
일 년 중에서 제일 추운 날이 실은 입춘 무렵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그런 추위 속에서도 봄의 입김을 느끼고,
그 소리를 예측하는 슬기를 지니고 있었다.
관념적으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아직 꽃도 피기 전에 여인들은 바구니를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잔설이 남아 있는 그 흙을 뒤져서 봄나물을 캤다.
달래마늘같이 섬세하게 돋아나는 새싹들을 용케도 미리 알아내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입춘을 따지듯이 혹은 아녀자들이 봄나물을 캐는 것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역사와 문명을 예견하고 행동했더라면,
우리는 아마 지금쯤 달나라쯤에 가서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시계 하나를 놓고 따져보자.
서구에서 처음 시계를 발명하고 그것이 동양으로 흘러들어왔을 때,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들의 반응은 모두 달랐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왕궁으로 들어가 황제의 장난감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귀신이 붙은 것이라 하여 굿판을 벌였다.
(대원군 때, 이른바 오랑캐들이 선물로 준 상자 속에서 시계소리가 나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무당들이 귀신을
쫓는다고 푸닥거리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서양 시계를 받아들이자,
곧 화시계라 하여 자기네들의 시간 단위에 맞도록 뜯어고쳐 실생활에 이용했다.
화시계(和時計, 일본 시계)
중국이나 한국이 일본에 비해 근대화가 늦어지고, 그 때문에 그들로부터 침략을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시계(시간)를 받아들인 태도의 비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자연의 계절은 분초를 다투는 것이 아니다.
별자리나 은하수의 흐름으로도 넉넉히 짐작하고 적응해갈 수가 있다.
그러나 역사나 문화의 시간은 초침 속에서 움직여가고 있으며 그 경쟁과 예시 속에서 발전되어가는 것이다.
시계가 보급되기 전부터 일본인들은 유곽에서 기생과 노는 데 있어서도 시간제를 도입했던,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민족이다.
선향(線香)을 태웠다.
그것이 한 가닥씩 타들어갈 때마다 화대를 계산했다.
그들은 그 선향을 '꽃'이라고 불렸는데, 거기에서 오늘날의 그 화대(化代)란 말이 생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여자와 노는 데에만 분초를 따졌겠는가!
일본인들의 문화는 바로 이 문명의 시간에 일찍부터 눈을 뜬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인위적인 그 '시계'에 맞추어 사는 것을 각박한 것으로 여겼다.
그야말로 '명월이 만공 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의 경지에서 살아왔다.
두보도 <옥화궁(玉華宮) > 시에서 말한 적이 있다.
'미인도 죽어서는 누룬 흙이 되는데 하물며 얼굴에 화장을 해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
바빠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더 오래 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러나 이제는 좋든 궂든 자연의 계절이 아니라 인공의 계절인
역사의 리딩 인디케이터를 빨리 찾아내지 않고는 누구도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리딩 인디케이터(leading indicator.선행지표)
도시 속에서 수시로 변해가는 저 군중 속에서
앞으로 올 시대의 '봄나물'을 캐내는 바구니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계절이 온 것이다.
효율성과 유호성.
앞으로 올 시대를 읽지 못하면 공룡처럼 멸망한다.
사람들은 곧잘 대표적인 예로 볼딩 로코모티브사(社)를 드는 경우가 많다.
이 회사는 20세기 초에 증기기관차를 만들어 세계에서 첫손 꼽히는 기업의 영광을 누렸다.
생산방식에 있어서나 경영에 있어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한 효율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디젤이나 전기기관차가 등장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옛날과 다름없이
증기기관차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수증기와 함께 꺼져버렸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그것이 겨울의 부채나,
여름의 화로가 되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부채를 잘 만드는 것은 효율성의 문제지만, 그것이 철에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유효성의 문제다.
그러니까 아무리 효율성이 높은 부체를 만들어도 겨울철에는 '유효성'이 없기 때문에 그 값을 잃고 만다.
그러나 디젤이나 전기기관차가 증기기관을 이기고 시대의 앞장에 서게 되지만
그것들은 다시 자동차나 비행기의 도전으로 유효성이 떨어자게 된다.
이번에는 철도 그 자체가 사양화한다.
... 기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변천을 가장 민감하게 드러내는 교통수단의 예 하나를 보더라도 자연의 계절처럼
인간의 문명에도 새잎이 단풍져 떨어졌다가는 다시 또 새싹이 피어나는 사계의 순환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래를 읽는 방법은 효율성만이 아니라 유효성을 따져봐야하고,
그 유효성을 알기 위해서는
오동잎 하나 지는 것을 보고 천하의 가을을 알아내는 시인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정치가도 기업인도 그리고 과학자라 할지라오 앞으로의 승부는 창조적인 상상력에 달려 있다.
상상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반대의 것을 결합하는 능력이다.
물과 불은 영원히 대립해 있는 것이지만,
시인들은 옛날부터 이 반대되는 물질을 결합시키는 상상의 용광로를 지니고 있었다.
시인들이 그렇게 많이 '술'을 노래해온 것은 그것이 '불타는 물'이었기 때문이다.
알코올이라는 물질 자체가 발화성을 지닌 액체지만
그것이 정신에 일으키는 영향도 물의 편정과 불의 격동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도 그렇다.
피는 액체이면서도 열을 가지고 있고 불꽃과 같은 색체를 지니고 있다.
김소월의 '산유화'를 읽어보라.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로 시작하고 있지만 그 시의 마지막에는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
갈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로 되어 있다.
꽃이 피는 것과 꽃이 지는 것은 정반대의 현상이지만,
소월의 시에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다.
순환하는 것들은 직선운동과는 다르다.
역사는 직선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셀리의 시구처럼 겨울의 추위가 거꾸로 봄의 따스함을 불려들이는 역활을 한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비합리적인 속담이 아니라,
역사의 순환성을 정확히 짚어낸 슬기다.
영원한 승자가 없듯이 영원한 패자도 없다.
가위는 보자기를 이기고 주먹은 가위를 이긴다.
그러나 그 주먹은 거꾸로 가위에 진 보자기에 진다.
가위바위보에는 순환성이 있은 뿐 절대 지배라는 것이 없다.
오는 계절을 미리 알고 노래한 시적 상상력을 기르면 우리는 미래의 의미를 읽는 미래학자가 될 것이다. (p24)
※ 이 글은 <읽고 싶은 이어령>에 실린 일부를 필사한 것임.
여백 - 2014.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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