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수필 - 「겨울호 통권 42호」
출발할 비행기의 개찰을 기다리며 무심히 건너편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알지는 못하지만 서울에서부터 한 팀으로 묶여 여정(旅程)을 같이 하는 일행들이다.
말없이 앉아 있는 한 남자에 시선이 멈추었다.
50은 넘고, 어쩌면 60으로 접어든 것 같은, 그래서 직장에서 물러나고,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쉬고 싶은 마음으로 여정에 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드는 신사였다.
체크 무늬 남방에 가벼운 여름 점퍼를 걸쳤는데, 들고 가는 배낭조차 없이 가벼운 차림이었다.
비행기가 있는 광장을 내다 보는 표정도 마냥 한가로워 보였다.
조금은 허탈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무료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서 그의 과거를 탐색해 보는 자신을 발견하고 민망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도 순수하고 발랄했던 소년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사람들을 탐색하는 20대의 모습도 있었을 것이다.
청년의 열정이나 성급함을 지녔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일에 시달리며 고민하고 불만도 토하며 의욕을 보이던 중년의 시간도 넘겼을 것이다.
지금은 한 걸음 물러서서 그런 자신을 반추하듯 바라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저 바람처럼 구름처럼 시간밖으로 물러나 가벼운 몸짓으로 서 있는 사람,
이제 나 아무개는 그저 평범한 한 인간으로 서 있는 지금인데,
그럼에도 그가 평생을 살아온 인품의 흔적이
그리고 마지막까지 종사한 직업의 흔적이 잉크가 묻어나는 그의 얼굴에서 배어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점쟁이처럼 그 사람의 과거를 탐색하며 상상의 날개까지 펼쳐 과거의 그의 행적을 만들어보기까지 했다.
사회 중심에서 떠난 지금은 그저 무거운 옷을 벗어놓은 것 같은 허전함이 있을 것이다.
새삼스레 세월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여행길에 오른 것일까?
나는 그를 통해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친근감을 느끼며,
그가 나를 지켜본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생각해 보았다.
남들도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며 탐색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아는 사람이 없어 편안했던 마음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을 먹을 때 한 아주머니가 나와 한 상에서 밥을 먹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전에 교편을 잡지 않으셨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저 방긋 웃어보이자
"느낄 수 있어요.
행동하시는 것이 분명하고 품위가 있어요."라고 토를 달았다.
나는 처음 만나는 여행자들 속에 끼어 누구와 말을 하거나 어울린 일도 없었는데
그녀는 직감으로 나의 과거를 느끼고 있었나 싶었다.
내가 신사를 바라보며 그의 과거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도 그런 직감인지도 모른다.
숨겨도 남들에게 드러나는 과거의 모습은 숨겨진 그림처럼 자신의 모습 속에 숨겨진 시간의 지도 같은 것.
지금이라도 지을 수만 있다면 지우고 근사한 과거의 그림 한 장을 숨기고 싶은데
평생 자신이 그려온 그림을 일순에 지우고 새것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
그러니 눈 밝은 사람들 앞에 도리 없이 숨은 그림은 드러나고 말 일이다.
나는 남들 앞에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나는 지금 평온하고 너그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가.
초조하고 불안한 자세로 서 있는가.
무료하고 답답한 모습으로 서 있는가.
후회하고 자책스런 모습으로 서 있는가.
캘거리에서 토론토에 이르는 4시간의 비행기에서 나는 줄곧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옆 좌석에는 일본인 연인이 앉아 있었다.
두 남녀는 기내식을 먹을 때를 빼고는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기대고 잠을 자거나 속삭이거나 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몹시 행복한 표정이었다.
내 좌측에는 캐나다 부부가 아기를 안고 타고 있었다.
호수보다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웃고 종알거리고 때로는 보채고 울기도하며
자신의 욕구에 대응해주기를 바라는 아기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
옹알거리는 아기의 목소리는 기내의 시끄러운 울림 속으로 진주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앞 T.V 대형 화면에는 30대 남성의 야심에 찬 행동의 영화가 돌아가고 있었다.
70대의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있기가 답답했던지 의자 사이를 오가고 있고, 그 뒤를 할머니가 따라다녔다.
그들 노부부는 일본 교포로, 한국에 있는 친척을 만나려 왔다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는 우리 팀의 일원이다.
비행기가 뜨기 전 탑승하는 게이트에서 자신은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 할아버지다.
자수성가하여 어느 회사의 회장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다는데 지금 그의 깨끗하고 품위 있는 모습과는 달리
눈동자는 빈 동굴처럼 깊고, 어둡고, 춥고 외로워 보였다.
할아버지가 내 앞을 지나가자 뒤따르던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가끔은 정신이 없어요." 그런 말을 하는 할머니의 표정도 담담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누구의 눈치를 살피려고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할아버지를 앞세우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걸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빈 껍질의 거미처럼 가벼웠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 발에 힘을 주어 천천히 걸었다.
젊은이들을 따라 앞서기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뒤서기도 하고,
멈춰서기도 하며, 그들과 더불어 걸어갔다.
나는 그들 속에 한 여정을 가고 있는 내가 있음을 생각한다.
과거에 어떤 직종에 종사했건 상관없이 나의 과거의 모습도 오늘의 모습도
그리고 미래의 모습도 그들 속에서 거울처럼 비쳐오고 있음을 의식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행의 맨 뒤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재잘대는 어린이들이 앞서 길을 열고.
나는 여정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자리를 바꿔가며 함께 갈 것이다. (p190)
글 - 변해명
창작수필사 - 2001.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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