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뗏목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깊은 산에서 벌채한 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강에 띄우는 그런 뗏목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그저 강을 건너기 위해 몇 그루 소나무로 어설프게 엮어서 태어난 초라한 뗏목에 불과합니다.
사실 내가 사는 곳의 강심은 그리 깊지 않아 굳이 배를 띄울 필요가 없답니다.
강을 건너는 사람도
어쩌다 하루에 한 두 명뿐이어서 강을 건너기에는 나같이 작고 볼품 없는 뗏목이 가장 알맞습니다.
나는 사람이 서너 명만 타면 더 이상 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몸피가 작아 어떤 때는
내가 강물에 떠 있는 것조차 아주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강의 하류에 있는 커다란 나룻배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나 자신이지만 그래도 나는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강가에 사는 갈대와 비오리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하다 보면 금방 하루가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강가에 어둠이 깃들이고 밤이 오면 별들 또한 은근히 말을 걸어와 긴긴밤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활은 늘 기쁨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와서 나를 타고 강을 건너면 내겐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었습니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타고 강을 건너기를 바랬습니다.
바람과 갈대와 장난을 치며 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강을 건너갈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뗏목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를 타고 가
자신의 갈 길을 부지런히 가주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는 소년을 태운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 몰래 애인을 만나러 가는 젊은 여인도 태운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태워본 적도 있으며,
또 어떤 때는 잿 가루가 된 한 젊은이의 유해를 태워 강물에 뿌린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태우다 보면 그만 그들과 정이 들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유독 정이 들어 늘 태우고 싶어 하는 이가 있게 됩니다.
내가 가장 태우고 싶어하는 이는 강 아랫마을에 사는 한 소녀입니다.
소녀는 나를 만들어 강가에 매어둔 아저씨의 따님으로 이름은 연이입니다.
강 건너 윗마을 학교로 소녀가 입학을 하게 되자
아저씨는 어느 날 소나무 몇 그루를 베어 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소녀를 태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10여 년 동안 방학 때를 제외하고 아침저녁으로 소녀를 태우고 강을 건넜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타면 그렇지 않은데 웬일인지 그 소녀만 타면 내 가슴은 늘 두근거렸습니다.
어디 몸이 아파 결석이라도 하는지 어쩌다가 소녀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물결에 거칠게 출렁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곧 첫눈이 내릴 것 같습니다.
오늘은 소녀가 몹시 그리워 집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시집을 간 뒤 새댁이 되어
어느 해인가 첫아기를 안고 한번 나타난 뒤로 소녀는 아직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소녀가 떠나간 뒤로 내 마음속에는 그리움이 생겼습니다.
그리움은 기다림을 낳았습니다.
기다림 때문에 나는 강물에 거칠게 출렁이는 일이 더 잦아졌습니다.
누구의 일생이든 그 속에 하나씩의 기다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소녀가 몹시 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어쩐지 그녀가 나타날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제 첫얼음이 얼면 나는 강가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고 맙니다.
얼어붙기 전에 그녀를 단 한 번만이라도 더 만나고 싶습니다.
훌쩍 자랐을 그녀의 아이를 태우고 고요히 떨리는 마음으로 강을 건너가고 싶습니다.
강을 건너 친정집으로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습니다.
해마다 강물이 얼어붙기 직전에 나는 소녀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내가 소녀를 가장 간절히 기다리는 순간은 해마다 첫 얼음이 얼기 직전이었습니다.
강물이 얼면 그녀가 와도 태워 줄 수가 없기 때문에
겨울이 오고 첫얼음이 얼 때쯤이면 내 가슴은 늘 두근거렸습니다.
드디어 첫눈이 내립니다.
눈송이가 강물에 닿자마자 녹아 버립니다.
나도 그녀를 만나면 저 눈송이처럼 녹아버릴 것만 같습니다.
눈은 좀처럼 그치지 않습니다.
갈대들이 추위에 떨며 함박눈을 맞고 있습니다.
멀리 눈발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 옵니다.
머리에 털모자를 쓰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내 하나가 휘적휘적 걸어와 나를 묶어둔 말뚝의 줄을 풉니다.
내가 기다리는 소녀가 아니라서 무척 실망스러웠지만 그녀를 대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사내를 건너 주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강을 건넜으면 나를 그대로 강가에 두어야 하는데, 사내가 강가 언덕 위로 나를 자꾸 끌어 올렸습니다.
나는 더럭 겁이 났습니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강가게 두고 가야지 어깨에 짊어지고
가려고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싶어 호시탐탐 도망갈 기회를 노렸습니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습니다.
사내가 이마의 땀을 훔치는 틈을 타 있는 힘을 다해 언덕 아래로 굴려내렸습니다.
그러나 사내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내는 굴려내리는 나를 얼른 다시 움켜잡고 언덕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아무리 언덕 아래로 굴려내리려고 몸부림쳐도 역부족이었습니다.
눈은 그치고 날은 몹시 추웠습니다.
사내는 나를 그렇게 강언덕에 끌어올려 놓고는 아무 말없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강가로 데려다 달라고 소리쳐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강물은 곧 얼어붙었습니다.
강물이 얼어붙자 겨울은 점점 더 깊어갔습니다.
나는 강물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강 언덕에 버려져 울고 있었습니다.
쩡쩡 얼음 갈라지는 겨울강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소녀가 보고 싶어 간혹 길게 고개를 내밀고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으나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꽁꽁 언 강 위를 걸어 다녔습니다.
강 한가운데에다 구멍을 뚫고 얼음 낚시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나를 뜯어다가 강가에 모닥불도 피웠습니다.
더 이상 소녀를 보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모닥불이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디선가 겨울 강가에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보시면
소녀를 기다리는 내 기다림이 타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주세요 -p21-
※ 이 글은 <모닥불>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정호승 / 모닥불
현대문학북스 / 2000.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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