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때 만나야 맛있다.
얼마 전 도쿄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도쿄 감동 요리점"이라는 책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음식 장르별로 최고의 식당들을 추천한 책이다.
'極私的 名店案內'(극히 사적인 병점 안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는데,
그렇고 그런 음식점 추천 책들과는 다른, 그야말로 최고의 식당 목록이었다.
추천된 곳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나도 가본 곳이라 그 선택의 엄격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식의 식당 추천은 여건상 불가능하고 나의 취향에도 맞지 않는다.
음식은 생활의 일부이다.
일상의 밥 먹는 일을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켜 불편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저 철마다 나는 신선한 식재로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동은 충분하다.
그런 식당들을 추천하고자 한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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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슬고슬 쌀밥 中에서
우리나라의 밥은 예로부터 유명했던 모양이다.
청나라 때의 장영은 <飯有十二合說(반유십이합설) >에서
"조선 사람들은 밥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 역시 <饔-雜志(옹히잡지)>에서 우리나라의 밥 짓기는
천하에 이름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밥 짓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쌀을 정히 씻어 뜨물을 말끔히 따라 버린 후 솥에 넣고 새 물을 붓되,
물이 쌀 위에 한 손바닥 두께쯤 오르게 붓고 불을 때는데,
무르게 하려면 익을 때쯤 일단 불을 물렸다가 잠시 후에 다시 불을 때며,
단단하게 하려면 불을 꺼내지 말고 시종 뭉긋한 불로 땔지니라.”
한편 궁중의 밥짓기는 일반과는 달랐던 모양으로 김용숙 교수는 <이조 궁중풍속의 연구>에서
"수라 짓는 솥은 보통 솥이 아니라 새옹이라는 활석제의 조그마한 솥(곱돌솥)에
쌀밥과 팥밥을 각각 꼭 한 그릇씩만 지었다.
이때 화로에 숯불을 담아 그 위에 놓고 은근히 뜸을 들여 짓는다."고 했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의 밥은 점점 그 맛을 잃어가고 있다.
시인 박치원은 <옛날의 밥 오늘의 밥>이라는 글에서 이제는 맛있게 지은 밥을 먹기는 틀렸다며
"전기밥솥에 익힌 많은 밥은 끓인 밥이 아니고 찐 밥이요.
가스 불로 끓인 밥은 끓인 건지 삶은 건지 알 수 없다.
찐 밥이나 삶은 밥, 구공탄 열기로 끓인 밥, 게다가 , 오염된, 소독 내가 풍풍 나는
수돗물로 지은 밥이 '밥 같은 것'이지, 밥이 아니다" 라고 한탄한 봐 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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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과 나의 연애기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70년대 중반 미국 유학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마신 셈이니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세월이다.
"술 중에 가장 맛 있는 술은 공술"이란 말도 있지만 공짜라면 물불안가리고 마실 때야 그저 생기는 대로 먹었다.
소주, 위스키, 코낙, 청주, 맥주 등 가리지 않고 마셔왔지만 유난히 정이 많이 가는 술이 와인이었으니,
내 손으로 술을 선택할 즈음 가장 빈번하게 고르게 된 술 또한 와인이었다.
가난했던 유학생시절엔 됫병(?)들이 싸구려 와인을 주로 마셨고
까버네 소비뇽이 뭐고 멜로나 샤도네이가 뭔지를 알게 된 것은 와인을 몇 년이나 마시고 나서였다.
요즈음 와인을 책보고 공부해 가면서 마시는 세대에 비하면 참으로 무식(?)하게 와인을 배운 셈이다.
'술을 공부해가면서 먹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무턱대고 입가는 대로, 생기는 대로 마셔왔다.
살아있는 와인공부를 한 셈인데 주변에 와인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 공술도 많이 얻어먹고
또 그분들로부터 귀동냥도 꽤 많이 했다.
작고 하신 은사 랄프 데이(Ralph Day) 교수는 닥치는 대로 마셔대던 나에게
이탈리안 화이트 와인(ltalian white wine)를 마시려면 '소아베' (Soave)를 마셔보라고 추천해 준 적이 있는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지금도 '소아베'는 즐겨 마시는 와인이다.
한 친구는 대학시절 캐나다의 호텔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배운 거라며
"형! 식당가에서 와인 시킬 때 '무똥까데' 시키면 실수는 안 해요"라고 가르쳐 주기도 했다.
지도교수였던 한스 토렐리((Hans Thorelli) 교수는 박사논문 Finaldefense가 끝나는 순간
축하한다면서 예쁘게 포장한 그랑크루 한 병을 건네줘서 나를 감격에 떨게 한 적도 있다.
와인을 10년 이상 마신 뒤에 그랑크루와 첫 대면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그랑크루가 그냥 좋은 와인인 줄로만 알았지.
'1855년 등급'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와인을 마시다
풍미가 마음에 들어서 무슨 와인이냐고 물어보면 '그랑크루'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와인 맛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와인과 성숙한 연애를 하는데 도움을 준 이들이 참 많다.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일단 많이, 자주 마신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와인과 어떻게 사귀면 되냐'고 물어오면
'좋아질 때까지, 알고 싶을 때까지' 그냥 마셔보라고 조언한다. (p191)
SOMO / 2011.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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