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 「적정한 삶」
코로나 사태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경험한 심리는 ‘우울’일 것이다.
학교에 갈 수 없는 학생들,
장사를 할 수 없는 소상공인,
직장을 잃은 회사원,
24시간 아이와 집에 갇힌 주부들.
사태가 장기화되고 필수적인 사회적 네트워크가 단절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정신적 신체적인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19’와 ‘우울감’이 합쳐져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니,
이 시대의 우울은 누구보다 친숙하고 가까운 정서가 아닌가 싶다.
뇌의 안쪽 중앙의 측두엽엔 편도체라 불리는 기관이 있는데, 감정을 조절하는 곳이다.
우울에 빠진 사람의 경우 편도체의 크기가 커지고 활동량도 커진다.
편도체의 비정상적인 작용은 다른 기관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수면 장애라든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유발시키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엉뚱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울이란 정확히 어떤 감정일까?
다른 부정적인 정서와 어떤 지점이 다를까? 우울의 원인은 백만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우울의 상태는 동일하다.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없는 상태를 우울로 보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치면 기름이 없는 상태다.
우울한 사람은 활력이 없고 실제로도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
행동이 없을수록 우울의 깊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들이 자주 겪는 당혹스러운 경험이 있다.
오랜 기간 정성을 다해 우울증 환자를 관찰하고 보살펴 치료에 성공한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우울에서 빠져나온 직후 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깊은 우울 상태에서 에너지가 없어 실행하지 못했던 자기 파괴적인 행위가
우울에서 벗어나자마자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괜찮아졌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주변 사람들의 충격과 슬픔은 말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어떠한 이유로든 우울할 수 있다.
그 상태는 오래 갈 수도 있고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지나갈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우울에 처했다면 다음의 두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는
물리적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즉, 먹어야 한다.
흔히 힘든 상황에서 버티는 힘은 정신력에서 온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 정신력은 어디서 오는가? 체력이다.
너무 뻔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정신력과 체력에 대해 수년간 연구를 해 봐도 결론은 한 가지였다.
체력과 정신력은 같은 배터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만약 나의 멘탈이 약해져 있다면 그땐 다른 무엇보다 피지컬을 회복해야 할 때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가볍게 걸으며 몸의 근육을 만들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
우울에서 벗어났을 때 나쁜 행동을 실행할 것에 대비해야 한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우울할 때 부정적인 생각을 지속적으로 한 경우,
우울증이 치료 된 후 그것을 실천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고 우울에 빠진 사람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우울이라는 감정 자체가 문제 상황을 증폭시키고 반복적으로 떠올리게 하여
부정적인 자극만을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하지 말고, 긍정적인 행동을 해 버리는 것이 낫다.
그것도 아주 작고 만만한 놈으로 골라서 말이다.
운동하기, 일기 쓰기, 가계부 쓰기 등. 5분에서 10분짜리의 소소한 작업들이면 된다.
여기서 핵심은 그 일이 굉장히 쉬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울할 때는 무기력이 최악에 도달한 상태이다.
무기력은 우리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계속 속삭인다.
‘넌 그 일을 할 수 없어.’
‘해도 소용없어.’
‘해 봐도 분명히 안 될 거야.’ 이 목소리를 떨쳐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무턱대고 큰일에 덤볐다간 부지불식간에 더 큰 우울을 맞이할 것이다.
이럴 때 이겨 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하는 것이다.
쉬운 걸로 딱 하나만.
평소에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작게 양을 쪼개서 만만하게 만들자.
우울할 때 꽤나 효과 좋은 행동은 청소다.
대청소는 안 된다.
구역을 작게 나눠서 조금만 치워 보자.
책장 한 칸, 서랍 하나처럼 목표를 쉽게 쪼개는 것이다.
물리적인 집 청소뿐 아니라 심리적인 청소도 좋다.
내가 자주 쓰는 방법 중 하나는 하드 디스크 정리다.
어느덧 인간이 컴퓨터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된 지도 길고 지난한 세월이 흘렀다.
얼마 전 내 하드디스크를 열어보니 무려 17만 개의 파일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무기력한 순간마다 하나씩 하나씩 정리했더니 7개월이 흘러 있었고, 2만 개 정도가 정리되었다.
참 뿌듯하다.
마치 내 인생을 정리한 듯한 기분이다.
어려운 상황 앞에서 인간은 나약해지고 무기력해지며 가끔 존재 자체가 흐려지는 경험을 한다.
어쩌다 한 번 겪는 사건으로도 한동안 힘들게 마련인데
코로나 사태가 가져온 혼란은 마음에 가하는 폭격과도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우울을 헤엄쳐 나가자고 호소하고 싶다.
만약 지금 우울 속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면
호르몬의 장난에 꺾이지 말고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보시길.
두 다리의 근육을 이용해 조금씩 걷고,
손가락을 움직여 집에 쌓인 먼지를 닦아 보길 바란다.
오래되고 쓸모없는 파일을 과감히 삭제하면서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면 좋겠다.
뇌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강하다.
사소한 행동이 지닌 큰 힘을 믿어 보길 당부 드린다. (p39)
※ 이 글은 <적정한 삶>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경일 - 적정한 삶
진성북스 - 2021.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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