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내가만난글/비문학(역사.사회.문학.

보니 앤젤로-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미국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어머니 마사 엘렌 영 트루먼 - 1

by 탄천사랑 2021. 7. 26.

보니 앤젤로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는 다른 모든 세속적인 기대와는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많은 남성들이 생각하듯 인생 자체가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시지푸스적인 노역이다.   

- 린다 R. 포시, 아들의 어머니(Mothers of Sons)

 

마사 트루먼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즉석 콘서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날 아들의 연주는 무척 훌륭했다.  비록 기교가 약간 녹이 슬긴 했지만 그동안 흐른 세월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피아노는 백악관 가족 관저에 있는 개인 집무실에 놓여 있었다.  (p83) 

해리는 '신성한 암소'라는 별명이 붙은 대통령 전용기를 보내서 어머니와 누이인 메리를 위싱턴으로 모셔왔다. 

아흔두 살의 마사는 그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았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녀에게는 너무 힘든 첫 경험이었다.

그전 주만 해도 미사는 미주리주 그랜뷰에서 여행 가방을 싸다가 라디오에 가까이 다가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온 나라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소식을 해리가 발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며,  연합군이 나치를 물리치고 승리했고,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에서 마지막 승리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미국은 그때부터 1945년 5월 8일을 유럽 전승 기념일로 정해서 계속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 

국가적인 경사에, 

이 승리가 아들의 61번째 생일날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마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었다.
아들이 어머니가 좋아하는 쇼팽의 왈츠와 베토벤의 불후의 소나타 <비창>을 연주하고 있을 때,

아마도 마사 트루먼은 1884년 5월 8일을 떠올리고 있지 않았을까  (p84)

 

마사와 남편 존은 결혼해서 그곳에 가정을 꾸렸다. 

존은 노새 상인이 되고 싶어 했는데,  라마는 그 일을 시작하기 좋은 곳처럼 보였던 것이다.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아주 오래전 결혼사진을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1881년 12월 28일 결혼식에서 마사(매티)와 존 트루먼은 후손들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새 프록코트를 입은 존의 키가 신부보다 2인치나 작은 160cm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의자에 않아서 사진을 찍었다.  

잭슨 카운티의 기준에서 보면 사회적 지위에서도 그는 신부에게 한참 뒤졌다.
그의 어깨 위에 살짝 손을 얹고 서 있는 마사는 스물아홉 살로, 

당시 보통의 신부들보다 나이가 아주 많은 편에 속했다.

.... 마사의 웨딩드레스는 정교한 수공과 혹은 비즈로 장식된 검은색 호박단으로 만들어졌으며, 

넓은 청교도식 흰색 레이스 칼라가 달려 있었다. 

아마도 마사의 어머니가 켄터키주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입었던 드레스인 것 같았다.
드레스와 거기에 어울리는 팔찌는 마사가 부잣집 딸이라는 사실을 은연중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마사의 얼굴이다.


그녀는 구식 렌즈를 통해 마치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선은 차분해 보이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마사 엘렌 영 트루먼은 확신에 차서 여유 만만하게 그녀의 새로운 삶 속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라마에서 이들 부부는 685달러를 주고 

아래층에 작은 방 네 개와 경사가 급한 지붕 아래 방 두 개가 딸린 작은 집을 샀다. 

가로 6cm, 세로 8.4cm 밖에 안 되는 

그 집은 지금 마사가 앉아 있는 백악관 2층의 넓은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작았다. 

 

건강하고 우렁차게 우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것은 그 전해에 사산된 아들이 안겨준 슬픔을 보상해 주고도 남았다.   

존은 앞마당에 소나무를 심어서 그날을 기념했다.
그리고는 아기에게 마사의 오빠 해리슨의 이름을 줄여서 만든 해리라는 평범한 이름을 지어 주었다. 

..... 그 후 일 년이 채 안 되었을 때에 

네 발 가진 짐승이면 뭐든지 파는 존의 빈약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카스 카운티로 이사했다.   

마사는 다시 아들을 낳았고

존이라는 이름과 함께 아들이 항상 사용할 수 있도록 비비안이라는 중간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2년쯤 지났을 때 마사의 아버지인 솔로몬이 나이가 들어 힘에 부친다며 사위인 존에게

그랜뷰에 있는 영가(家)의 집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농장 경영을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당시 서른여섯 살이나 되었지만 

가축거래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존에게 솔로몬의 요청은 하늘이 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 해리가 다섯 살이었을 때 여동생 메리 제인이 태어났다.
.... 농장에서 3대에 걸친 대가족이 함께 생활한  해리의 어린 시절은 

그에게 평생 행복하고 위안이 되는 추억들을 남겨 주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추억했다.

그것은 사촌들이 모여 만들어낸 사랑이 넘치는 안락한 세계었다.


.... 농장 생활은 자칫 궁핍할 수도 있었지만 마사의 농장은 그렇지 않았다.
마사는 아이들이 사물을 밝은 면을 보고,  영원한 진리를 존중할 수 있도록 밝고 명랑하게 키웠다.   

마사가 두 살 된 해리를 2층 창문 밖으로 던지면 해리슨 삼촌은 크고 억센 팔로 그를 받곤 했다. 

높이가 겨우 90cm밖에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장아장 걷는 아이에게는 비명이 나올 만한 엄청난 놀이였다.


.... 마사는 또한 피아노로 경쾌한 곡들을 연주하면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이처럼 마사는 아이들의 삶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으며, 

자신의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이들을 지력과 상상력을 키워 주었다.


이처럼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농장에는 할 일이 무척 많았다.
어린아이들조차 허드렛일을 도와야 했는데,  해리는 이때부터 일에 대한 철저한 윤리 의식을 배웠다.


.... 마사는 언제나 이 대가족의 생활과 일의 중심에 놓여 있었으며,

개척자였던  그녀의 부모가 보여준 근면함과 강건한 정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영 집안사람들은 점점 팽창하고 있는 미국의 개척지에서 훌륭한 삶을 일구어낸 수완 좋은 사람들로, 

이것은 마사가 자신의 삶을 평가할 때 하나의 척도가 되었다.
마사가 이 척도에 미치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7월 4일 독립기념일은 트루먼 집안과 영 집안사람들에게도 큰 행사였다.
.... 어른들도 다채로운 폭죽이 곡선을 그리며 하늘에 멋진 빛줄기를 만드는 것을 보며 
탄성을 지르곤 했다. 

그런데 마사는 아들 해리가 그런 것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순간 해리가 멀리 목장 끝에 있는 말들을 보지 못했던 따위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음날 마사는 즉각 행동을 취했다. 

직접(남편은 가축을 거래하려 나갔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농장 마차에 두 필의 말을 매고 해리를 옆에 

앉힌 다음 넓은 말 옆구리에 채찍을 가하면서 15마일은 족히 떨어진 캔자스시를 향해 출발한 것이다. 

여섯 살 난 아들의 눈을 전문가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 일은 긴급상황이 아닌 만큼 마사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을까? 

 이런 행동은 마사가 아들 문제에 대해 호들갑을 떤다는 비판에 대한 한 예가 아닐까?)


의사는  "평평한 안구" (의학적인 용어로는 이상 발달)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안경을
쓰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해리는 두꺼운 안경을 쓰게 되었다. 

값은 비쌌지만 눈에는 잘 맞았다. 

그날 어머니의 결단력과 시기 적적한 조치 덕택에  해리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보니 앤젤로 /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
역자 / 이미선
나무와숲 / 2001. 08. 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