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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앤젤로-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32대 대통령 루즈벨트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 루즈벨트(2)

by 탄천사랑 2021. 7. 24.

보니 앤젤로  -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

 

 

 

영국에서 몇 년 동안 학교를 다닌 후

엘리아노가 루스벨트가로 돌아왔을 때 프랭클린은 이 먼 사촌의 재미있는 사고방식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유난히 반짝이는 푸른 눈에 마음이 끌렸다.
엘리아노의 삼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그를 굉장히 존경하고 있는 데다 자신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과정에서 본보기로 삼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엘리아노 역시 이 휼륭한 청년의 구애를 받고는 너무도 놀랐다.   

하지만 프랭클린이 엘리아노와 결혼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을 독점하려고 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너무 짓눌려서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러 나가기 위해 어머니와 자신을 잇고 있던 탯줄을 자를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을 통해 자신이 너무도 사랑했고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던 어머니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뉴욕 상류사회의 화려한 인물이었던 엘리아노는 진지하고 자기비하적이었으며, 
마지못해 사교계에 첫선을 보였다. 

어머니조차 그녀에게 '할머니'라는 별명을 지어줄 정도였다. 
그런 엘리아노라면 결코 그를 지배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프랭클린은 생각했다.

만약 프랭클린이 잠재의식적으로라도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서 이런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내까지 지배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어머니의 영향력을 더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페어헤이븐에서 사라는 프랭클린과 엘리아노에게 한 가지 양보를 얻어냈다.  

그들의 약혼을 1 년 동안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엘리아노에 대한 프랭클린의 열정이 사라질 것이며, 

약혼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의 약혼이 없었던 일로 될 것이라는 사라의 생각, 

아니 희망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친척의 보호를 받고 있던 열아홉 살의 엘리아노는 어땠을까? 

엘리아노는 말년에 '우리 두 사람이 어리고 경험도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고 회상했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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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1905년 3월 17일에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엘리아노의 삼촌인 테디가 신부의 손을 이끌고 신랑에게 넘겨주고, 

뉴욕에서 열리는 중요한 정치 행사인 '성 패트릭의 날' 퍼레이드에도 참석할 수 있도록 이 날을 선택한 것이다.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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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년 후에 사라는 이 젊은 부부를 위해 완벽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생각해 냈다.
다름 아닌 아들 소유의 집을 지어 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후한 선물인가!
현대식 이스트 6번가에 살림집이 두 채이고, 

양쪽 집으로 통하는 공동 현관이 딸려 있는 35피트 너비의 웅장한 6층 건물,  사라는 한쪽 살림집을 사용할 것이다. 
..... 엘리아노는 회고록에서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울었다. 
 그러자 당황한 남편이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을 전혀 보여주지도 못하는,
 결코 내 집이라 할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화가 아주 많이 난 것 같다고 상냥하게 말하고는 
 조금 있으면 기분이 달라질 거라고 이야기한 다음 나를 혼자 있게 했다."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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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또한 엘리아노의 목적에 부합했다. 

대통령의 아내로서 엘리아노는 가난과 인종차별이라는 어두운 구석에 자신의 빛을 비출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엘리아노의 지칠 줄 모르는 현신은 칭찬과 비판을 동시에 불려 왔지만

엘리아노는 현신적인 인도주의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라는 

"네 엄마는 널 낳기만 했다"고 어린 손자 지미에게 말하곤 했다.
"네 엄마보다 오히려 내가 더 너의 엄마다." 

 

정말 잔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사라는 이 말을 입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엘리아노에게 사라는 독재자이며 가정의 폭군이었지만 손자들에게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나오는 요정 같은 할머니었다"라고 제임스는 어른이 된 뒤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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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갖고 있던 비장의 마지막 카드는 가족의 경제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라고 제임스는 말했다. 
"몇년 동안 할머니는 아버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를 이 금 올가미로 옭아맸다."
이러한 통찰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평생 동안

경제적인 면과 살림 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어머니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출판되지 않은 한 글에서 엘리아노는 그런 내적 갈등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우리 결혼 생활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프랭클린과 아이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아이들을 자신의 뜻대로 키우려 했다.

  아이들은 내 자식들이라기보다 시어머니의 자식들이나 다름없었다." 

.... 비록 자신이 시어머니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엘리아노는 이 독재적인 여가장에게 한 번도 공개적으로 대항한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남편과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했기 때문에 그냥 순응하고 물러섰던 것 같다.   

남편에 대한 시어머니의 독점적인 것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엘리아노의 감정적인 유대 관계는 점점 더 약해졌다.

.... 엘리아노는 문자 그대로 새로운 독립심을 토대로 소박한 별장을 짓고 

그것에 '발-킬(Val-Kil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곳은 스프링우드로부터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혼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떨어져 있었다. 

엘리아노는 그곳으로 사라가 싫어하는 친구들을 많이 초대했다.

이와 같은 자기 해방과 더불어 엘리아노의 결혼 생활은 장애인이 된 남편과 일을 분담하는 관계로 변했다.
.... 그러나 순종적이던 며느리가 

어느 날 누에고치에서 나와 갑자기 새로운 엘리아노로 변신했을 때 두 사람의 사이에 긴장은 팽팽해졌다.   

엘리아노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관장하지 않으면   

 

"남편과 시어머니의 아무 특징 없는 메아리에 불과한 존재로 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마 영원히 약한 성격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엘리아노가 여러 가지 사회사업과 시민운동의 주창자로서 대중 집회에 바쁘게 뛰어다니자, 

사라는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내 세대에는 저런 일들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엘리아노는 

자신이 시어머니의 꼭두각시 같다는 생각을 하며 더 이상 꼭두각시 노릇 하기를 싫어했다.


..... 1921년 8월 플랭클린이 소아마비에 걸렸을 때, 그는 즐겁고 활기찬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서른아홉 살에 접어든 플랭클린은 다시 전과는 같아질 수가 없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불구라는 장애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사라는 프랭클린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조용하고 자신을 염려해 주는 사람이 있는 하이드파크의 생활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면 아들을 마음껏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기대는 아들을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엘리아노가 마침내 사라에게 용감하게 맞섰다. 

그녀는 프랭클린에게 불구라는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공직 생활을 계속할 것을 부추겼다. 

프랭클린에게 닥친 비극은 위태위태하게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오던 두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엘리아노는 지금까지의 수동적이고 이용만 당하던 아내의 역활에서 

인도주의자의 상징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엘리아노는 가족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전세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1932년 11월 8일 사라는 하이드파크가 속해 있는 마을의 투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그녀는 정치적인 역사 속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인 아들에게 투표하는 최초의 미국인 어머니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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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아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공유하기 위해 또 하나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다.
아들이 선거에서 승리한 날 밤,  그를 키워낸 어머니는


"아들이 미국 대통령으로서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기도에 가까운 열렬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었다.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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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약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에는 대통령의 어머니를 '여왕'이라 불렸다.
사라가 설령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자신에게 과분하지만 이 은밀한 호칭을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사라는 아마도 여왕을 제외하고 사회적인 지위에서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아가 여왕이 자기보다 높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완전히 수긍하진 않았다"

가문의 한 사람은 킬킬거리며 말했다.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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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루즈벨트를 어떤 하나의 초상화로 그려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녀를 그리다 보면 크기가 벽걸이 융단만해지고 여러 가지 색깔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미친 영향에 대해 평가하면서 

애너 루스벨트 보에팅어는 사라가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프랭클린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결점을 상쇄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애너가 보기에 대통령으로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과거에 대한 자신감을 상징했고, 늘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그의 타고난 자심감과 낙관론은 길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국민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는데,

요람에서부터 그에게 그런 자심감을 심어 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 사라였다고 애너는 말했다.
사라는 미국인을 다시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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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타일이라든지 품행의 문제에서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놓치지 않았다. 

1913년에 프랭클린이 해군 차관보로 임명되었을 때 사라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자세히 내렸다.

"사랑하는 프랭클린,  갑갑해 보이니까 너무 작은 글씨로 서명하지 말거라.
 너무나 많은 공인들이 사람들이 읽을 수도 없는 형편없는 서명을 하고 있더구나."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미친 영향은 

역사의 기념비라 할 수 있는 수천 건의 서류들 위에 힘차고 안정되게 배열된 장식체의 서면으로 남아 있다.

노년기에 사라는 백악관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여자다.
 처음에는 네 할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았고, 다음에는 네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는 네가 나의 삶을 즐겁게 해 주었구나."

사라는 그들에게 자신이 현신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사라는 아버지 워렌에게는 사랑하는 딸이었고,  남편 제임스에게는 자상한 아내였으며, 

아들 프랭클린에게는 매우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 여름이 끝나갈 무렵 기력이 많이 떨어진 사라는 사랑하는 스프링우드로 돌아왔다.
.... 그리고 87세 생일을 2주 남겨놓은 9월 7일 마침내 숨을 거뒀다.


후에 엘리아노는 자신의 삶에서 정말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시어머니를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냉정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36년 동안 그렇게 가까이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애정이나 상실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장례식은 사라가 살아 있을 때 

벽난로 옆의 상석을 한 번도 내준 적이 없었던 스프링우드의 서재에서 거행되었다. 

그녀는 성 제임스 교회 묘지에서 41년 동안이나 자신을 기다려왔던 제임스와 나란히 묻혔다. 

대통령은 슬픔에 겨워 차 옆에 서서 한 번도 무덤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나중에 어머니가 남긴 많은 상자들을 살펴보다가 프랭클린은 자신이 입었던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세례복이며 초, 중, 고 시절부터 대학생 시절에 어머니와 주고받았던 수백 통의 편지들이 

깔끔하게 묶여있는  편지 다발,  몇 개의 작은 장난감들,  자신이 어머니를 위해 신경 써서 고른

많은 선물들,  그리고 어머니가 마지못해 잘라 주었던 금발의 머리카락들을 발견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행복했던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자신에게 주었던 소중한 기념품들을 접하게 되자,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사라가 죽은 후 프랭클린은 단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집에 어떤 변화도 주지 못하게 했다. 

예전에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방을 자신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날이었던

그때와 똑같이 복원하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대로 한 것이다.  -끝- (p79) 

 

보니 앤젤로 /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
역자 / 이미선
나무와숲 / 2001.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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