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예 - 「몽정의 편지」
그녀는 역시나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
"이게 내 마지막 배려야.
결혼 축하해.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나는 그녀 배 위에 뱉어낸 것들을 닦아주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이제 그것은 그녀가 처리해야 할 몫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로 누워 있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몽정의 편지들을 읽노라니 그날 밤 생각이 났다.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창가로 갔다.
'그 집은 바람을 느끼기에 너무 낮은 위치에 있지만....,
당신도 창문을 열고 이 가을을, 그녀의 기운을 느껴보길 바랍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 집안을 파고들 것입니다.'
세 번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다.
나는 그보다 높은 4층에 살고 있다.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듯 가을바람이 겨드랑이 밑을 파고든다.
완연한 가을이다.
'거봐요.'
마지막 구절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곧 겨울이 오겠구나.
서늘하고 비릿한 밤공기가 날 적신다. - p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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