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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작가책방(소설/ㅅ - ㅇ

낯선 도시에게 말 걸기 - 유럽도시기행 1 / 유시민

by 탄천사랑 2019. 12. 26.

 

 

 

유럽도시기행 1 - 유시민 / 생각의길 2019. 07. 09.

 

낯선 도시에게 말 걸기

아테네 플라카지구, 로마의 포로 로마노, 이스탄불 골든 혼, 파리 라탱지구, 빈의 제체시온, 
부다페스트 언드라시 거리,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의 집, 이런 곳에 가고 싶었다. 
다른 대륙에도 관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스무 살 무렵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곳은 주로 유럽의 도시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좋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더 자유롭고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소설보다 더 극적인 역사의 사건들을 만났고, 
그 주인공들이 살고 죽은 도시의 공간을 알게 되었다. 
삶의 환희와 슬픔, 인간의 숭고함과 비천함, 열정의 아름다움과 욕망의 맹목성을 깨닫게 해 주었던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를 그곳에 가서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기회가 없었다,
1980년대 이전 대한민국의 이십 대 남자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삼십 대에는 제법 긴 시간 독일에 살았지만, 

어린 딸이 있는 유학생 부부에게는 여행할 만한 시간과 돈이 없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았던 10년 동안은 여행 가방을 꾸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글 쓰는 일로 돌아온 후, 뜻밖의 유럽 도시 기행  집필 제안을 받았다.
원래부터 여행을 좋아했던 아내 한경혜 씨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사진을 배웠다.
'우리'는 몇 해 전부터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유럽의 도시들을 탐사하고 있다.
함께 자료를 살폈고, 가고 싶은 도시를 가려 뽑았으며, 일정과 경로를 꼼꼼하게 설계했고,

알맞은 숙소와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이 책에서 '우리'는 나와 한경혜 씨 두 사람을 가리킨다.
한경혜 씨가 본문에 자신이 따로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렇게 했다. 

유럽 도시 기행 시리즈의 1권인 이 책에는 

각기 다른 시대에 유럽의 문화수도 역할을 했던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이야기를 담았다. 
이 네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룩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성취는 

유럽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를 크게 바꾸었다. 
앞으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도시 넷을 한 권에 묶으려고 한다. 
특별한 사유가 생기지 않는다면, 2권은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 드레스덴을 다루게 될 것이다.

써놓고 보니 뭐라 말하기 곤란한 책이 되었다.
관광 안내서, 여행에세이, 도시의 역사와 건축물에 대한 보고서, 인문학 기행, 
그 무엇도 아니면서 조금씩은 그 모두이기도 한 이 책은 도시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독자들은 각각의 도시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history)과

그 도시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story)를 듣게 될 것이다. 

여행 정보(information)라고 말할 만한 것은 많지 않은데, 

그 도시를 여행하려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넣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나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그러려면 도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길과 공원,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text)’일 뿐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 도시의 텍스트도 해석을 요구하는데, 

그 요구에 응답하려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한다.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말한다. 
도시의 건축물과 공간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 

그들이 처해 있었던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누가, 언제, 왜, 어떤 제약조건 아래서,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살피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그저 자신을 보여줄 뿐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지는 않는다.

나는 건축과 예술을 모르며, 유럽 역사를 연구하지도 않았고, 여행경력도 변변치 않다.
이런 책을 써도 되는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여행을 다녔다.
다만,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 견지해 온 원칙을 적용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문자 텍스트를 읽을 때, 나는 콘텍스트를 함께 살피려고 노력한다.
그 텍스트를 쓴 사람이 언제,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목적을 품고, 왜 하필 그런 방식으로 썼는지 알아본다.
그러면 글쓴이와 깊게 교감할 수 있다.
여행하면서 알게 되었다.  도시의 텍스트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여행을 다니는 동안 컴퓨터와 인터넷을 만들고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와 엔지니어, 
검색엔진을 제공한 기업인들이 늘 고마웠다. 
26년 전 유럽에 첫발을 들였을 때는 전적으로 책과 지도에 의지해서 다녔지만 지금은 스마트폰만 들고 다닌다. 
검색엔진으로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 전혀 필요 없었다는 건 아니다. 
도시의 역사와 구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특정한 건축물과 공간과 사건과 사람에 관한 세부 정보를 찾을 때는 

포털 사이트와 검색엔진이 비할 바 없이 편리했다. 

이동 경로와 시간 계획을 짜고 교통편을 물색할 때도 그랬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이나 건물과 마주쳤을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메모를 보면서 글을 쓰다가도 수시로 검색엔진을 가동했다.

유럽의 어느 도시에 장기 체류하거나 같은 도시를 여러 번 여행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은 오래 벼른 끝에 어렵게 장만한 돈으로 유럽 여행을 떠나며, 

그렇기 때문에 한꺼번에 되도록 많은 도시를 방문하려고 한다.

여행사들이 거의 날마다 가방을 풀었다 묶었다 하면서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는 

패키지여행 상품을 제공하는 이유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혼자 또는 몇몇이서 자유롭게 다니는 쪽을 택하고 있다.
나는 다양한 스타일의 유럽 여행자들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썼다.
사정이 허락치 않아 책으로라도 유럽의 도시를 만나고 싶어 하는 독자를 위해서 

사진은 정보보다 도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을 골랐다.

나는 평범한 한국인이 하는 방식으로 유럽 도시를 여행했고,

그런 여행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몄다.
한 도시에 머무르는 기간은 4박 5일을 기본으로 했으며, 

항공편과 숙소만 미리 잡고 나머지는 모두 현지에서 결정했다.

매진 가능성이 있는 오페라나 실내악 공연은 시간 여유를 두고 인터넷으로 예약했다. 
식당은 발품을 팔고 눈과 코로 탐사해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고,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인터넷에서 방문 후기를 찾아보았다.
시내에서는 자동차를 빌리거나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 노면전차, 버스를 이용했다.
사진을 찍어야 해서 주로 걸어다녔는데, 영어가 짧아 때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이드를 쓰지 않았다.
다만 치안이 불안한 이스탄불에서는 여행사가 추천해 준 현지 가이드의 도움을 받았다.

도시는 대형서점과 비슷하다. 
무작정 들어가도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걸리고 몸도 힘들며, 

적당한 책을 찾지 못할 위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매할 책을 미리 정하고 가서 그것만 달랑 사고 돌아온다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인터넷서점에 주문하면 되지 무엇 하러 굳이 서점까지 간단 말인가. 

대형서점의 가장 큰 장점은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맛보려면 서점의 구조를 미리 파악하고, 어떤 분야의 책을 살펴볼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려고 마음먹었던 책이 신간안내나 서평에서 본 것처럼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는 건 기본이고, 
신간 코너와 베스트셀러 진열대, 스테디셀러 판매대, 기획도서 진열대, 
귀퉁이 서가까지 다니면서 이 책 저 책 들춰보는 여유를 누리는 것은 덤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낯선 유럽의 도시를 여행했다. 
찍어둔 곳은 빠뜨리지 않았고 몰랐던 공간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그러나 나는 내 방식대로 낯선 도시를 여행하면서 들었던, 

정확하게 말하면 '들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여기에 적었을 뿐이다.

그것이 가장 좋은 여행법이라거나 제일 중요한 이야기라고 주장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도시를 다녔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다른 것을 눈여겨보고 다른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따라서 글쓴이로서 내가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반응은 하나뿐이다.

"흠, 이 도시에 이런 이야기도 있단 말이지.  나름 재미있군."  이것 말고는 없다.

이 시리즈를 기획한 지 5년이 되었다.
독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면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생각의 길 출판사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2019년 7월  유시민.


※ 이 글은 <유럽도시기행 1>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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