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 나무야 나무야」
나무야 나무야 - 신영복 / 돌베개 1996. 12. 12.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석양의 북한강에서.
오늘은 모처럼 강가에 앉아서 서울에는 없는 저녁 으스름을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그때의 꿈을 생각합니다.
노을에 물든 수면에 드리운 수영 樹影과
수면을 가르는 청둥오리들의 조용한 유영 遊泳이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물에 비친 그림자는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지나가는 바람에도 쉬이 깨뜨려지는,
지극히 얇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때의 꿈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러한 그림자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환상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뛰어난 영상미학의 천재가 아득한 미래의 ET와 먼 과거의 공룡을 우리들에게 안겨준 바 있습니다.
비단 ET나 공룡만이 아니라 전자정보미디어의 급속한 발전이
우리들에게 펼치는 가상공간 Cyber space의 세계도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세계는 이제 우리들의 가까운 곳에 다가와 있습니다.
바로 안방의 탁상에서부터 방문 열듯 쉽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
나는 해 저무는 물가에 앉아서 당신의 우려를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자기가 땀 흘린 것이 아닌 것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는
우리 시대의 집단적 증후군은 기본적으로 환상이고 그림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생활은 스스로 자기의 길을 만들어 나간다'라는 짧은 시구를 당신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아침이 되면 간밤의 꿈을 세숫물에 헹구어내듯이
삶은 그 투박한 질감으로 우리를 모든 종류의 잠에서 깨어나게 할 것입니다.
인적이 없는 이곳 강변에도 어느덧 해가 지면서 수면 위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끝으로 어느 연기자의 '갈채와 통곡'에 관한 당신의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키며 이 엽서를 마치려 합니다.
관객들의 뜨거운 갈채와 함께 막이 내리면 그는 홀로 분장실에 남아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의 통곡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갈채는 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바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는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무대 위의 그림자로 살고 있는가?'
이것이 통곡의 이유였다고 하였습니다.
텅 빈 분장실에 홀로 남아 쏟아내는 그의 통곡 때문에 당신은 그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통곡은 그를 인간으로 세워놓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얻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하는 한 그루 나무인지도 모릅니다.
옛 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鑑於水) 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이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鑑於人)'.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이 금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어깨동무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작가책방(소설 > ㅅ - 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뮤엘 스마일즈 - 1. 인격의 힘 (0) | 2023.08.03 |
---|---|
이방인 - 알베르 카뮈 (0) | 2007.05.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