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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대한민국 상류사회/대저택에 외롭게 바려진 소공녀

by 탄천사랑 2007. 6. 16.

이석영 - 「대한민국 상류사회

 


'점심은 파리의 맥심 레스토랑에서 먹고, 저녁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와서 먹는다?' 

언젠가 서양의 최고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기억나는 꿈같은 내용이다.
그들의 막대한 부와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서민은 상상도 못할 꿈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친구나 그냥 잘 아는 사이 정도로 그들 생활의 전부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가시적인 것만으로도 적지않은 경이감이 들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스스로 피땀 흘려 사업을 일구었거나 전문직종의 일을 하여 부를 축적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리 놀랄 만한 '부의 행적'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해도, 

적어도 그들은 땀 흘려 번 돈의 소중한 가치를 알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단지 줄 잘 서서(물론 그것도 타고난 복이지만)부모를 잘 만난 사람들은 돈문제에 관한 한,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아무런 개념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단지 내 능력 하나만으로 힘겹게 생활하며 빚치디꺼리까지 떠맡아야 했던 나는 

주변의 그런 환경들에 가끔씩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기도 했다.

돈문제로 유난히 힘이 들던 어느 해 초겨울이었다.
동창인 G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이 우리 가게에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온갖 화제들이 만발하였고 얘기는 자연스레 연말 망년회 계획으로 이어졌다..

그때 친구들 중에 유일한 어린 시절 동창이며 나와 친한 G가 대뜸 이런 제안을 했다.

"석영아. 우리 이번 연말에 스위스에 가서 스키나 타다 오자.
  어딜가봐도 스키 타긴 역시 스위스가 제일 좋아. 캐나다보다 훨씬 좋은 것 같아.  

  서울에 있으면 망년회다 뭐다 해서 술만 많이 마시게 되잖니.
  아예 알프스에 가서 푹 쉬다 오는 게 훨씬 낫지.

  작년에는 서울에서 꼼짝도 못했거든."

그는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 중 유일한 총각이었고 나 역시 혼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 안보고 그럴 수 있으리란 생각에 스스럼없이 꺼낸 얘기일 것이다.

지금이야 휴가철이면 저렴한 가격에 해외여행상품을 내놓은 여행자가 흔해졌지만 
80년대만 해도 레저를 즐기려 외국에 마음내키는대로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순간에 나는 성격좋고 

너그러운 친구라는 이미지를 단숨에 깨뜨리고도 남을 만큼 퉁명스럽게 면박을 주고 말았다.
그 친구가 알프스가 아니라 달나라에 가서 스키를 타고 온다고 하여도 놀라지 않을 만큼 
그 집의 재력을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어서 자격지심으로 화가 난 것도 분명 아니었다.
단지 나는 '스위스에 스키나 타러 가자'는 그 말투에 화가 날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웬만큼 사는 사람들도, 그 정도 돈과 시간이 걸리는 휴가라면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치 '오늘은 생맥주보다 소주를 마시는 게 낫다'는 식으로 아주 사소한 선택을 해버리는 듯한 
그 말투에서 가진 자 특유의 몸에 밴 교만함이 한순간에 오랜 우정의 벽을 뚫고 화악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경영하던 디스코텍은 멤버십 클럽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강남에 대형 디스코텍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후로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외에는 별로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역시 손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친구들 몇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들끼리 모여 즐겁게 놀다보니 조금씩 과음을 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돌아간 뒤 경리직원과 계산을 마칠 때쯤이었다.
조용한 실내에 새벽을 가르며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끼게 했다.

"석영아. 우리가 않아 있던 자리에 혹시 내 팔찌 떨어져 있나 찾아 봐줄래?"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그녀는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그녀의 집안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알부자에 부동산 재벌이다.
그래서 보석에는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그녀는 늘 값비싼 액세서리를 하고 다녔는데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고가품이 아닐까 싶어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웨이터들을 시켜서 화장실을 비롯해 온 가게를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원래 귀중품은 숨는다는 속설대로 팔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떡하니? 없는데---  그 팔찌 비싼 거니?"

"할 수 없지 뭐. 샤넬에 특별히 디자인해서 맞춘 건데. 
  괜찮아, 신경쓰지 마. 
  다른 곳에서 떨어뜨린 것같아.  내가 조금 취하긴 했나 봐" 하고 수화기를 내린다.

샤넬재품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친구의 말투로 보아 그다지 값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잊어 버렸다.
그러나 다음날 그 친구를 만나보니 

샤넬 마크에다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수제품으로 천만원이 넘는 팔찌라는 것을 알았다

결혼도 안한 20대 처녀가 캐주얼하게 차고 다니는 팔찌가 천만원이 넘는 고가라니---,
물론 그 친구도 그것을 잃어버리고 속이 상했겠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무심한 반응에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해도 거기엔 좁혀지지 않을 벽같은 게 분명히 있었다.

어려서 유학을 갔던 그녀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사립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귀족의 자제들, 부유층 자제들만 들어가는 전통있는 학교이니만큼 
승마같은 스포츠는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곳이었고 그녀는 가끔씩 그때 얘기를 꺼내곤 했었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지내야했던 외로움, 
승마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고생한 얘기들을 무척이나 가슴아픈 기억을 떠올리듯이 심각한 얼굴로 얘기하곤 하였다.
장사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어떤 내용의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주는 나였기에,
애초에 친구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여름휴가를 앞둔 7월 초가 되자 그 친구는 자기네 별장으로 놀러가자고 제의를 해왔다.
1년 내내 쉬는 날 없이 몇 년을 일에만 전념해온 나는 
하루나 이틀 정도 한적하고 편안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으므로 그 제안에 솔깃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가자고 한 별장은 용인도 양평도 아닌, 
자영업을 하며 재산세도 안내는 20대의 혼자 사는 이혼녀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곳,

미국 비자가 필요한 곳에 있었다.
그곳은 미국에서도 유명한 휴양지라는데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개인해변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네 별장 크기만큼의 앞바다는 그녀 집의 소유이므로 한밤중이건, 
대낮이건 발가벗고 수영을 해도 누구도 상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가까운 곳에 고급음식점들이 많으며 얼마든지 배달시켜 먹을 수 있다며 나를 부추겼다.
그녀가 자기네 집의 부유함을 과시하거나 잘난 척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님을 나는 안다.
순수하게 나에게 친절을 배풀고 싶었겠고, 가려고 하는 곳에 대해 있는 사실 그대로를 얘기한것 뿐이었다.
어쩌면 그 정도는

그 집안의 부유함으로 보아 자랑거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단지 서글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려움없이(무척 부유하게라는 표현이 더 옳을것 같다)자란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개가 순수하고 착하며 또래에 비해 유아적인 행동을 하는 편이다.

흔히 그런 사람들을 보고 아무것도 모르고 곱게 자랐다고 미화시키며 명예와 돈을 가장 중요시하는 계층에서는 
그런 집안의 딸들을 최고의 며느리감으로 여기며 사돈을 맺지 못해 안달하는 것도 심심찮게 본다.
그야말로 곱게만 자라 

지독히도 사회성이 없던 그녀가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라면서 

한밤중이나 새벽에 뜬금없이 전화를 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동공이 풀린 눈으로 넋나간 여자처럼 찾아와 횡설수설하기도 하였다.
그 친구가 변해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 친구의 참모습을 몰랐었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로 남아있지만,
그런 상태가 심해졌다 싶으면 그녀는 한참씩 연락이 두절되곤 했다.

나는 외국에 연고가 많은 그녀가 단순히 여행을 갔다오는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지만 
어느날 들려오는 소문의 내용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상습적으로 약물복용을 하였으며 상태가 심각해지면 

부모가 나서서 외국에 있는 병원에 소문 안나게 입원시키고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녀의 입장을 시샘하는 사람들의 험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내게 비친 그녀의 이상한 행동들을 보건대 소문이라고 넘겨버리기엔 웬지 미심적은 구석이 많았다.

뜸하게 나타나던 그녀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1년쯤 지난 후 나는 어느 디스코텍에서 우연히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이 어딘가 변한 모습으로, 

젊은 남자 DJ 여러명 사이에 여왕처럼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에는 비싼 양주가 놓여 있었다.
차고 넘치는 돈으로 인해 퇴폐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같아 무척 씁쓰레하였다.

여려서부터 이 나라, 저 나라에 있는 저택에 머물며 귀족학교를 다니고, 
공주처럼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다 가질 수 있었던 그녀의 정신적 방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아마도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으며 또래의 친구들과 부대끼면서 
공감대를 같이 하는 것, 성처럼 넓은 저택에 외롭게 버려진 작은 여자아이가 아니라,
가족들의 숨결이 늘 가까이 와닿는 화목함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그런 친구들을 통해 
이 세상은 지독히도 공평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느끼고 또 느낄 수 있었다.  (p 24)
※ 이 글은 <대한민국 상류사회>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이석영 - 대한민국 상류사회
베스트셀러 - 1997.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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