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영 -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LA에서 시카고까지 연결된 66번 국도와 40번 고속도로가 관통하는 텍사스 북부의 앨버커키
이곳은 미국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고도가 높아서 여름에는 덥고 습하며,
겨울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는 도시다.
네가 머물 때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그다음엔 어김없이 안개가 도시를 덮어버렸다.
그날 오후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
해피 아워(Happy Hour)가 끝난 한가해진 카페 안은 밖에 깔린 안개처럼 커피 향이 가득했다.
그리고 난 거기서 널 보았다.
넌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매달리다시피 앉아
이런 변두리 도시는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안개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넌 충분히 아름다워 보였다.
너의 피부는 그리스산 대리석처럼 곱고 하얗게 빛났고,
짙은 갈색 머리는 작은 시냇물처럼 네 머리에서 어깨 위로 흐르고 있었다.
난 네 뒷편에 앉아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주문했다.
그게 제일 쌌기 때문이다.
주문한 커피가 내 앞에 놓이고,
난 마시지도 않는 커피에 몇 번이고 숟가락을 찔러 저으면서 안개 덮인 도시를 바라보았다.
너와 함께.
안개 속에 갇혀 이 도시를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난 네게 물었다.
"여긴 오늘처럼 안개가 자주 끼나 보지?"
넌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기 처음인가봐?
여긴 가끔 이렇게 안개가 껴.
이 동네는 꽤 높은 곳에 있거든."
"그래 난 뉴 멕시코는 안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뉴 멕시코는 여기보다 더 심한 곳도 많아.
거긴 정말 지독하지.
너 여행하는 거냐?"
"응,
여행 중이야.
LA에서 뉴욕까지 차로 여행하는 중이야."
내 말에 흥미가 생겼던지 넌 아예 몸을 돌려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학생? 아니면 그냥 여행자? 그동안 어디 어디 다녀왔어?
캘리포니아는 어때?
혼자 여헹하면 정말 좋겠다.
뉴욕 가면 뭐할 거야?
끊임없이 질문을 하더니 넌 하소연하듯 네 이야기를 했다.
열여덟 살이고, 여기서 태어나 지금까지 쭉 여기서만 살았다고.
넌 LA나 뉴욕 같은 큰 도시엔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한 이년 동안 일을 해서 돈을 모으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 뉴욕이든 LA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헤어디자이너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사실 난 네가 너무 빨리 이야기를 해서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네 입과 눈을 보며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 이야기가 얼마나 간절한지도,
넌 정말 이곳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고 당장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보였다.
난 네게 한국에 대해서도 조금 말해줬다.
맵지만 정말 맛있는 김치만두, 그리고 러시아워에 서울이 얼마나 차가 막히는지에 대해서도,
넌 내 말을 듣고는 언젠가 한국에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참을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 백열등 같은 해가 다시 구름 사이로 보였다.
넌 시계를 보더니 이제 일하러 갈 시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뉴욕에 가면 꼭 메일을 보내달라며 주소를 적어주고 작별인사를 했다.
마시지도 않은 커피에다 탁자에 놓인 후춧가루를 잔뜩 뿌려놓고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주 뒤에 뉴욕에 도착해서
너에게 몇 번이고 메일을 보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메일은 계속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난 그저 언젠가 네가 오게 될지도 모르는 뉴욕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래, 난 그날 너에게 나랑 같이 내 차를 타고 뉴욕으로 떠나자고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뉴욕으로 가고 싶다는 네 소망이 그저 마음속 꿈일지도 모르니
그 꿈이 잘 자라게 내버려뒸어야 헸는지도 모른다.
난 지금 네게 다시 뭔가 묻고 싶은데, 넌 앨버커키의 짚은 안개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난 네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다.
언젠가 생각보다 꽤 많은 미국인들이 자기가 태어난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넌 그렇게 되지 말기를.....,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뒤.
길은 언제나 우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떠나는 건 우리의 진심이야.
돈, 시간 그리고 미래 따위를 생각하면 우린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으니,
네 얼굴을 닮은 꿈과 네 마음을 닮은 진심을 놓치지 않기를.....,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되려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우리 모두 저마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꼭 찾아내길 바란다. (p83)
※ 이 글은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동영 -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달 - 2007.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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