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존재는 눈물 흘린다 - 007)」
그리고 그날 저녁,
김과 내가 복도에서 헤어지고 난 지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후쯤, 김과 나는 다시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의 곁에는 밤색 머리칼을 가진 러시아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관리인 여인에게 다가가 돈을 내밀었고, 나는 내 손에 들린 미네랄 워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러시아 여자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김이 몇 발자국 먼저, 내가 몇 발자국 뒤에서 복도를 걸어갔다.
우리들의 발소리가 긴 복도를 사각사각 울렸던가 아니던가
다음날.
빅또르 박이 아침에 우리들을 인솔해, 붉은광장으로 데리고 갔다.
성 바실리 성당과 끄레믈린 궁을 돌아보고 나서 빅또르 박은 이제 우리가 레닌의 묘를 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마치 저승으로 통하는 것처럼 깊고 어두운 침묵이 깔린 계단으로 두 사람씩 줄을 서서 내려갔다.
어두운 지하세계로 내려가자 핀 조명이 밝혀진 곳에 밀랍인형 같은 병정이 서 있었다.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에다 세로로 대고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정말 인형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발밑을 분간하기 힘든 계단을 몇 바퀴 돌아 우리는 레닌 묘에 다다랐다.
어렸을 때 우리집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한복을 입고 장구를 치는 예쁜이 인형처럼,
레닌은 유리 상자 속에 누워 있었다.
그는 참 작았다.
키가 158cm의 단구라고 했던가.
지하의 무덤 속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얼핏 김과 나의 눈이 레닌의 유리관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모스끄바에는 새가 없대,
모스끄바에는 산도 없고, 모스끄바에는 아파트뿐, 개인집이 단 한 채도 없지.
택시도 없었구, 영어를 알아듣는 종업원들도 없는 호텔,
창녀는 없지만 인터걸은 있고 산은 없지만 언덕이 하나 있고, 이제 여기 레닌이 있다.
나는 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었다.
빅또르 박이 천천히 대열의 앞을 인솔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우리들은 죽은 레닌을 거기 남겨둔 채 지하의 어두운 묘지를 빠져나왔다.
공항면세점에서 나는 마지막 남은 러시아의 동전을 바꿔 공중전화 코인을 샀다.
C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디리릭, 디리릭 여러 번 신호가 갔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C도 없고 C의 부인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공중전화를 걸 수 있는 러시아 코인 하나를 기념으로 지갑 속에 넣고
국제전화카드를 스텝에게서 빌려 서울로 전화를 넣었다.
모스끄바에 도착한 이래 처음이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시어머니였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시어머니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전화를 아이에게 바꾸어주었다.
아가야 엄마야,
엄마 해봐. / 내가 말했다.
엄마,
그래봐, 엄마 빨리 오세요,
그래봐. / 아이의 목소리 대신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야,
엄마 해봐. / 내가 다시 말했다.
아, 아, /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금방 데리러 갈게,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아. /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가 대답했다.
전화를 다시 받은 시어머니와 몇 마디 나누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나의 아이의 얼굴이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멈추어 선 채로 나는 핸드백 속에 늘 가지고 다니던 아이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그 사진은 아이가 6개월 무렵이 되었을 때 찍은 것이었다.
지금 아이는 많이 변했으리라.
서울을 떠날 때 본 아이의 마지막 모습도 이것과는 달랐으니까.
하지만 기억은 사진 속에서만 선명할 뿐,
모스끄바로 오기 며칠 전 시댁에서 바이바이를 하고 온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C의 얼굴도 B의 얼굴도 함께 떠났던 마지막 여행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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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무슨 말을 했던가.
우리는 이제 인도로 간다, 라고 막막한 바다를 향해 말했던 것이 정말 C였던가.
그 말을 한 것은 혹시 내가 아니었을까.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던 C의 모습이 지워지고
그 곁에서 언제나 음울한 표정으로 서 있던 B의 모습도 지워지고
이윽고 내 모습도 지워지고 막막한 바다만 남았다.
그 말을 했던 건 그러면 바다였던가,
바다 같지 않은 바다.
섬으로 막막히 막혀버린 바다.
바람이 직선으로 불어오지 못하는 바다.
하지만 파도가 이는 푸른 색깔의, 그러므로 바다.
아마도 서울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아이를 보러 가게 되리라.
아이에게 엄마라는 말을 가르치기 위해 하루종일 씨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말과 아빠라는 말,
맘마라는 말과 산이라는 말 그리고 별과 새와 나무와 강, 자동차와 우산이라는 말.
아이가 좀 더 크면 푸르스름하다거나 어둑어둑하다거나 얼핏,
문득, 새록새록하다는 말을 가르치게 되리라.
그러면 나는 집 베란다에 작은 의자를 내다놓고 디스 담배를 피우게 되겠지.
택시를 타면 모국어로 말하게 되리라.
버스를 타면 늘 지겹게 켜 있던, 남자 코미디언과 여자 코미디언이 수다를 떠는 방송을 듣게 되리라.
수다스럽다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가끔은 운전사의 뒷자리에 앉아서 나는 그들의 우스개를 이해하고 어쩌면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면세구역을 향해 걸었고 이어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자리를 잡았다.
비행기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승객 237 명을 태운 보잉기는 안간힘을 쓰며 바람을 가르고 있다.
안전 벨트를 맨 사람들은 움직임이 없고 복도에는 스튜어디스도 없다.
비행기는 온몸을 다해 달려가다가 마침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우주를 지배하는 중력과의 싸움이었다.
새도 아니면서 날아오르려고 하는 쇳덩어리의 몸부림.
귀와 목구멍과 가슴과 배에 이상한 통증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비상을 시작했다.
창가로 내다보이는 모스끄바가 기우뚱하며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끝-
공지영 - 존재는 눈물 흘린다 (단편소설집. 존재는 눈물 흘린다 007)
창작과비평사 - 1999.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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