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魯迅) - (단편소설2집) 『방황(彷徨)』 중에서 '고독한 사람(孤独者)'
2
우리들이 세 번째로 얼굴을 대하게 된 것은 그해 초겨울 S시의 어느 책방에서였다.
우린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친해진 것은 그해가 끝날 무렵 내가 직장을 잃은 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곧잘 리엔쑤를 방문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의 하나는 무료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그처럼 차가운 성격이면서도 실의에 빠진 사람에겐 아주 친절하게 대해 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일이란 오름과 내리막이 일정하지 않아서 실의에 찬 사람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실의에 차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오랜 벗이 없다는 것이다. 이 풍문은 단순한 풍문이 아니었다.
내 뜻을 알렸더니 곧 들어오라는 반응이 있었다.
두 칸을 터놓은 객실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의자와 탁자를 제외하고는 몇 개의 책장이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평판으로는 그가 대단한 '신식파'라고 하지만, 그 책장에는 그다지 새로운 서적이 없었다.
그는 내가 직업을 잃었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판에 박은 듯한 인사는 곧 끝났다.
주객이 함께 묵묵히 마주 보고 있자니 점차로 거북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잠깐 사이에 담배를 한 대 피워 손가락이 탈 정도가 되어서야 바닥에 던졌다.
"안 피우겠소?"
손을 뻗쳐 두 개비 째를 집으려 하면서 그가 불쑥 물었다.
그래서 나도 한 개비 집어 불을 붙였다.
교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서적에 관한 이야기 등을 했지만, 아직도 거북하고 답답했다.
내가 막 돌아가려고 했을 때,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리더니 어린아이 네 명이 들어왔다.
큰 놈은 여덟이나 아홉 살쯤, 그리고 작은 놈은 네댓 살쯤 되어 보였는데,
아이들의 얼굴과 손, 옷에는 꼬질꼬질 땟국이 흘렀고, 하나같이 다 못생겼다.
그런데도 리엔쑤의 눈에는 금세 기쁜 빛이 떠올랐다.
그는 황급히 일어나더니 객실 옆방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따량, 얼량, 모두 이리 온!
너희들 어제 하모니카를 갖고 싶다고 했지?
내가 사왔어."
어린아이들은 모두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모두들 하모니카를 불면서 나왔다.
그런데 객실로 나오자마자 웬일인지 갑자기 싸움이 벌어져서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한 사람에 하나씩이야.
다 똑같은 것이니 싸우면 안 된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뒤에서 이렇게 타이르고 있었다.
"누구네 아이들입니까?" 내가 물어 보았다.
"집주인네 아이들입니다.
어머니가 없어요.
할머니만 한 분 계시죠..."
"집주인은 홀아빕니까?"
"그래요.
부인이 죽은 지 삼사 년 되었다던가 ...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독신자에게 방을 빌려 주지도 않았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째서 그가 아직도 독신으로 있는가를 물어 보고 싶었지만,
아직 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묻지 않았다.
만날수록 리엔쑤는 꽤 이야기가 통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토론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 토론은 때때로 기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님 가운데는 영 상대하지 못할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위따푸(郁達夫)의 "타락"을 읽은 때문이겠는데,
노상 자기 자신을 가리켜 '불행한 청년'이라든가,
'인간쓰레기'라고 하면서 게처럼 웅크리고 거만하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서 '후유'하고 한숨을 쉬며
이맛살을 찌푸리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주인집 아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툭탁거리고 싸우거나
접시나 대접을 뒤엎으면서까지 과자를 내놓으라고 조르는 형편이라 귀찮아서 머리를 내저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리엔쑤는 그애들을 보면 오히려 평소에 그렇게 차갑던 표정도 짓지 않고
마치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언젠가 한번은 싼량이 성홍열에 걸렸는데, 어찌나 속을 태웠는지 검은 얼굴이 더욱 시꺼멓게 되었다고 한다.
성홍열(몹시 열이 많이 나서 전신이 빨갛게 되는 전염병)
그런데 그 병이 뜻밖에도 가벼웠기 때문에 후에 아이들의 할머니로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어린아이는 좋아.
순진하기 이를 데 없거든..." 그는 내가 귀찮아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하루는 기회를 보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도 않을 걸세." 나는 되는 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어른들의 나쁜 버릇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없단 말이야.
후천적인 결점, 자네가 평소에 공격하는 그런 결점은 환경의 탓일세.
선천적으로는 결코 나쁘지 않아.
천진함...
나는 중국에 희망이 있다면 이점뿐이라고 생각하네."
"아닐 거야.
어린아이들에게 악의 뿌리가 없다면 자라서 어떻게 악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나.
예컨대 한 알의 씨앗이라도 그 내부에는 가지나 잎,
꽃, 열매가 되는 배자가 본래부터 포함되어 있으니까 성장해서 그런 것들이 생겨나는 거야.
만일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면..."
나는 당시에 무료해서 괴로웠던 차라, 고관들이 하야 후에 정진하든가 참선하듯이 불경을 읽고 있었다.
물론 불교의 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었지만, 겁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댔다.
그러자 리엔쑤는 매우 화가 나서 흘끗 나를 쳐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할말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냉정함이 그에게 나타났음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연거푸 담배를 두 개비나 피웠다.
세 개비 째를 피우려 손을 뻗칠 때, 나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이런 거북한 기분은 석 달 동안이나 계속된 후에 겨우 풀렸다.
그 풀린 이유는 대개 절반은 아마도 잊어버렸기 때문이겠고, 나머지 절반은 그 자신이 이 순진한 아이들로 인해 박해를 받게 되자,
내가 어린아이를 모독하는 견해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것은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집에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슬픈 듯한 표정으로 그는 반쯤 머리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자네 집에 오는 도중에, 거리에서 꼬마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갈대를 들고 나를 향해서 '넘어 뜨려라!'라고 하는 거야.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걷는 아이였는데 말이야..."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겠지." 말해버리고 나서 나는 이내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계속 술을 마시고 그 사이사이에 연달아 담배를 피워댔다.
"...그렇게 말하니,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네." 나는 다른 말을 꺼내서 그 말을 얼버무렸다.
"자네는 절대로 사람을 방문하는 성질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오늘은 마음이 내켰지?
우리들이 서로 안 지도 1년이 넘었지만, 자네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 않은가?"
"내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려던 참일세.
앞으로 당분간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말아 주게.
집에는 지금 정말 귀찮은 어른 하나와 아이 하나가 와 있단 말일세.
모두 사람 같지도 않아!"
"어른 하나에 아이 하나라?
누구를 말하는 거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내 사촌과 그의 자식이야.
핫하하!
자식놈이 꼭 제 아비를 닮았더군."
"시내에 와서 자네를 만나고,
겸해서 구경이라도 하려고 온 건가?"
"아냐.
내게 의논할 것이 있다는 거야.
그 아이를 내 양자로 삼으라고 하더군."
"뭐?
자네의 양자로 말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자넨 아직 결혼 전이 아닌가?"
"물론 내가 결혼 전이라는 걸 알고 있지.
하기는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아.
그들의 진짜 속셈은 저 한석산에 있는 집을 자기들 소유로 하려는 거야.
나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자네도 알고 있다시피 난 돈이 생기면 써 버리고 마니까. 그 헌 집밖에 없단 말야.
그놈들 부자의 일생 사업이 그 집을 차지한 후에 지금 그 집에 살고 있는 늙은 하녀를 내쫓는 일이란 말일세."
그의 냉혹한 어조는 나를 섬뜩하게 했지만, 나는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자네 친척인데 그렇게까지야 하겠나?
다만 생각이 좀 고루할 뿐일거야.
예를 들면 그해 자네가 엉엉 울었을 때, 정색을 하며 자네를 둘러싸고 열심히 위로한 것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에게 증서에 도장을 찍게 해서 우리 집을 앗아 가려고 내가 울었을 때도 그렇게들 열심히 위로하려 들었던 거야..."
그때의 광경을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두 눈을 하늘로 향하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결국 문제의 열쇠는 자네에게 어린아이가 없다는 데 있는 거로구먼.
도대체 자네는 왜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나?"
나는 갑자기 다른 화제를, 그것도 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화제를 꺼냈다.
이때야말로 다시 없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한참 후에 그는 그 시선을 자신의 무릎 위로 옮겼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대답은 없었다.
3
그러나 이렇게 한가하고 평안한 환경이었지만 리엔쑤에게는 안주할 만한 땅이 못 되었다.
루쉰 - 고독한 사람(孤獨者)
역자 - 김시준
을유문화사 - 2008.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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