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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문화 정보

존재는 눈물 흘린다 - 존재는 눈물 흘린다(7~11)

by 탄천사랑 2008. 9. 18.

공지영 - 「존재는 눈물 흘린다 (카테고리/004)



(7)
나는 남자가 내미는 라이터 불에 담배를 붙였다. 
라이터를 닫고 딱히 할 일도 없으므로,하는 표정으로 남자는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담배를 피우지 못했었다. 
그는 내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는 것을 좋아했었다.

-마추픽추에 가본 일이 있으세요?

밀림의 여름 같은 진초록색과 자주색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붉은 빛이 켜켜이 쌓인 화려한 칵테일이 날라져오자 남자가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며칠 전에 거기서 이리로 왔어요.

남자가 나를 따라 잔을 들며 말했다. 
나는 차 수리가 끝나지 않는다 해도 이 잔을 비우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고를 당한 이 가을날 오후에 핸드폰과 찌그러진 차와 아이의 돌반지까지 팔 생각을 하면서 
이 낯선 남자와 마주앉아 마추픽추가 있는 페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왜 페루이고 하필이면 왜 마추픽추인가 말이다. 
단 한번 부쳐져온 그의 엽서에는 시루떡처럼 생긴 마추픽추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잠시 시간이 나서 마추픽추에 들렀다. 
수도 리마에서 한 시간 남동쪽으로 날아왔지. 
거기서 북서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우루밤바의 험준한 산악지대 속에 ‘늙은 봉우리’ 마추 픽추와‘젊은 봉우리’와이나픽추가 있다. 

이 두 산이 이어진 곳에는 하늘로 날아올라 보아야만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잃어버린 도시' 가 있지. 
인구 일 만쯤을 수용할 수 있는 잉카의 도시였으나 언제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언제 사람들이 떠났는지 알 길이 없다. 
모든 것은 이제 전설 속에 묻혔을 뿐…… 
나는 그가 보낸 엽서를 세 번쯤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가 왜 마추픽추에 갔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젊은 봉우리와 늙은 봉우리, 
그리고 새처럼 날아오르지 않으면 그 모습이 파악되지 않는, 
이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잃어버린 도시……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왜 그 도시를 그토록 힘들여 지었을까. 
그는 아마도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서 그는, 
소꿉처럼 작은 토산품을 외국인 관광객에게 들고 다니며 파는 어린 소녀의 그 작고 조잡한 물건을 모두 사서 
제 가방에 넣고는 그 소녀를 무릎에 앉힌 채 소녀의 검은 머리를 땋아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젠가 월남 지사에서 근무할 때도 그는 통킹만(灣)에서 만난 소녀의 물건을 모두 사주었다고 했었다. 
그의 집 진열장에는 쓸모없는 그런 물건들이 주르르 서 있었다. 
다 합쳐봐야 몇 푼도 되지 않는 물건을 팔기 위해 작은 아이가 애쓰고 있는 게 안쓰러웠다고. 
나는 쓰레기통에서 다시 엽서를 꺼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잘게 찢어버렸던 것 같다. 
마주칠 힘이 없으면 돌아가라,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라…… 그것이 서른 몇 살을 사는 동안 살아가기 위해 내가 얻은 유일한 진실이었다.

-저, 결혼하셨습니까?

남자가 딱히 할 말도 없다는 듯 말했다.

-네…… 
 그리고 이젠 혼자예요.

아마도 곧 이 자리를 떠나리라는 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인 것은. 
남자는 잠시 머릿속이 혼란한 듯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머리가 한참 모자라는 사람처럼 아아, 하고 웃었다.

-괜한 질문을 드렸군요.

남자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골목길에는 가을 바람만 휑하니 불어가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은행나무 몇 그루가 천천히 이파리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그 은행나무를 바라보았으나 나무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대체 은행나무와 눈맞추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글러먹은 생각이었다. 
곁을 주지 않는 쌀쌀한 사람에게 말을 붙이려고 했다가 무안만 당한 것처럼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고 그저 까페를 둘러보았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주인은 우리에게 칵테일을 날라놓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통유리 창만 큰 까페는 어항 속처럼 적막했다.


(8)
-그런데 왜 이혼하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이런 질문…… 
 그렇지만 전 아직 결혼 전이거든요……

나는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 이런 질문이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다.

-글쎄요. 
 내가 곁에 없으면 그 사람, 
 죽을 것만 같아서 결혼했는데…… 
 살다보니까 그 사람이 더 곁에 있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치면서 나는 아주 조금 웃었다. 
남자는 웃지 않았다. 
대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아주 굳은 표정을 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언젠가 어떤 여자가 제게 그런 말을 했었어요. 
 일년 전쯤 제가 페루로 떠나면서 헤어진 사람인데……

남자는 말을 마치며 피식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도 이렇게 지금 지구의 반대편, 
페루의 까페 한구석에서 어떤 여자와 이런 말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문득 가슴 한구석에 다시 통증이 느껴졌고 이어 페루에서 온 이 남자가, 
그가 거기서 어떤 여자와 다정하게 마주앉아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봤다고 우기기라도 한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나는 갑자기, 이 남자와 어서 친밀해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힘들었습니다.

그 남자는 칵테일의 둥근 잔을 손으로 빙빙 돌리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힘드셨겠군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친밀하게 남자의 말을 받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내가 정말로 힘들었던 건 그 여자는 혹시 조금도 힘들지 않은 건 아닐까, 
 그 여자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마음이 드는 때였어요……

말을 마치는 남자의 입술이 참았던 슬픔으로 인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글쎄요, 
 실연을 당한 친구가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비가 내리는 날이었지요…… 
 내가 위로를 건네자 그 친구는 내리는 비를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어요. 
 그래도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어, 
 내가 보는 이 비를 그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위로가 돼……

알겠냐는 듯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알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내게 찾아와 실연을 하소연하던 친구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상투적인 말로라도 나를 위로해주겠니? 하는 얼굴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페루로 떠났다면 그건 막막하잖아요, 
 막막한 거 말이에요…… 
 내리는 이 비를 그가 보는지 어떤지 그 여자는 모를 테니까요. 
 여기에 비가 내리는 날 페루의 한 도시에선 건조한 모래바람이 불지도 모르고, 
 여기에 눈이 내리는 어느 날 페루에선 사람들이 해수욕을 떠나고,
 여기는 화창한 날인데 페루에서는 폭풍우에 시달린 새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일본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뭐 프랑스, 독일도 아니고 신문에 나오는 세계 주요 도시의 일기예보에도 나오지 않는 페룬데…… 
 아시겠어요? 
 내가 먹는 우동을 그도 지금쯤 저기서 먹고 있겠지, 하는 생각도 못하고…… 
 내가 듣는 이 노래를 어디선가 그도 듣고 있겠지, 그런 생각도 못하고…… 
 우리가 자주 걷던 길을 걸으면서 한 번쯤 내 생각을 할까, 
 내가 그런 것처럼, 하는 생각도 못하고 힘들었겠지요. 
 언제나 보내는 사람이 힘겨운 거니까요. 
 가는 사람은 몸만 가져가고 보내는 사람은 
 그가 빠져나간 모든 사물에서 날마다 그의 머리칼 한 올을 찾아내는 기분으로 살 테니까요. 
 그가 앉아 있던 차 의자와 그가 옷을 걸던 빈옷걸이와…… 
 그가 스쳐간 모든 사물들이, 제발 그만해, 하고 외친다 해도 끈질기게 그 사람의 부재를 증언할 테니까요. 
 같은 풍경, 같은 장소 거기서 그만 빠져버리니 그 사람에 대한 기억만 텅 비어서 꽉 차버리겠죠. 
 그 여자가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별로 위로 받지 못한 얼굴이었다. 
문득 괜히 혼자 열을 냈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담배 피우는 여자를 보면 그 여자 생각이 났어요. 
 담배 피우는 여자는 이 세상에 그렇게도 많은데.

남자의 고개가 내 담배연기 속에서 숙여졌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바바리 자락을 만지작거리더니 그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런 거예요, 산다는 게…… 
 담배를 보고 생각하고 남산을 보고 생각하고, 
 하지만 그건 담배 탓도 남산 탓도 아닌 걸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나는 피식, 하고 웃었다. 
남자는 모를 것이다. 
그의 작은 아파트가 남산 아래에 있었고 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커튼을 열자 불쑥 다가오던 남산의 탑. 
밤이 되면 페르시아 왕자의 보석 모자처럼 어둠 속에서 황홀히 빛나던 그 탑. 
그가 나의 잠옷으로 정해준 그의 낡은 면 티셔츠, 
휴일이나 토요일 오후 나는 그의 커다란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 엎드려서 앙상한 다리를 함부로 덜렁거리며 
그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또 커피를 마셨다. 
그는 그 티셔츠를 페루로 가져갔을까. 
내게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많이 빨아서 씰크처럼 후들거리는, 
소매끝이 약간 바랜 그 면 티셔츠의 초록색은, 
아이를 재우고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마다 내 팔이 먼저 기억해냈다. …… 
그 빛바랜 티셔츠가 있던 그의 집은 아직도 남산 아래에 있지만,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이 거기서 라면도 끓여 먹고살고 있겠지만, 
그 사람들도 가끔 창을 열고 남산 탑을 바라보겠지만, 
그래도 퇴근길에 그를 만나기 위해 내가 찾아가던 그 비탈길과 택시에서 내린 우리가 서둘러 입맞추던 어두운 골목길과 
우리가 자주 가던 홍합탕을 끓이는 집은 아직 거기 있다. 
담배 피우는 여자를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남산도 서울 어디서나 보인다. 
심지어 고속도로를 달려 아직 서울로 진입하기 전에도 언덕을 넘으면 한강 너머 멀리 거기 남산 탑이 보인다.
서울 토박이지만, 
나는 남산 탑이 그렇게 서울 어디서나 잘 보이는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었다. 
기억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추억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어서 내 가슴의 탑은 날마다 불을 환히 밝혔다. 
나는 남산 탑에 버림받은 여자 같았다.


(9)
-페루로 가서도 그 여자의 회사에 가끔 전화 걸곤 했어요.

남자는 대체 페루하고 남산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제 생각에 취해 말을 이었다.

-내 전화를 받으면 냉랭해져버리기 때문에 그 여자가 퇴근하고 회사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시간에 전화를 걸었지요. 
 그 여자가 없는 그 여자의 공간에 전화 거는 기분 같은 거 이해할 수 있으세요?

쭈뼛쭈뼛거리던 남자가 말갛게 눈을 뜨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마주쳐 버린 눈 때문에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빈 사무실에 울리는 전화벨소리, 
빈 사무실인 줄 알면서 전화 거는 마음…… 
나는 빈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져내린 은행 잎파리 때문에 노란빛만 환했다.

-그 여자는 누군가 자기와 함께 슬퍼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걸 이제 믿지 않으려고 했어요. 
 어떤 때 그 여자는 결국 모든 것을 끝장내려고 사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나는 표를 두 장 준비하고 기다렸어요. 
 페루는 비자가 없어도 갈 수 있는 나라니까. 
 공항에 그 여잔 나오지 않았어요. 
 핸드폰은 '죄송합니다'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오늘 그 여자 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그만두었다고 하대요. 
 사실은 아까 그 주차장에 전화를 하러 들어간 거였어요. 
 그 여자 회사가 그 근처거든요. 
 내가 페루로 떠난 후에 여자는 이사를 했나봐요. 
 바뀐 전화번호도 알 길이 없고 해서……

그가 떠난 후 일년, 
그동안 회사로 그의 전화가 한 번 걸려오기도 했었다. 
목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려서 나는 그가 페루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접선을 시도하는 비운의 첩자처럼 
그는 '적어' 하는 말로 통화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거처를 알리는 암호 같은 긴 전화번호를 불렀다. 
스타일화를 그리고 있던 나는 그의 전화번호가 허공에서 헛되이, 
내가 그린 스커트의 날카로운 선을 따라 스러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라고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을까. 
나는 그때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다만 스타일화 속에서만 표준으로 존재하는 
십등신 몸매를 가진 여자의 스커트 자락 위에 그의 전화 번호 대신 완성이라는 낱말을 무수히 쓰고 또 갈겨쓰고 있었다.

-회사 동료가 귀띔을 해주더군요. 
 어떤 여자가 같은 목소리로 가끔 전화를 걸어서 내 이름을 찾는다고 말이지요. 
 그리고는 페루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려고 하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구. 
 나는 왠지 그게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 속이 불편하신가요? 
 아니면 제 이야기가 너무 부담스러우셨나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괜찮지는 않았다. 
나는 명치보다 조금 더 아래께에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마취제로서의 알콜의 성분을 생각하며 칵테일을 마셨다. 
낮에 마시는 술이기 때문인지 기분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모금 더 마셨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서 날개가 돋도록. 
마추픽추 신전의 모양을 모방해서 만들었을 
칵테일의 초록과 자주의 층이 작은 유리잔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내려 이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다지요?

몸이 가벼워지자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는 조급한 마음도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면도 자국이 남아 있는 턱을 한번 쓸었다.

-로맹 가리가 쓴 소설 말이군요. 
 어디서나 새들은 죽어요.  그리고 어린 새들이 또 태어나겠지요. 
 페루에 대해 궁금하신가요?

-아니요, 
 전 페루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알고 싶지 않으신 거로군요. 
 죽을까봐.

남자가 웃었다. 
나는 웃지 않고 그저 담배를 물었다. 
남자가 은빛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남자의 유리잔 속의 마추픽추도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허물어져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신 마추픽추는 위 속으로 들어가 다시금 진초록과 진자주로, 
선명하게 다시 쌓이고 있는 듯했다. 
까페엔 손님이 없었다. 
낮은 소리의 음악도 끝나버렸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아서 까페는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카쎈터 주인이 말한 시간이 얼추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때 저를 매혹시켰던 책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맞아요, 
 처음에 나는 그 진실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았는데 이제 그것을 간직하면 여기서 내가 죽을 것만 같더군요. 
 그 책은 진리를 말하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것은 변한다. 
 저는 그 구절만 빼놓고 그 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믿었지요.
 그 책이 나에게 주었던 진실이 진실인 것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어리석게도 생각했던 거예요. 
 세상에,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언제나 거기 있어주는 것이 한 가지쯤 있었으면 했지요. 
 그게 사랑이든, 
 사람이든, 
 진실이든 혹은 나 자신이든…… 나는 기대어 서 있고 싶었나봐요. 
 존재란 건 원래 머무르고 싶어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페루로 갔습니다.

-차가, 
 차가 다 고쳐졌을 것 같군요.

내가 남자의 말을 막았다. 
그가 잠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는 제 말이 부담스러우신가 보군요, 
 곧 가겠습니다. 
 저도 가야 하는 시간이니까요.
 머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한마디만 괜찮다면,

남자가 애타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이군,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면 지체없이 일어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댁을 보는 순간 하지만 왠지 이 말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사랑은 완성되어야 할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이지요. 
 혁명이 그렇고 삶이 그렇듯이. 
 하지만 우리는 끝을 보고 싶어했어요.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같아지는 거라고. 
 그 중간은 존재하고 그 과정도 존재하며 사실은 삶이란게 바로 그런 과정들일 뿐인데 말이지요. 
 삶조차 완성될 수는 없는 건데요. 
 나는 조급히 끝을 만지고 싶어하는 그 여자를 사랑한 만큼 증오했나봐요. 
 끝이 보이지 않았던 내 희망을 사랑하고 증오했듯이…… 
 아마 그래서 그 여자 없이도 페루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0)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를 존중한다는 듯 따라 일어나 돈을 지불했다. 
남자가 돈을 내는 것을 보고 있기도 뭐해서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남보랏빛 물체가 눈을 가로막았다. 
벽 위에 형체가 무너져가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도 없는 한 존재, 
지금 여기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등을 돌려 떠나가는 참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존재. 
존재는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왜냐하면 남보랏빛과 검은빛이 섞인 땅은 소용돌이에 휩싸인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였을까, 

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죽음, 이라는 단어를 느꼈다. 
하지만 그 그림 밑에 씌어진 제목은 이랬다.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순간 아랫배가 출렁, 하는 느낌이 들었다. 
켜켜이 줄을 지어선 마음의 서랍이, 
아까 그를 만난 순간부터 위쪽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열리기 시작하면서 
내가 살아오는 동안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 맨 아랫서랍이 삐그덕, 
삐그덕 열리고 거기 담겨 있던 나의 내장이, 
내 존재를 육체이게 해주는 나의 내장들이 소금에 절여진 듯이 꿈틀꿈틀 거리고 있었다. 
둔중한 쓰라림이 나의 등을 뻣뻣하게 스쳐지나갔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까페 앞 골목으로 나서자 남자가 말했다. 
나는 그가 밟고 선 노란 은행잎들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반짝였으나 이제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는 그의 낡은 구두와 한때는 서슬 푸르게 꼿꼿했을 그의 낡은 바짓단, 
단정한 감색 바바리가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위에 목을 얹은 그의 얼굴은 뜻밖에도 영원한 고요 속으로 침잠하려는 것처럼 아주 슬퍼보였다. 
그렇게 살지 말아요. 
그렇게 살면, 힘들어요. 
나는 마치 가까운 후배에게라도 하듯 말하고 싶었다.

그가 다가와 바바리를 입은 내 허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처럼 당황한 채로 한 발짝 물러나 얼른 가벼운 목례를 보내고 돌아섰다. 
그러자 손가락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마음의 맨 아랫서랍이 열리는 것을 느꼈을 때부터 아우성친 내 손가락들의 유혹을 한번쯤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차에 상처를 낸 그에게 관대했듯이 그렇게, 
손가락에게도 관대해보자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나 때문에 힘겨웠던 내 입술에게도 한번쯤 기회를 주고 싶었다. 
입술은 나의 허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작게 몸을 떨었다.

-그의 페루 전화번호를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저, 그분 실종되었어요. 
 일주일째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잠시 여행을 갖다 오겠다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는데, 아파트도 비어 있고 완벽하게 사라졌어요.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닌데 말이지요. 
 거긴 폭풍이 굉장했대요. 
 폭풍이 지나간 후, 산에서 바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들 빠져나왔는데 그분은 오시지 않았어요. 
 현지 경찰과 대사관이 조사를 시작했지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사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마치 그가 사라진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도 된다는 듯했다.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나는 문득 그가 사라진 골목 저쪽을 바라보았다. 
외줄기로 길게 뻗은 골목길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다급한 마음이 들어 그가 간 쪽의 골목길을 따라 뛰어가다가 큰길로 나왔다.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진 것이다. 
차들이 와왕거리며 지나가고 소풍을 마친 유치원 아이들이 삐약삐약 떠들어대며 차에 타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끝낸 신랑이, 긴 드레스가 버거운 신부를 데리고 싱글거리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한때는 희망으로 빛나던 이 길을 당신들도 언젠가 절망으로 걸어갈 날이 있을 것이다. 
희망으로 한번 빛나보지 않은 길은 결코 절망으로도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길의 탓은 아니지만, 경계하라! 그 변덕스러운 삶의 갈피를…… 
언젠가 음악이 멈추고 무도회가 끝난 것처럼, 귓속으로 먹먹한 정적이 스며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금 경계하라! 불행조차도 고여 있지 않다는 진실을…… 
나는 완벽한 침묵의 공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처음 만났던 것도 우리 회사의 지하주차장이었다. 
그때 그는, 아직은 멀쩡하던 내 차의 옆구리를 박으며 내 삶에 끼여들었다. 
내 차에 흠집을 냈던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냥 도망쳐버려도 되는데, 그는 차 곁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상등을 켜두셨길래 금방 오실 줄 알았어요. 
그때도 나는 생각했었다. 
나한테는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이 사람 오래 버티지 못하겠군. 
이년 전 가을의 일이었다. 
그때도 나는 이 바바리를 입고 있었다. 
그때 이후 얼마동안 지하 주차장의 어두운 등불들 별처럼 빛나고 내가 걸친 이 바바리의 섶들은 유월의 들풀처럼 꼿꼿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길거리에는 후줄근한 낡은 바바리를 입은 여자가 서서 고막을 터뜨릴 듯 내리누르는 침묵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아까 까페에서 나와 단정한 그의 감색 바바리 자락이 문득 나의 옷깃을 스쳤을 때, 
내 허리에 얹힌 그의 손에 대한 기억이 뒤늦게, 
그러나 정수리를 쪼개듯 선명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당황하며 한 발짝 물러선 것은 그의 친근한 표현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손길의 낯익음 때문이었다. 
몸은 그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드디어 가벼워져서 여기까지 날아온 것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아니야,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정말 입밖에 낸 것일까. 아니 이 모든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 나기나 한 것일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고막을 찢을 듯한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그러자 바로 그때 푸딩처럼 엉긴 무거운 침묵을 바수어뜨리며 
내 귓가에 무수한 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갯짓을 하고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히 열려버린 내 서랍 속에 오래 갇혀 있던 새들은 날아올라 대열을 정비하고 
오래 전부터 꿈꾸어왔던 일이라는 듯이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새들이 막막한 대양을 건너서,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잃어버린 도시를 지나,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에 머리를 부딪혀 죽는 환상을 이어서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무수히 죽어 나자빠진 새떼의 육체들을.


(11)
죽기 전에 새들은 날개가 처음 돋았던 시절을 기억했을까. 
처음 비상을 할 때, 하늘을 우러르는 빛으로 솟아오르던 그 푸른 눈동자들을. 
그리고 시간이 지나간 후, 날개가 꺾여 파르르 떨리던 그 순간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있는 한, 
죽음 역시 삶의 과정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 이라고 그의 말대로 나는 생각해도 되나. 
태어난 새들은 어디서나 죽고 그러고 나면 다시 어린 새들이 태어나겠지. 

흐린 이 가을날, 
먼 곳 들판 한켠에서 엎드린 곤충들이 바싹바싹 말라가며 죽어가고 있고, 
그 곁에 말갛게 씻은 참깨 같은 알들이 소복이 쌓여 있듯이, 
먼 곳 페루에서 한 남자가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 
그럴 수도 있으니까. 
표창을 받은 경력을 가지고도 해고당하고, 
서른 세 살에 갑자기 구세대가 되어버리고, 
천년을 맹세한 도시를 지어놓고 살던 일만 명의 사람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하지만 대체 어디로, 대체 어떻게, 차마, 사라질 수가 있을까마는……
나는 그와 처음 보았던 연극의 제목을 생각해냈다.

‘어떤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연극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사라지기 위해서 내게 그 연극을 보자고 했던 것일까. 
이렇게 사라져버리고는 겨우, 어떤 사람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는 그 말을 흣날의 내게 남기고 싶어서? 
이제는 내가 그리워하지 않을 테니 제발 있어달라고, 
지구 한 모퉁이, 
세계 주요 도시의 일기예보에도 나오지 않는 페루든, 어디든, 제발이지 그저 살아 있어달라고, 
이제 나는 다시는 기도도 하지 못한다는 말일까? 

나는 흐린 가을의 오후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아직도 핸드폰을 들고 있는 나의 손은 축축해져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백 속에 넣고 바바리 자락에 젖은 손을 문질렀다. 
새떼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은행나무의 기억 속에서 공룡이 걸어온다고 해도 나는 이제 다시는 페루로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서 날마다 페루를 향해 은밀한 비상을 꿈꾸던 새들은 모두 떠나버렸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다시 어린 새들이 태어나면 어떻게 하나, 
서랍 안에 갇혀서, 먼 곳만을 보도록 운명지어진 눈을 말갛게 뜬 채로.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의자를 베란다에 내다놓고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천천히 아이의 머리라도 땋아주며 나는 생각을 좀 해보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한 가지의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라고 내가 희망을 걸었던 책의 첫구절에 써 있었지요. 
나는 그 구절만 빼고 그 책에 씌어진 모든 것들을 다 믿었어요.
그 진실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요. 
세상에, 이 세상에 단 한 가지쯤은 변하지 않고 늘 거기 있어주는 게 한 가지쯤 있었으면 했어요. 

그게 사랑이든 사람이든 진실이든 혹은 내 자신이든…… 
나는 기대어 서 있고 싶었고 존재는 머무르고 싶어하니까요…… 
그러자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 한 언덕빼기, 
이제 영원히 그곳에 머물게 될 새들의 주검들 속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 한 마리가 움직임을 멈추었고, 
생을 맹세하고 막막한 대양 위를 날아가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낸 그의 푸른 눈빛이 멍해지면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이미 늦은 거야, 하는 생각 때문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미안해,  정말, 미, 안, 해. 
나는 적어도 시간만은 우리 앞에 오래 지속될 거라고 믿었어……
천천히,  떨리는 손을 내밀어,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노란 은행잎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무덤 속처럼 적막한 긴 길이었다.

- 끝 -
※ 이 글은 <존재는 눈물 흘린다>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입니다.


(단편소설집) 
공지영 - 존재는 눈물 흘린다 
창작과비평사 - 1999.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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