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魯迅) - (단편소설2집) 『방황(彷徨)』 중에서 '고독한 사람(孤独者)'
3 .
그러나 이렇게 한가하고 평안한 환경이었지만 리엔쑤에게는 안주할 만한 땅이 못 되었다.
차츰 그를 비방하는 익명의 기사가 신문에 나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도 그에 관한 유언비어가 계속해서 퍼졌다.
더군다나 그것은 옛날처럼 단순한 화제로서가 아니라 대체로 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들이었다.
나는 근래 그가 즐겨 글을 발표하는 것이 원인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S시의 사람들은 남의 입에 오를 쓸데없는 의견을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으면 꼭 암암리에 징벌을 가한다.
그것은 옛날부터 그랬기 때문에 리엔쑤로서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봄이 되자 돌연 그가 교장 자리에서 파면을 당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이러한 소문은 정말 뜻밖이었다.
사실 이런 일은 이전부터 흔히 일어났지만,
그저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뜻밖이란 생각을 하였을 따름이었다.
S시의 사람들이 이번에 한해서만 특별히 가혹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나 자신의 생활에 쫓기고 있었고,
게다가 그해 가을부터 산양에 가서 교편을 잡는 문제를 절충하고 있었던 참이었으므로 결국 그를 방문할 틈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약간 틈이 생겼을 때는 이미 그가 파면 당하고 3개월이 경과한 뒤였다.
그래도 리엔쑤를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헌 책방에 들렀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곳에 진열해 놓은 급고각 초인본의 '사기색은(史記索隱)' 틀림없이 리엔쑤의 책이었던 것이다.
'급고각'(명나라 말기 모진의 장서실 이름)
'사기색은(史記索隱)' (당의 사마정이 사마천의 "사기"에 주해를 붙인 책으로 모두 30권)'
그는 책을 매우 좋아하긴 했지만 장서가는 아니었다.
이런 책은 그에게 있어서 귀중한 양서의 부류에 속한다.
웬만큼 곤란하지 않다면 그렇게 쉽사리 내놓을 책이 아니다.
겨우 3개월의 실업으로 그처럼 곤궁해지는 것일까.
물론 돈이 들어오면 곧 써 버리는 성격이었으므로 지금까지 모아둔 돈이 전혀 없었다 치더라도.
나는 리엔쑤를 찾아가 보기로 생각하고 가는 길에 술 한 병과 땅콩 두 봉, 생선구이 두 마리를 샀다.
그런데 그의 방문은 닫혀 있었고, 두서너 번 불러 보았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가 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서 한층 더 소리를 높여 부르며 손으로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외출했을 거요."
그 눈이 세모꼴이고 뚱뚱한 따량의 할머니가 저쪽 창문에서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카락이 섞인 머리를 내밀고 큰 소리로 귀찮은 듯이 말했다.
"어디 갔습니까?" 나는 물었다.
"어디 갔느냐고? 알 게 뭐요.
어디 갈 데가 있을라구. 기다리고 있으면 곧 올 거예요."
그래서 나는 문을 열고 그의 객실로 들어갔다.
정말 '하루를 안 보면 여러 해가 지난 것 같도다.' 였다.
보이는 것은 모두 녹슬어 버려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가구들은 남아 있는 것이 몇 개 없었을 뿐 아니라, S시에서는 살 사람이 없는 양장본이 몇 권 남아 있을 뿐 서적까지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방 한가운데 있는 원탁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에는 언제나 비분강개하는 청년들이 둘러앉았고, 시절을 못 만난 천재들과 꾀죄죄하고 더러운 애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들이 정적에 싸여 있고 그 위에는 먼지만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그 탁자 위에 술병과 종이 꾸러미를 놓고 의자를 끌어당겨 탁자 모서리에 기대어 앉은 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라는 말은 틀림이 없었다.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나이가 초라한 꼴로 그림자처럼 들어왔다.
틀림없는 리엔쑤였다.
저녁이라 그런지 얼굴이 전보다 더욱 검어졌다.
다만 표정만은 옛날 그대로였다.
"아! 자네로구먼. 오래 기다렸나?" 그는 약간 기뻐하는 듯했다.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네.
어딜 갔었나?"
"어딜 가긴... 마음내키는 대로 좀 걸었지."
그도 의자를 끌어서 탁자 옆에 앉았다.
우리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실업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실업에 대해선 별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고, 지금까지 여러 번 당한 일이기 때문에 이상할 것도 없고 이야깃거리가 될 것도 아니란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그는 전처럼 계속 술을 마셨고 변함없이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토로했다.
나는 무심히 텅 빈 책장을 바라보다가 급고각 초인본의 "사기색은"이 생각나서, 하염없는 쓸쓸함과 슬픔에 잠겼다.
"자네 객실도 인제 이렇게 쓸쓸해져서...
요샌 손님도 별로 없나?"
"없어.
요새 내 심경이 좀 좋지 않아서 와 봐야 별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심경이 좋지 않을 때는 사실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거든.
겨울철에 공원을 찾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는 연거푸 두 잔을 비웠다.
그리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얼굴을 들더니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자네 일자리 구하는 것도 그리 신통하지가 않지?"
이미 취기가 상당히 돈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되물어서 창피를 주려 했을 때, 그는 뭔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느닷없이 땅콩을 한 줌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는 아이들이 떠들며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나가자마자 아이들의 소리는 그쳤다.
뿐만 아니라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따라가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 성싶었는데,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돌아와서 쥐고 있던 땅콩을 원래 있던 종이 위에 다시 놓았다.
"이제는 내가 주는 것조차 안 받아." 나직한 소리로 자조하듯 그가 말했다.
"리엔쑤." 가엾은 생각이 들어 나는 억지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자넨 자진해서 괴로움을 원하고 있는 것 같군.
자넨 세상을 너무 나쁘게 보는 것 같아." 그는 싸늘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봐, 할 얘기가 또 있네.
자네는 때로 자네를 찾아오는 우리들을
마치 우리가 한가해서 찾아와 자네를 심심풀이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천만에.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무슨 화제가 될 만한 것을 들으러 온다든가..."
"그게 바로 자네의 잘못일세.
사람이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야.
자네는 자기가 뽑아 낸 실로 고치를 만들고 자신을 그 속에 가두어 놓고 있는 거라구.
세상을 좀더 희망찬 곳으로 보아야 하네." 나는 한숨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건 그럴지도 몰라.
그러나 자네가 말하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물론 세상에는 자네가 말하는 것 같은 인간도 있기는 하지.
예를 들면 우리 할머니가 그런 사람이네.
나는 그 할머니의 피를 받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할머니의 운명은 이어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나는 벌써 그때 울어서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말았으니까..."
곧 나는 그의 할머니를 입관시킬 때의 광경을 지금 눈앞에 보는 듯이 생생하게 머리에 떠올렸다.
"그때 자네는 왜 그렇게 크게 울었나?
난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당돌하게 나는 그렇게 물었다.
"할머니의 입관 때 말이지? 그렇겠지.
자넨 모를 거야." 그는 등잔을 커면서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나와 사귀게 된 건 아마도 그때 내가 울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는 내 아버지의 계모였네.
아버지의 생모는 아버지가 세 살 때 돌아가셨지."
그는 생각에 잠기면서 묵묵히 술잔을 비우고 생선구이 한 마리를 먹어 치웠다.
"처음에는 나도 그 사실을 몰랐었네.
다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 무렵엔 아버지도 살아 계셨고 집안 형편도 좋았었네.
정월이면 언제나 조상들의 화상을 걸어 놓고서 성대한 제를 올렸지.
정장을 한 그 많은 화상을 바라다보는 것은 그 무렵의 나에게 있어서는 매우 보기 어려운 즐거움이었다네.
그런데 그럴 때면 언제나 나를 안고 있는 하녀가 한 장의 화상을 가리키면서 말했지.
'이분이 도련님의 진짜 할머님이니 배례를 해요.
아무쪼록 도와 주셔서 빨리 용처럼, 호랑이처럼 크게 되도록.' 그것이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갔단 말야.
나에게는 어엿한 할머니가 살아 계신데 어째서 '진짜 할머님'이 또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 '진짜 할머님'이 좋았어.
집에 있는 할머니처럼 나이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지.
젊고 아름다웠고 금실로 자수한 빨간 옷을 입고, 구슬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어 어머니의 화상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거든.
내가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그 화상의 눈도 조용히 나를 바라다보면서 입가가 점점 벌어지며 웃는 것 같더란 말야.
나는 할머니가 틀림없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러나 나는 집안에서 온종일 창가에 앉아서는 천천히, 정말 천천히 바느질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도 좋아했네.
내가 아무리 즐겁게 떠들고 놀며, '할머니, 할머니!'하고 불러 보아도 웃는 얼굴 한 번 보이신 적이 없었지.
언제나 차가운 느낌이 들어 다른 집의 할머니와는 아무래도 달랐단 말야.
그래도 나는 이 할머니를 좋아했네.
그러나 후에는 점차로 멀어지기 시작했지.
그 이유는 내가 나이를 먹은 후, 나의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네.
다만 기계처럼 일 년 내내 바느질만 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싫증났기 때문이었지.
그런데도 할머니는 여전히 바느질만 하면서 내 뒤를 보아 주고 보살펴 주셨어.
한 번도 웃는 낯을 보여 준 적은 없지만 야단을 치는 일도 없었지.
그러는 중에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우리 집 살림은 거의 바느질로 지탱하다시피 하였으니 할머니는 더욱 바느질에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러는 동안에 내가 학교에 가게 됐고..."
등잔불이 꺼졌다.
석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일어나 책장 아래에서 조그마한 깡통을 끄집어 내다가 석유를 붓기 시작했다.
"이 한 달 사이에 석유 값을 두 번씩이나 올렸으니..." 심지를 돋우고 나서 그는 천천히 느린 어조로 말했다.
"생활은 날마다 곤란해지기 시작했네.
그래도 할머니는 여전히 마찬가지였어.
내가 졸업하고 일을 하게 되고, 생활이 전보다 어느 정도 나아졌을 때도,
아니 아마도 당신이 병들어서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자리에 눕게 될 때까지 말일세.
할머니의 만년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리 고생하셨다고는 할 수 없네.
오래 사셨고, 내가 꼭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는 없었지.
게다가 울어준 사람도 많이 있었으니까 말야.
예전에 그처럼 할머니를 못살게 굴었던 사람들까지도 울었으니... 적어도 얼굴 표정만이라도 슬퍼했단 말일세.
하하하...
그런데 난 그때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일생이 눈앞에 축소되어 떠올랐네.
자기 손으로 고독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다시 입 속에 넣어 씹고 있던 일생이 말일세.
그런데 말이야,
그런 사람이 매우 많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네.
그 많은 인간이 나를 울부짖게 했단 말일세.
또 그때 내가 너무 감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도 큰 원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지금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바로 내가 옛날 할머니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똑같은 것일세.
그러나 그때의 내 생각이란 실은 올바른 것이 아니었지.
내 자신을 생각해 보면 내가 철이 나면서부터는 점차 할머니로부터 멀어져간 것이 확실하니까..."
그는 입을 다물고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등잔불이 가늘게 흔들렸다.
"아마 자네라도 별수 없을 걸세.
나도 어떡하든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겠는데..."
"다른 데 부탁해 볼 만한 곳은 없나?" 나는 정말 그 무렵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 문제마저도.
"그야 없는 것은 아니야.
다만 그들의 경우도 나와 별차이가 없다는 것뿐이지..."
내가 리엔쑤와 헤어져서 문을 나왔을 때는 둥근 달이 벌써 중천에 떠 있었다.
아주 고요한 밤이었다.
루쉰 - 고독한 사람(孤獨者)
역자 - 김시준
을유문화사 - 2008.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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