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문화 정보

존재는 눈물 흘린다 - 존재는 눈물 흘린다(4~6)

by 탄천사랑 2008. 6. 22.

공지영 - 「존재는 눈물 흘린다 (카테고리/004)

 

(4)
나는 일찍이 그런 것들을 깨달으며 자랐고 생은 내가 혹시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할까봐 여러 번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남편과 나의 결혼 생활도 결국 돈 계산으로 마감을 하고 말았으니까. 
전셋집을 얻을 수 있는 위자료라는 이름의 돈과 양육비를 놓고 우리는 치열하게 싸웠다. 
그 싸움은 우리가 아이를 놓고 과연 이혼을 해야느냐 마느냐보다 더 노골적이고 더 심각했다. 
나는 남편이 그토록 돈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 줄을 처음 알았다. 
이혼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어쩌면 남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우리 남편은 돈에 대해선 원래 무심한 사람이야. 
그러므로 여행 같은 것, 
산다는 것은 세월과 사랑과 희망들을 곱게 땋아내리는 거라는 마음뿐인 남자와 페루로 가는 일 같은 건 내게는 돈을 벌고 
또 벌고 또 벌어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을 은백의 나이에나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었다. 
감상으로, 
혹은 연민으로 일을 저지르기에는 나는 이미 많은 나이를 먹어버렸다.

대학 졸업 무렵의 깊은 실연의 상처 때문에 오 년을 해외 지사에서 자신의 젊은 시간들을 곱씹으며 보냈다고,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는 낡은 술집에서 오래오래 수줍고 서글프게 고백했을 때, 
나는 사실은 하품이 하고 싶었었다. 
그 여자하고 결혼했더라면 너는 아마도 그 상처를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와 헤어진 자유로움 때문에 오 년을 떠돌았겠지, 
춤이라도 추면서 뛰어다녔을지도 몰라. 
사랑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그건 그런 거야. 
영원은, 맹세하는 찰나에만 완성될 뿐이지. 

나는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바바리에 언뜻 술을 쏟을 뻔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그를 보내고 나서도 나는 기특하게도 한참 동안 담담했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슬픈 거야. 
그 부피만큼의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 비로소 이 현상을 다시 보는 거라구. 
너만 슬픈 게 아니라…… 
아무도 상대방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그것을 닦아내줄 수는 있어. 
우리 생에서 필요한 것은 다만 그 눈물을 서로 닦아줄 사람일뿐이니까. 
네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해.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나던 날 그는 내 차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니 눈물을 닦아주기에 나는 너무 해야 할 일이 많아, 
나는 말해버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겁이 났던 것일까, 
때로는 나도 내가 한번 가졌던 그 헛된 유혹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와 함께라면, 
아마 행복 같은 걸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약속한 까페 입구로 들어서다가 문득 신문을 꼼꼼히 보고 앉아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고는, 
그 열중해 있는 자세의 신중함이 보기 좋다, 는 생각에 가슴이 얼얼해질 때면 나는 잠깐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망을…… 
그런데 나는 다시 그 까페를 나와 먼길을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고는 뺨이 찬바람에 얼얼해질 때쯤 약속된 시간보다 아주 늦게 그의 앞에 나타나 말했었다. 
아주 바쁜 일이 있었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다니까.

나는 계단을 내려서는 동안 이미 어둠에 익어버린 눈으로 차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문득 아이를 보고 있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아주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동대문이나 광장 시장에 나가서 부자재로 쓰일 단추나 특이한 모양의 지퍼나 레이스를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화점에 나가서 우리 브랜드의 어떤 옷들이 어떤 계층에게 어떤 선호도로 팔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는 직장을 위해서도 아니고 아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머니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나를 위해 쓰고 싶다, 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나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 것이었다. 
잠들기 전에 할머니에게 애초부터 없던 레고 기차 바퀴 하나가 없어졌다고 떼를 쓸 것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달래는 할머니에게 결국은 엉덩이를 한대 얻어맞을 것이고, 
엄마가 올 때까지 절대로 자지 않겠다고 골목이 보이는 싸늘한 베란다에 나와 고집스럽게 서 있을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내리 덮이는 눈꺼풀을 비비며 내가 없는 빈 침대로 기어들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이도 점차로 알게 될 것이었다. 
누군가가 떠난 빈자리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언제나 제시간에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고 싶은 어미의 마음과 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아무리 허공에서 만난다 해도 
이 세상에는 기필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5)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해고 때문이었을까, 
예정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나는 당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 지하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핸드폰은 붉은 빛을 반짝이며 “노 써비스 에어리어”라는 글씨를 반짝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지하, 이 땅 깊숙한 곳에서는 누구와도 통신할 수 없다. 
지상의 전화선들과 끼리끼리 육체로 연결된 공중전화라면 몰라도 눈에 보이지 않아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이런 허황한 전파에 의지하는 통신 따위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기는 이 지구상 어디를 간다 해도 이제 내 삶은 “노 써비스 에어리어”였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제일 먼저 나를 스쳐간 생각은 만일 빠른 시간 내에 다른 곳에 취직자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남대문 시장에 점포라도 열어서 내 브랜드를 만들거나, 
그도 아니면 돈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버리지 않는다면 이 핸드폰을 제일 먼저 팔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차가 보였고 그 다음은 저 차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면 화장대 서랍 깊숙이 넣어둔 아이의 돌팔찌와 돌반지의 차례가 올 것이었다. 
방 두 칸인 집을 아마도 방 한 칸인 집으로 옮기게 될 것이고, 
그도 아니면 늙은 어머니의 눈처럼 침침한 반지하 깊숙이 처박히게 될 것이었다. 
그가 아는 것은 나의 핸드폰 번호뿐이므로 아마도 핸드폰을 먼저 팔든 반지하로 가는 것이 먼저이든 
그와 나와 이 지상에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통신 부호는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었다. 
그와 나를 연결해주려고 한때 애썼던 인생은 그로부터 언제까지나 노 써비스라는 붉은 빛을 찬란하게 띠게 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리고도 희망이 없을 때는 아마도 나, 를 팔게, 되, 겠, 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제껏 나는 나를 팔아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것, 
좀더 눈에 띄는 것, 
좀더 소비자들의 기호를 만족시켜주는 것, 
그런 옷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나는 세상에 태어나 알아낸 가지가지의 빛깔과 도형들을 생각해내야 했다.
처음에 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이제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나를 바쳤다. 
좋은 영화를 볼 때도 의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 블라우스 씸플해서 좋던데, 가 어느덧 내 영화평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서도 나는 가수들의 노래가 아니라 그들의 옷차림새를 듣고 있었다. 
유행을 앞서 가는 그들의 모양을 놓치지 말고 감지해내야 했다. 
나는 살아가기 위해 디자이너가 되었는데, 
이제 디자이너의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살고 있었다. 

새로운 것, 
좀더 새로운 것, 이라는 말은 이제 하도 들어서 나에게는 그처럼 낡은 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노력했고 몇 년 동안은 제일 먼저 매진되어 결코 할인매장으로 나가지 않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회사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다가와서 이봐, 뛰는 것을 멈추지, 
공은 이미 하늘로 날아가버렸어, 
요즘 공들은 날개가 돋기도 하거든, 했을 때 모든 것은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때 어떤 반짝이는 빛이 나의 차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어서 퍽, 하는 파열음이 들렸다.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처음에 나는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빛이 다가왔고 이어 퍽,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으니까. 
검은 중형차에서 어떤 남자가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남자의 차가 미끄러져 내 차와 충돌한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제 고물시장에 저 차를 내다놓아도 한 달 생활비도 제대로 쳐서 받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머리를 스쳤고, 
이어 좋은 일은 한 가지씩 오지만 나쁜 일은 언제나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격언이 생각났다. 
나는 천천히 차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차의 앞부분이 찌그러진 것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남자에게 얼굴을 돌렸을 때 내 얼굴은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남자가 마치 해고당한 공룡 때문에 처음으로 자신의 나뭇잎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은행나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조금 찌그러졌군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여인의 얼굴을 하고 남자가 상처 낸 내 차의 문을 열며 말했다.

-괜찮다니까요. 
 문도 열리잖아요.

-바닥, 이, 미끄러웠어요.

남자는 나의 반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금 더듬으며 말했다.

-미끄러워요…… 
 이 놈의 바닥이 미끄러워서 저도 지금 미끄러졌거든요.
 나는 하이힐을 신은 발로 바닥을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 
 알 수 없는 해방감이라고 할까,
 지금 이 시간, 왠지 나는 한없이 너그럽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그런다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괜찮다구요 괜찮아,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기도 했다.

-바쁘시다면 지금 처리를 할까요……
 다행히 요 앞에 제가 아는 카쎈터가 있습니다만……

남자는 어떻게 이 미안함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투로 말했다.

-바쁘지 않아요.

남자가 잠시 생각과 시간이 정지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일이 언젠가 벌어졌던 것 같은…… 생각을 더듬기도 전에 남자가 말했다.

-잘됐군요. 절 따라오세요.


(6)
나이는 서른이 좀 넘었을까, 
나는 남자의 차를 따라 지하주차장을 나왔다. 
남자가 오른쪽 깜빡이를 켜면 나도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남자가 브레이크를 밟으면 나도 브레이크를 밟고
그가 다시 왼쪽 깜빡이를 켜면 나도 왼쪽 깜빡이를 켜면서 나는 남자를 따라갔다. 
나의 차는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었고 찌그러진 문짝을 단 채였다. 
내가 운전을 시작한 이후 다닌 길이 가지가지였듯이 이제 내 차에 박힌 상처 자국도 가지가지였다. 
처음 매끈한 새 차의 범퍼를 누군가 긁어놓은 것을 집 앞 골목길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밤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났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하주차장에서 내 차의 문짝 하나를 누군가 심하게 박아놓고 쪽지 하나 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보았을 때는, 
카쎈터에 차를 가져가서 돈이 많이 들어도 좋으니 새 차처럼 만들어달라고 울 듯한 얼굴로 말했었다. 

그리고 연이어 다시 차가 찌그러졌다. 
이번에는 카쎈터에 가지 않았다. 
그저, 내 차를 박아놓고 사라진 인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교통사고나 팍, 나서 차가 찌그러져 버려라, 
혼자서 악담을 퍼붓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날이 지나고 상처는 깊어지고 많아져서 이제는 그것이 언제 어디서 긁힌 상처인 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이제는 화도 안 내고 악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날이 흐르는 동안 나도 아마 어딘가에서 남의 차를 슬며시 박아놓고 무심히 나와버렸는 지도 모른다. 
그 차의 주인은 밤잠도 못 이루고 분해하면서 나를 향해 화를 내고 악담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실, 
남자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 뒤따라오는 나를 따돌리거나 그도 아니면 노란 불에서 빨간 불로 바뀌는 아슬아슬한 사이, 
붉은 신호등 앞에 어쩔 수 없이 멈춰선 나를 두고 쌩 하니 혼자 도망쳐버린다고 해도 크게 억울할 일도 못되었다. 
광화문의 그 넓은 차도에서 차선 하나를 바꿀 때마다 행여라도 내가 따라가지 못할까봐, 
열심히 깜빡이를 켜대는 것을 조금은 느긋한 기분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남자를 따라갔다.


흐린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회색 빛으로 축축 내려앉고 있어서 노란 은행 빛들이 선명해 보였다. 
아까 나와 눈이 마주친 나무를 찾아보았다. 
그 나무 밑에만 은행잎이 유독 수북해서 금방 찾아낼 수가 있었다. 
다시 한번, 
이제는 호기심으로 그 은행나무와 눈맞춰보고 싶었지만 나무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이 생에서 단 한번 주어진 기회였을 뿐이야, 라고 쌀쌀하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공연히 무안한 기분이 들어서 그 은행나무가 떨어뜨린 노란 잔해들을 바퀴로 뭉그러뜨리며 달려갔다. 
가을은, 
그리고 봄은 움직이는 계절이라고 그가 말했었다. 
한번은 완전한 소멸을 향하여 그리고 또 한번은 충만한 푸르름을 위해서…… 
그래서 봄에는 처녀들이 가을이 되면 남자들이 흔들리는 거라고…… 
이제 가을이니, 
그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을까. 
엄숙한 불모의 계절이 곧 다가온다고 그는 페루에서도 생각할까. 

덕수궁 앞에는 신부들이 비슷비슷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비슷비슷한 턱시도를 입은 신랑들이 서 있었다. 
어디선가 왈츠가 흘러나온다면 무도회를 열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곁에는 소풍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초록과 노랑이 섞인 풍뎅이 같은 배낭을 멘 채로, 
어린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일렬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뒤에는 연한 갈색 돌담의 어깨 위로 아름답게 물든 고궁의 나무들이 갸웃 고개를 내밀고 있었지만, 
나는 또 보고 말았다. 
그 뒤로 드리워진 무거운 회색 빛 하늘……
남자의 차는 덕수궁 옆 골목으로 들어서 옛 법원 자리를 지나 작은 카쎈터 앞에 멈추어 섰다. 
나도 따라 멈추어 섰다.

-차가 수리되는 동안 차 한잔이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보통 이런 경우 사고를 낸 측은 돈을 지불하고 가는 것이 상례인 터라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글쎄요……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십시오, 
 저 때문에 지체하시게 되었는데…… 
 저 혼자 그냥 가버리기가 어쩐지 죄송해서요.

어차피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하고, 
제 갈 길은 제가 간다는 기분으로 살고 있던 나는 의아한 표정을 거두고 남자를 따라 걸었다. 
차가 고쳐지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다만 저런 식으로 산다면 저 남잔 곧 해고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그는 어쩌면 벌써 해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저런 식으로 저렇게 날마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면,
자신이 한 아주 작은 실수에 더없이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사실은 내 탓이 아니었다는 표정을 짓지 못한다면 말이다. 
이번 일만 하더라도 탓할 것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미끄러운 바닥과 하필이면 통로에 주차해놓은 내 차의 엉거주춤한 위치와 그리고 침침한 지하주차장의 등불들. 
광화문 쪽으로 조금 걸어가자 골목이 나왔고 거기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라는 긴 이름을 가진 까페가 보였다. 

자리에 앉은 그는 눈이 나쁜 모양인지 조금 눈살을 찌푸린 채로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나서는 마추픽추라는 이름을 댔다. 
아마도 칵테일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추픽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깐 가슴 아래께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그저 같은 걸로, 라고 내가 말했다. 
둘만이 마주앉게 되자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마주대고 비볐다. 
내가 담배를 꺼내 물자 그는 이제서야 어색함을 좀 벗어나겠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얼른 라이터를 꺼냈다. 
펑 하는 고운 소리가 들렸다.

-뒤퐁인가요.

라이터를 보며 내가 물었다. 
남자가 어깨를 조금 으쓱해 보이더니,

-아시는군요……
 이 소리 좋지요? 
 담배를 못하는데……이 소리가 좋아서 가지고 다닙니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서른 세 번째 생일날 나는 그 라이터를 선물한 적이 있다. 
눈이 쏟아져서 서울 시내의 교통이 거의 마비된 날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강변으로 나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우리는 겨우 차를 몰고 그의 아파트로 갔었다. 
그의 머리에도 내 머리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긴 입맞춤을 끝냈을 무렵 
나는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머리칼 위의 흰눈이 작은 이슬방울로 변해버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내 머리칼의 흰눈도 그러하리라. 
그 머리 위에 다시 흰눈이 내려앉도록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희망이, 
오래된 상처의 기억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갔었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을까. 
신데렐라와 콩쥐팥쥐와 춘향전과 그리고……



(단편소설집)
공지영 - 존재는 눈물 흘린다
창작과비평사 - 1999. 07. 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