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경제신문 - 2023.08.10」
은퇴자를 위한 묵언 ABCD
B(Breaking the path): 경로 이탈을 두려워 말라
평균 기대수명이 50세가 안 됐던 산업사회 초기에 만들어진 정년제도는 100세 시대인 지금, 축구경기로 치면 이제 막 전반전이 끝났다는 신호라 볼 수 있다. 주심의 휘슬 소리가 나면 원하던 원치 않던 경기를 중단하고 라커룸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른바 '하프타임(Half-time)'이다.
인생이라는 경기에도 하프타임이 주어진다. 정년 또는 다른 이유로 맞게 되는 은퇴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하프타임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프타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엄청난 축복이다. 전반전의 부진을 만회하고 후반전에 반전과 역전을 일으킬 회심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학문적 용어로는 ‘결정적 국면’, 즉 짧지만 혁명적 변화가 잉태되는 시간이다. 그러기에 라커룸은 블랙박스다. 그곳에서는 어떤 놀랄 일이 준비될지 알 수 없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변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많은 은퇴자들이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하프타임을 자신에 대한 회한과 사회에 대한 분노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허둥거린다. 아직 일할 역량과 의욕이 넘치는 자신을 밀어내는 조직과 빈들에 홀로 선 것 같은 자신을 선뜻 받아주려 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원망에 휩싸인다.
이런 하프타임에 라커룸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 하프타임, 라커룸에서 생각해야 할 한 가지
이 칼럼 시리즈의 대 주제는 「은퇴자를 위한 묵언 ABCD」이다. 지난번에 발표한 첫 번째 묵언 'A'는‘ 수용(Acceptance)’이었다. 긍정적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은퇴에 따른 사회적, 재정적, 관계적 소외와 이에 따른 심리적 외로움의 그늘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한없이 외로움 속에 갇혀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소외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온 것이라는 자책이나, 조직과 사회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기회의 문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나아가 허겁지겁 살아오면서 잊고 지낸 ‘진정한 자아(true self)’를 찾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하프타임에 어두컴컴한 라커룸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것은 결국 참 자아와 새 문의 존재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확연히 보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열어나갈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믿음이 응축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후반전에는 자신의 포지션에서 자신의 경기를 원 없이 뛰고 싶기 때문이다. 관성의 궤도를 벗어나 경로이탈을 꿈꾸기 때문이다.
◇ 인생2막, 자신의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헨리 나우엔’이라는 세계적 영성목회자는 예일대와 하바드대에서 교수로 지냈지만 거기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지 못했다.
안식년 때마다 남미의 페루 등 빈민가에서 생활하다가 프랑스의 정신지체장애자 보호소인 ‘라르쉬’에서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영감을 받았다.
결국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 근처에 있는 정신지체장애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서 영성목회자로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다. 안정되고 명예로운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버리고 그가 추구했던 것은 결국 자신의 ‘소명’이었다.
가난한 자와 함께하며, 자신의 영성 체험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열정이 그의 가슴속에 움트고 있었다.
한편 ‘낮선 곳에서의 아침’의 저자 고 구본형 작가는 한국IBM에서 촉망받는 중견간부였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삶을 낮 설게 살기로 작정하고 사십대 중반에 사표를 내고 자유인이 됐다. 프리랜서 글쓰기 작가가 돼 매년 인간혁명 경영서들을 줄기차게 발간했다.
그의 글에는 혁명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삶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아픔을 감수하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참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경로 의존의 관성에서 벗어나 경로 이탈을 과감히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은퇴자를 위한 두 번째 묵언의 화두 'B'는 경로 이탈을 두려워 말라(Breaking the Path)는 것이다.
◇ 열차의 목적지가 다르다면 미련 없이 '환승'해야
열차 여행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간 우리가 탄 열차가 자신의 목적지까지 잘 데려다 줄 것으로 생각하고 안심하고 살아왔다. 빨리 달리는 열차의 속도에 빠져 자신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는 열차를 탄 것인지 확인도 하지 못했다.
다행이 임시 정거장에서 열차가 잠시 쉬게 됐다. 이 때 자신이 탄 열차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열차임을 알게 됐다. 임시 정거장에 내려서야 비로소 표지판을 본 까닭이다.
인생의 열차여행 중에도 이런 임시정거장이 있다. ‘은퇴’가 그것이다. 거기서는 잠시 내려 표지판도 보고 숨도 고를 수 있다. 이른바 전반전 경기를 끝낸 선수들이 들어가는 라커룸과 같은 곳이다.
자신이 탄 열차가 자신의 목적지로 가는 열차가 아니라면 빨리 환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속도가 빠르고 편한 고급 열차가 아쉬워서,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아까워서 목적지가 다른 열차를 계속 타고 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종착역에서는 크게 후회한 들 돌이킬 수 없다. 환승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경로 이탈은 자신을 찾고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표시이다.
◇ 아쉬울지언정 '후회'를 남기지 않아야
축구 선수가 열어야 할 새로운 문은 후반전 경기가 될 것이다. 하프타임에 눈시울을 붉힌 선수의 후반전 경기는 모든 면에서 전반전과 다를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경기를 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사인과 교감하며 자신의 포지션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며 원 없이 뛸 것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아쉬울지언정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 이기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프타임에 뜨겁게 눈시울을 붉힌 이유다.
자신이 어떤 선수인지, 어떤 포지션에서 뛰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결단하라! 이제 곧 후반전을 알리는 휘슬이 울릴 것이다. 라커룸의 문을 열고 힘차게 그라운드에 나서야 할 때다.
글 - 이지현 기자
출처 - 금융경제신문 http://www.fetimes.co.kr
[t-23.08.25. 230823-145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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