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御寧 - 말」
세배를 드리는 이 아침에
세배를 드릴래요.
무름을 끓고 세배를 드릴래요.
옛날 어릴 적 그 마음으로 세배를 드릴래요.
그러나 동전을 던져 주시지는 마십시오.
그보다는 못난 이 자식들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어떻게 한 해를 살까?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땅굴을 파며 두더지처럼 비굴하게 살지 않으려면,
그래서 광명한 햇빛이 비껴 흐르는 그 별판에서 기를 펴고 살려면 어떤 용기가 필요한가를,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많은 세월을 살아온 당신들의 슬기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추악한 주름살만이 늘어가는 그런 세월이 아니라 말갛게 말갛게 씻겨
이제는 파란 이끼가 끼는 바위처럼 의젓하게 나이를 먹는 슬기를 귀띔해 주세요.
떡국 같은 것을 끓이지는 마세요.
수정과도 차리지 마세요.
아실 겁니다.
그런 음식으로는 이 허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전설 속에서만 따는 불로초도 원치 않아요.
인삼 녹용도 다 숨겨 두세요.
그 대신 텅 빈 마음을 채우는 몇 마디 말을 가르쳐 주세요.
세배를 드리는 날이면 늘 추웠었지요.
벽장 위에 그린 산수화 속에서도 눈이 내리고 복 많이 받으라던 덕담에 하얀 입김이 서렸었지요.
불을 주십시오.
뜨거운 불을 주십시오.
다시 피를 끓게 하고 이 염통 속에서도 아궁이에 지핀 장작개비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일도록 불을 주십시오.
세배를 드릴래요.
복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스무 해 동안 서른 해 동안, 되풀이해서 복 많이 받으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대체 그 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면 저금통장이나 첩첩이 잠근 철제 캐비닛 속에 있는 것입니까.
허탕친 복권 조각이 길거리에 찢기어 널려 있다가,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는 것처럼, 우리들의 복이란 늘 그런 것이었지요.
세배를 드릴래요.
아버지 어머니, 복건을 쓰던 어릴 적 그 모습대로 세배를 드릴래요.
동전이 아니라,
던져 주세요,
복이란 말은 아예 마시고 어떻게 또 한 해를 살아야 할지 그 용기와 슬기와 열정을 일러 주세요.
핫옷을 입어도 춥고, 먹고 또 먹어도 허기진 이 자식들에게 눈짓해 주세요.
瑞雪 같은 새해의 축복을,
瑞雪 (서설) - 상서로운 눈
※ 이 글은 < 말 >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李御寧 - 말
文學世界社 - 1982. 11. 15.
[t-08.01.05. 20240129-1705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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