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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에 오세요 (서장).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세화

by 탄천의 책사랑 2007. 12. 18.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홍세화/창작과 비평사 1995. 03. 01.

빠리에 오세요.
아! 꿈과 낭만의 도시, 빠리에 오세요.
내가 갈 수 없으니 당신이 오세요.
나를 찾지 않아도 돼요. 아니, 찾지 마세요.

그러니까 당신이 빠리에 오세요.
왔다가 그냥 가시더라도 빠리에 오세요.
대한항공을 타고 오시겠지요.
아니면 에어프랑스지요.
샤를르 드골 공항 터미널로 나오시겠지요.

짐을 찾고 나오실 땐 세관원들의 쳐다보지 마세요.
그들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의 짐만 검사하니까요.
그리고 라면박스 같은 데엔 짐을 넣어 오지 마세요.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검사할 수 있어요.

가짜 루이뷔통 가방은 뺏길 위험이 있다지요.

당신은 환전을 하셔야 되겠지요.
그러나 하지 마세요.
공항 은행은 아주 엉터리니까요.
프랑스 돈 프랑이 하나도 없으시면 아주 조금만 바꾸시고요.

아, 참! 공항 로비에서 두리번거리지 마세요.
두리번거리시더라도 작고 중요한 가방은 꼭 움켜쥐고 계세요.
이탈리아보단 많지 않지만 소매치기 들치기가 있어.

짐이 많으시면 택시를 타세요.
그리고 10~15프로의 팁을 잊지 마세요.

짐이 많지 않으시면 고속지역전철 (R.E.R.)을 타고 빠리로 들어오세요.
공항에서 전철역까진 공짜 버스를 이용하세요.

아니면 빠리까지 버스를 타세요. 물론 이건 공짜가 아니지요.
에어프랑스 버스를 타시면 개선문까지 직행이에요.
다른 버스도 있는데오페라 앞 평화카페 (Cafe de la Paix)가 있는 곳까지 오실 수 있지요.
평화카페에서 알랭 들롱을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찻값이 비싸요.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 넷, 별 넷에 L로 표시된 호텔에 들어가시겠지요.
차례대로 여인숙, 여관, 장, 호텔, 호화호텔이에요. 이제 짐을 푸시겠지요.

나를 찾지 마세요.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수첩을 뒤지지 마세요.
당신은 빠리를 찾아온 것이에요. 나는 우연히 그곳에 있는 것뿐이고요,
이제는 이른바 출세를 하여
'드봉 아티스트 스칼렛 오렌지 260'의 광고가 있는 어느 여성잡지의 명사가 된 나의 옛 친구처럼.
나를 찾지 마세요.
빠리에 있는 다른 사람도 찾지 마세요.
당신은 빠리가 처음이지만 그 사람에게 당신은 아흔아홉 번째니까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불러내지 않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지요. 아시겠지요?

대신 한국에 두고 온 가족에게나 전화하세요.
프랑스에서 외국을 부르는 번호는 00번이 아니라 19번이에요.
그런데 호텔방에선 되도록 전화하지 마세요. 공중전화보다 아주 많이 비싸니까요.

아! 꿈과 낭만의 도시. 빠리에 오신 당신은 그러나 큰 숙제가 있지요.
빠리에 왔는데 남들이 다 본 것을 당신이 안 봐서는 안된다는 그런 숙제 말이에요.
남보다 더 보면 더 보아야지 덜 보면 큰일나니까요. 그렇지요?

개선문을, 꽁꼬르드 광장을, 에펠 탑을, 노트르담 대성당을, 그리고 몽마르트르 언덕을 찾으셔야지요.
 
찾아가보시되 제발, 뒤통수로 보시기보단 앞통수로 조금 더 오래 보세요.
무슨 소리냐고요? 증명사진 얘기지요.
그 숙제를 단 한 시간 동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드릴까요?

오신 날 TABAC라고 쓰여있는 담배 가게에서 전화카드를 사세요.
(34번 게이트로 나오시면 바로 왼편에 있지요. 아니면 빠리 시내에도 많고요)
그때 빠리의 사진엽서도 사세요. 마음에 드는 것을 다 고르세요.
이튿날 동이 튼 직후 택시를 잡고 운전사에게 사진엽서를 보여주시고 그리로 가자고 하시면 되지요.

그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사진에 나와 있는 배경이 목표가 아니라
그 배경을 찍은 장소가 목표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그 장소들은 말이에요, 빠리의 화가들과 사진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찾은 곳들이라고요.
바로 그 자리에서 배경을 뒤통수로 보시고 찰칵하면 되지요. 아시겠지요?
빠리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왜 하필 동튼 직후냐고요? 그 답은 이 글을 끝까지 다 읽으시면 알 수 있지요.

이제 당신은 숙제의 반을 마친 셈이지요.
그 누군가가 말했듯이,
'여행의 목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환상을 없애는 것'이라면 그 환상도 어느 정도 지워졌고요.
---

다리가 아프시더라도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한 바퀴 둘러보세요.
아널드 토인비라는 영국의 역사학자가 말했다는 문명 서진설을 말이에요.
세계 문명의 중심이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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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꿈과 낭만의 도시.
빠리에 대한 환상도 지워지기 시작했고 숙제도 끝났을 무렵,
시간이 남으신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말은 레닌이 했던 말이지요. 레닌이 누구냐고요?

빠리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다고요?
그렇군요. 이상했던 이상 (李箱)의 까마귀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에펠 탑에 오르지 마시고 차라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탑에 오르세요.
승강기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빠리의 정 한가운데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시는 것이지요.
정 한가운데의 가장 높은 곳. 아시겠지요? 
꼭 오르세요. 저 아래 중생들이 아주 작게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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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매치기를 조심하세요. 한국의 어느 똘똘한 신문기자도 빠리에 도착한 당일로 
노트르담에 갔다가 여권이랑 돈을 다 잃어버렸으니까요.
명심하세요.
---

이제 제 얘기를 조금 들어보시겠어요? 긴장하지 마세요.
그냥 심심풀이 땅콩 같은 얘기니까요.

빠리의 한 노 신사가 매일 점심때가 되면 
지금 당신이 있는 에펠탑 1층의 식당까지 올라와서 식사를 하더래요.
한 일주일 동안은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매일 찾아오는 그 노신사에게 드디어 식당 주인이 말을 걸었지요.

"손님은 우리 식당의 음식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노신사는 아주 차갑게 '아니요' 했어요. 그러니까 다시 식당 주인이,

"그러면 손님께선 에펠 탑을 참으로 좋아하시는군요?"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노신사는 더 차가운 목소리로 

"나는 에펠 탑을 아주 싫어하오" 하지 않겠어요.
식당 주인은 다시 '그런데 왜?'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지요.
노신사는 이렇게 대꾸했대요.

"에펠 탑이 보이지 않는 식당이 여기뿐이라서 그렇소, "

별로 재미없다고요.
그래도 이 얘기에 나오는 노신사에게서 프랑스인들의 특징을 보았지요.
모든 사람이 다 좋다 해도 '나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개성말이에요. 
아마 드골(de Gaulle)이었을 거예요,
치즈의 종류만 300가지를 먹는 프랑스인만큼 통치하기 힘든 국민도 없을 거라고 술회했던 사람이.
그렇게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도 그래도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지요.
나는 그것이 똘레랑스 (tolérance)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똘레랑스가 뭐냐고요?
글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려운데,
'나와 다른 남을 허용하고 관용하는 것'이라는 뜻 정도로 알고 여기선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요.


자, 이제 빠리에 오셨던 당신은,
아듀, 빠리! 드디어 돌아가실 때가 되었군요.
부디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세요.
 
그래도 미련이 남으셨어요? 뭐라고요?
아! 나를 만나고 싶으시다고요? 정말이세요?
진정이죠? 후회 안 하시겠지요?
좋아요. 그럼 만나지요. 어디서 만날까요?
날씨가 괜찮으면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에서 만나는 것도 괜찮지요.
아니면 오페라 하우스 앞 층계에서 만나는 것도 좋고요.
오페라 하우스 정면에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로시니 등 일곱 음악가의 흉상이 있는데
베토벤 흉상 밑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아, 그 옆 평화카페에서 만나자고요?
좋아요. 찻값이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단, 찻값은 내 차지예요.
아,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고 싶었지요. 날 이해하시겠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 얘긴 바로 내 얘기예요.
시장법칙 같은 그런 골치 아픈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요. 들으시겠어요?
정말이죠?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당신에게 달려갈게요.



※ 이 글은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12.18.  20241217_16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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