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인 듯 눈물인 듯 - 김춘수 자선시화집 / 예담 2006. 08. 12.
시안(詩眼)
시에는 눈이 있다.
언제나 이쪽은 보지 않고 저쪽
보이지 않는 그쪽만 본다.
가고 있는 사람의 발자국은 보지 않고
돌에 박힌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만 본다.
바람에 슬리며 바람을 달래며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루오 할아버지가 그린 예수의 얼굴처럼
윤곽만 있고 이목구비가 없다.
그걸 바라보는 조금 갈색진 눈,
슬프디 슬픈 시의 눈,
비고.
인용 시에서 시적 화자는 시에도 눈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의 내용을 읽어보면 '시의 눈'은 일상적인 사람의 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눈은 언제나 '저쪽'만 보는 눈이고,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만 보고,
이목구비는 없고 윤곽만 있는 루오 할아버지가 그린 예수의 얼굴을 보듯, 사물의 '윤곽'만 보는 특이한 눈이다.
좀 더 이 시를 풀이하자면,
시의 눈은 사물의 '이쪽'보다는 '저쪽' 즉 사물의 이면을 보고,
그 이면에 찍혀있는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을 본다.
그리고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이목구비가 없는 윤곽만 있는 얼굴이란 일상적인 얼굴을 넘어선,
시적으로 변용된 얼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시의 눈앞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그 꽃은 "바람에 슬리며 바람을 달래며" 피는 꽃이다.
여기서 바람에 슬린다는 것은 피동적 주체로서의 의미를 나타내며
바람을 달랜다는 것은 반대로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시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이전에 꽃으로 피어나는 자신의 존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시 자체로서의 존재시학을 펼쳐 보여준 바 있는 김춘수 시인다운 발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김춘수「詩眼」전문 (『시안』2003년 겨울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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