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젤딘 - 인생의 발견」
28장
살아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두려움을 탐색하는 것은 삶의 사명이고, 두려움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대 로마시대의 한 비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방인이여, 내가 하려는 말은 짧다. 가만히 서서 읽어보시라.
여기 사랑스러운 여인의 초라한 무덤이 있다. 여인의 부모는 이 여인을 클라우디아라고 불렀다.
여인은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사랑했다. 아들을 둘 낳았고, 하나는 세상에 남겨두었다.
다른 하나는 땅속에 묻었다. 여인은 온화한 자태로 재미있게 말했다.
집안일을 하고 양모를 지었다. 내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 갈 길을 가시오.”
2000년이 지난 요즘의 묘비에도
거의 비슷한 문구가 적혀 있지만 대체로 한평생을 살았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내용은 줄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로마의 비문에는 삶의 목적은 삶이고 삶의 존속과 계승이라는 고대의 상식이 담겨 있다.
자연은 삶이 중단되지 않도록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여자는 200만 개의 난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남자는 한 번 사정할 때마다 정자를 4000만 개씩 만든다.
적어도 남자들이 공해로 불구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보잘것없는 말벌은 난자 하나에서 800~3500마리의 새끼를 생산할 수 있다.
칭기즈칸이 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할 뿐 아니라
'적의 아내와 딸들을 품어서'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현재 그에게 나온 후손이 1600만 명이라는 추산이 있다.
자연의 이단아들
하지만 인간은 또한 자연의 이단아다.
인간은 흔히 평생의 고작 4분의 1만 자식을 키우는 데 전념하고
육아의 많은 부분을 가족 이외의 전문가들에게 맡긴다.
인간은 자식들에게 단순히 부모를 닮지 말라고 가르치고,
새로운 세대는 매번 조금씩 다른 인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가족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자식은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존재이며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은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할 일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는다.
역사적으로 출산율이 갑자기 지속적으로 감소한 시기가 여러 번 나타났다.
메소포타미아의 인구는 전성기에 세 배 증가했지만 이어서 독창성과 낙관성이 소멸하자
전성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집트의 인구는 기원전 3000년에 100만 명 미만이었지만 예수의 시대에는 500만 명으로 증가했다가
기원 후 1000년에는 다시 150만 명으로 감소했다.
멕시코의 인구는 스페인의 침략을 받고 질병뿐 아니라 절망으로 인해 과거 인구의 10분의 1로 감소했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은 자연스러운 본능에 대한 억압으로 간주되었지만
사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여러 나라에서도 자발적으로 중국보다 자녀를 훨씬 적게 출산했다.
독일에서는 여성의 30퍼센트가 자녀를 낳지 않고
대학 교육을 받은 여성의 경우에는 자녀를 낳지 않는 비율이 훨씬 더 높다.
수녀와 수도사가 된 인구도 어마어마하다.
자식을 낳지 않고 정신적인 자식만 낳기로 선택한 사람들의 명단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로크, 버클리, 흄, 칸트, 케인스, 헨델, 베토벤, 차이콥스키, 루이 암스트롱, 마리아 칼라스, 조르주 브라상,
제인 오스틴, 윌리엄 블레이크, 러스킨, 올리버 웬델 홈스, 마그리트, 수전 B. 앤서니,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시몬 드 보부아르, 코코 샤넬, 캐서린 햅번, 그레타 가르보, 그리고 물론 예수도 있다.
이들은 가족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불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으므로' 가족이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던 철학자 맹자의 경고에 대응할 다른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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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오고 별안간 사막에 꽃이 피어 먹을 게 풍성해지면 메뚜기가 급격히 불어난다.
개체수가 증가하면 서로 몸이 맞닿게 되고 다리도 닿을 때가 많아지는데
그러면 더 흥분해서 마치 패션과 화장으로 치장한 것처럼
몸 색깔이 평소의 담갈색에서 노란색과 주황색과 검정색으로 변한다.
어릴 때는 무리에 끼어들고 성충이 되면 떼를 지어 다니며 수천 킬로미터 이내의 식물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아 굶어 죽는다.
인간도 인구가 불어나서 지상의 숲을 초토화시키고 바다의 생물도 멸종시켜왔지만
번영의 시기가 끝나면 메뚜기 떼처럼 소멸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인간의 고유성은 그들이 (혹은 대다수가) 삶은 죽음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모차르트가 삶의 목적은 죽음이라고 말했을 때
지상의 삶은 다른 어딘가의 영원한 사후세계로 가는 짧은 여행이라는 뜻이다.
그 여행이 천국으로 이어진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다른 육신으로 환생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날마다 태양을 따라 여행하는 우주여행자가 된다고 믿었다.
부처는 삶의 목적은 삶과 불가피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몇 번의 죽음을 거쳐야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대교 예언자들은 삶의 보상은 “아버지 쪽으로 모이는 것”이라고 말했고,
많은 문명에서 조상들에게 살아 있는 후손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겼다.
죽음은 지고의 예술로서 삶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다.
스페인의 극작가 칼데론Caldéron은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태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출산과 사후세계를 중시하는 태도는 결혼이 서른 살로 늦춰지고
100세까지 살 가능성이 높아진 시대보다는 삶이 한낱 촛불 같던 시대에 더 강렬한 의미를 띠었다.
하지만 인류의 가장 파괴적인 저항은 ‘삶의 의미’가 자연이나 신에 의해 영원히 정해져 있고
평범한 인간의 소망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신념을 뒤엎으려는 시도였다.
인간은 각자 삶이라는 선물을 자신의 이상과 욕구에 맞게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새로운 확신이다.
따라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라고 바꾸어 물어야 한다.
‘삶’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싶은가?
따라서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진다.
자기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욕구가 순종을 권좌에서 몰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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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갑자기 진보의 개념이 힘을 얻는다.
진보는 지독히 외로웠을 개인의 투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부모처럼 일하고 결혼하고 먹고 옷을 입으면서 부모처럼 살 거라고 기대했다.
지금은 혼자 힘으로 더 나아져야 한다.
삶은 이제 태초부터 유유히 흐르던 강물을 타고 흐르는 여행이 아니다.
대신 삶은 길고 가파른 사다리의 미로이고
우리의 미래는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떨어지지 않는 능력에 달려 있다.
자기를 조상과 후손으로 이어진 기다란 사슬을 이루는 한낱 연결고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꿈꾸던 것 이상의 자격을 갖추고 성취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선택할까?
앞으로 한 달, 1년, 10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왜 모두 베토벤이 되면 안 되는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한 교수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135가지 목표가 있다.
이렇게 많은 목표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인간의 욕망을 단순한 피라미드 형태로 표현한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 1908~1970의 분류법을 따르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맨 아래 칸에 음식, 성생활, 수면 같은 생리적 욕구가 있다.
다음에는 안전의 욕구가 있고, 한 단계 더 올라가면 사랑의 욕구가 있고,
그다음에는 존중의 욕구, 마지막 단계에서는 ‘자아 실현’의 욕구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면에 감춰진 모든 자질을 발현하는 데 있지만
예비 단계의 욕구를 충족하느라 모든 자질이 드러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매슬로는
“인간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고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인간이 꿈꾸는 천국에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매슬로는 유명한 영웅들의 전기를 연구해서 그들이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 과정을 알아냈다.
그는 “왜 모두 베토벤이 되면 안 되는가?”라고 물었다.
누구나 사실상 베토벤이 되거나 그에 비견할 만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고,
그 덕에 매슬로의 이론은 크게 성공했다.
신경증적 기억에 대한 프로이트의 심각한 경고보다는 긍정적인 말이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게다가 매슬로는 단지 상아탑 안의 교수만은
그는 교육을 거의 못 받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일곱 자녀는 잘 살게 해주어야 한다고 다짐했던 유대계 러시아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가족이 소유한 캘리포니아의 와인통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매슬로의 업적은 자유를 어떻게 쓸지 모르던 세대에게 더 나은 삶을 향한 막연한 열망을
다섯 가지 욕구로 압축해서 정리해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분석은 오늘날 일과 비즈니스의 교육과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매슬로는 저자의 메시지가 (흔히 그렇듯이) 제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그는 개인적으로 현실에서 자아 실현을 한 사람을 거의 찾기 어렵다고 유감스러워했다.
아마 인구의 2퍼센트만 자아 실현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타깝게도 “불완전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서”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자비하면서도 아주 정확하고 냉철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좋은 연애 상대가 된다고는 해도
“상대의 험한 꼴을 기꺼이 받아주지 않는 한 좋은 결혼은 불가능하다.”
반유대주의와 싸우고 독단적인 어머니에 맞서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매슬로에게는 환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전념하면서도 희망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제자들이 그의 이상에 도달하지 못해서 실망하고,
히틀러나 독일인이나 공산주의자를 그의 이론에 어떻게 끼워맞출지 몰라서 답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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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라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탄했다.
유럽에서 건너와 미국에 정착한 유능한 교수들인 그의 동료들은
각자의 이론을 내놓고 다른 누구에게도 동의하지 않았다.
학계가 그런 식으로 비판적인 정신을 장려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각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부분만 취했다.
신경학자 쿠르트 골드슈타인Kurt Goldstein, 1878~1965은 미국에서 ‘자아 실현’이라는 용어가
다른 의미로 대중화되기 얼마 전에 매슬로가 그의 용어를 도용했다고 비난했다.
사실 자아 실현이라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 뒤로 수많은 철학자가 각양각색의 자아 실현을 주장했다.
매슬로는 그의 이론의 경험적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지’ 안다면서
고작 “30~40명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100~200명을 대상으로는 그리 신중하거나 심도 깊지도 않게 진행한”
연구에서 얻은 이론이라고 밝힌 점에서 남달랐다.
“나쁘거나 열악하거나 부족한 실험이었다.
나는 그 점을 순순히 인정한다. 아니,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싶다.
나의 잠정적인 가설이 열정 넘치는 사람들에게 통째로 삼켜질까 봐 조금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이 실제에 적용되면서 많은 불확실한 부분이 드러났다.
그는 ‘자아 실현’을 이룬 창조적인 사람들이 제멋대로이고 반항적이고
“모든 참신한 생각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경향이 있다고 인정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느 회사에 들려주었다.
경영자들이 걸핏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창의적인 사람들과 어떻게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이 문제를 경영자들에게 떠넘겼다.
그러면서 그들이 경영을 '심리 실험'으로 생각하기를 바라고,
그들이 '다른 전문 용어'로 '강인하고 침착하고 이기적인 가면 속에 이상주의를 숨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업적으로 종교적인' 시인이나 지식인만큼 '영적'이라는 생각으로 격려했다.
‘자아 실현’이라는 환상
이렇게 의구심과 모호함이 존재하는데도 대다수 미국인과 이어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자아 실현을 성공한 인생과 수익성 높은 사업의 핵심 요소로 간주하는 추세는 계속됐다.
마치 하루아침에 재능의 엘도라도(황금 도시)를 발견하여
모두가 엄청난 부자가 되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MIT의 더글러스 맥그리거Douglas McGregor와 GM에 관한 연구로 유명해진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같은 새로운 세대의 경영 전문가들이 매슬로의 보편적인 만병통치약을 인정하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성현들조차
무지몽매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자아 실현의 귀감으로 바꾸지 못한 역사를 망각한 채
이제는 평범한 사람을 비범한 리더로 만들어준다고 장담하는
모든 인적 자원 교육 프로그램에 매슬로의 이론을 도입했다.
1960년대의 뉴에이지 구루들은 매슬로의 심리학을 신비신비주의 비법에 첨가할 수 있는
즉석 패스트푸드 형태로 만들었고,
매슬로의 이론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부와 행복과 명성을 약속하는 무수한 자기계발서에 스며들고 다양하게 희석되었다.
어느 광고에 나오듯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는 자각만 있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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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프리던Betty Friedan은
(매슬로의 인본주의 심리학이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에 심리학을 전공한 인물로)
매슬로의 언어로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라는 책에서
'이름도 없다는 문제(미국 여성들이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성장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사실)는
다른 어떤 질병보다 우리 조국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준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후계자인 ‘긍정심리학’은
매슬로에게 영감을 받아 사람들에게 행복하라고 가르치고 '장점을 키우고'
'최선을 다해 긍정적인 자질을 펼칠 수 있는 틈새를 발견하라'고 가르치는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했다.
특히 산업 지도자들은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 덕분에 직원들에게
일이 ‘자기계발’에 도움이 된다고 설득할 수 있었다.
자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삶의 궁극의 목표가 되었다.
개인이 현재 온전히 소유한 것은 자신의 감정뿐이고 비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므로
비판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옹호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일까?
자존감을 높이면 어떻게 될까?
과거보다 현대에 베토벤이 많아졌는지,
폭군이 줄어들었는지, 어리석은 사람이 줄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많은 천재와 예언가와 예술가가 가난과 박해에 시달렸으므로 명성의 정점에 오르기 위한
최선의 준비 과정은 다락방이나 감방에서 빵과 물로 연명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홀로 여행길에 올라서 내면에서 의미를 찾은 예는 지금이 처음은 아니다.
공공제도가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지 못하던 시대마다 나타난 현상이다.
20세기는 개인들에게 오직 고독한 자아만 벗 삼아서
외로운 정자와 불안한 난자가 서로 평화를 찾도록 놔두라고 설득한 나머지 여행이 더 험난해졌다.
자아 실현이 충만한 삶과 동의어는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타고난 알량한 재능만으로 아무래도 부족해 보이는
‘잠재력’을 실현하는 정도 이상을 꿈꿀 수 없다는 데 만족할 수 있을까?
여러 나라에서 자아 실현이 ‘진정한 자기’를 찾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정설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이것은 인류의 최종 목표가 아닐 수 있다.
세계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거나 부유하거나 자율적이거나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다방면으로 시도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조만간 다른 명약을 찾아나설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기적일 수 있다.
부유해진다고 해서 저절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권력은 부패할 뿐 아니라 과대망상을 퍼뜨리는 바이러스다.
자유가 필요하다고는 해도 자유를 어떻게 누릴지 모른다면 위축될 수 있다.
인간의 복지를 개선하기 위한 공공의 처방으로 원하던 결과를 얻은 예는 극히 드물다.
피라미드를 오를 때 한 번에 한 계단씩 올라야 한다는 것은 삶을 한정하는 은유다.
나는 열두 살에 이집트의 대피라미드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다른 모든 관광객처럼 꼭대기에 내 이름을 새겼지만
그러고 나자 다시 내려오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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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각자 삶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알기 전에 나는 삶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것이다.
나는 그저 우주의 아주 작은 한 귀퉁이를 볼 수 있을 뿐이고,
남들에게는 무엇이 보이는지 알아내기 전에는 큰 그림을 시작할 수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저 심장이 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심장은 어떻게 뛰고 다른 정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채는 일이다.
삶을 공격하는 치명적인 질병은 ‘생전 경직rigor vitae’,
곧 호기심을 다 태워버리고 반복적이고 무감각한 일상에 안주하는 정신의 경직 상태다.
이런 상태는 살아 있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에 ‘사후 경직rigor mortis’보다 더 위험하다.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영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저 명목상으로만 살아 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바뀌지 않는 한 삶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수 없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죽음의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드디어 변화가 일어났다.
죽음은 우리가 생각한 모습이 아니었다.
유익한 대화는 우리가 함께 하는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조용하고 맨눈에는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살과 피 속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육체의 생존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대화에 의존한다.
세포는 주변의 다른 세포들과 연결되면서 계속 살아 있다.
내 몸에서 매일 수십억 개의 세포가 죽지만 단지 노화로 인해 죽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세포는 자살한다.
세포는 자살하는 기능을 가지고 태어나고
주변의 다른 세포들과 신호를 주고받지 못할 때 자살 기능을 발동시킨다.
그리고 다른 세포들과 결합해서 자기보다 더 큰 무언가를 만들 때 살아남는다.
세포는 자기와는 다른 주변 세포들과 결합해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세포 속 단백질은 무용수가 발레에 참여하듯이 주변의 다른 단백질에 적응한다.
모든 세포가 단 몇 시간 만에 스스로를 파괴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주변 세포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다 실패하면 자살을 결정한다.
한마디로 주변 세포들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면 침묵에 대한 벌로 죽는 것이다.
우리 몸이 끊임없이 스스로 갱신하면서 가을에 낙엽이 지듯이 엄청난 양의 세포가 소멸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정신도 남에게서 빌려온 생각을 획득하기도 하고 폐기하기도 한다.
스스로 차단해서 자살을 감행하는 것은 비단 세포만이 아니다.
철학적 명상에 빠져드는 인간도 삶을 놓친다.
삶의 선물에는 무한히 다채로운 자연 세계와 타인의 상상력이나 독창성과 연결하라는 자극이 들어 있고,
이런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반경이 넓어지면 더 활기차게 살 수 있다.
내가 상대에게 흥미로운 자질을 발견하고 아무도 그 사람에게 주지 못하는 영감을 줄 때
나는 삶에 무언가를 보태는 셈이다.
두 사람이 피상적인 만남에 머물지 않고 만날 때마다 발견과 창조를 보태면 그 만남을 발전시킬 수 있다.
남들이 내게 두려움을 주고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건넬 방법을 모르거나
그들이 내게 말을 건넬 방법을 모르거나 우리가 서로의 요구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세포와 같다.
하지만 두려움이 배고픔만큼 불가피하다고 해도 두 가지 모두에 품위 있게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
두려움을 탐색하는 것은 삶의 사명이고, 두려움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의 경험, 모두의 시행착오
기질, 분노, 권태, 사고로 얼룩진 변칙들과
그 밖에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불운을 바로잡는 것이 목적인 기관과 정부와 사업체는
여전히 개인들의 대화가 조직의 강령이나 행동 규범만큼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선동가들이 별안간 군중을 메뚜기 떼로 바꿔놓을 때도 있다.
하지만 개인들의 소통이 정신을 선명하게 만들고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예기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말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말이 생각의 엔진이 되는 대화로 발전하지 못할 뿐이다.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소통의 기회도 많고 그만큼 장애물도 많다.
기술의 발명이 인간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그래서 모두의 경험, 모두의 시행착오가 삶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1085년에 영국의 왕은
'조언자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후 잉글랜드 전역에 사람을 보내서
영주들이 소유한 토지의 규모와 가축 수를 조사하고 그것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던 재산을 기록한 토지대장Domesday Book이 나왔다.
지금은 다른 종류의 조사를 실시할 여지가 있다.
남들이 나를 얼마나 이해하고 내가 남들을 얼마나 이해하는지가 내가 소유한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
개인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무엇을 믿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소망하는지에 관한 훨씬 더 긴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소심한 시작일 뿐이었다.
누구나 투표용지에 찍힌 X 표보다 훨씬 할 말이 많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81퍼센트는 책을 쓸 만한 아이디어가 있고 책을 쓰고 싶다고 답했다.
그런 바람이 한낱 몽상으로 남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도서관은 대중의 독학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곳으로서 문을 닫겠다는 위협을 그만두고
책을 빌려주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책을 쓰도록 자극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도서관은 사람들이 삶에서 중요한 것과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을 기록해서
자화상으로 그리게 하고 보관할 수 있다.
그리고 피상적으로만 알거나
전혀 모르는 이웃들의 재능과 희망에서 유익함을 얻을 방법을 알아내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세계 대도시의 공공도서관 사서들은 이미 이런 모험을 감행하기로 동의했다.
이 책은 나의 기증 도서다.
독자들이 나의 대화를 듣다가 끼어들어서 반박하고 싶어지고
자기만의 관점으로 직접 책을 쓰면서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과거를 불러내고
현재에 더 큰 희망을 주는 미래를 상상하고 싶어지기를 바란다.
※ 이 글은 <인생의 발견>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우리 삶을 가치 있고 위대하게 만드는 28가지 질문
시어도어 젤딘 - 인생의 발견
역자 - 문희경
어크로스 - 2016. 12. 15.
[t-24.02.01. 20230203-153313-3]
'명상의글(종교.묵상.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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