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는 큰 문을 가진 집에 살고 그는 작은 문을 가진 집에 삽니다
나의 이름은 페르난두 페소아, 그의 이름은 베르나르두 소아레스
우리는 매일같이 만나 저녁을 함께 먹는 사이이지요
리스본 외곽의 작은 식당 도라도레스에서요
그가 처음 도라도레스의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날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서른살 정도 되어 보이던 사내는 책 속에서 막 걸어나온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요
마르고 큰 키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겨자씨같이 콕 박힌 눈......
마치 외투 대신 불안을 껴입고 모자 대신 침울함을 깊게 눌러 쓴 모습이었다고나 할까요
나는 왠지 그가 싫지 않았습니다
십분이 넘도록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그는 쉴 새 없이 뭔가를 중얼거렸어요
손바닥을 한참 들여다보다 테이블을 쾅쾅 내려치기도 하고
주머니를 뒤져 꺼낸 쪽지를 읽으며 히죽거리기도 했지요
나는 어떤 이상한 힘에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가 합석을 청했습니다
그는 허락도 거절도 아닌 표정으로 나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종업원을 불러 주문한 음식을 재촉했지요
곧이어 음식이 나왔고
그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식사에만 집중했지만 이따금씩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곤 했어요
그때 나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 대해,
고독에는 흰색과 검은색 두종류가 있다는 것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댔지요
큰 문으로 들어가면 작은 문이 나오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다시 큰 문이 나오는 이상한 집에 대한 이야기도요
그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추켜올리며 익힌 당근을 집요하게 골라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식당 벽에 멀쩡히 걸려 있던 시계가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얼어 붙었는데
바로 그때 그가 포크를 쾅! 내려놓으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굴뚝에 사는 사람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저녁 7시 5분만 되면 그는 도라도레스의 문을 밀고 들어오고,
내 앞에 앉고, 서둘러 주문을 시작하는 것이었는데......
번갈아 놓인 흰 돌과 검은 돌처럼......
나는 오른손잡이이고
그는 왼손잡이이기에 그와 마주 앉아 있으면 거울을 앞에 두고 식사하는 기분이 듭니다. (p41)
안희연 시집 -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시선 393)
창비 - 2015.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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