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쉰이 넘어 배낭 메고 떠난 여행
편안한 여행도 좋지만 배낭여행이란 걸 한번 해보니까 내가 걸었던 골목길,
먹었던 음식, 거리의 풍경 등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더라고요.
현지인들과의 만남, 생소한 곳에서의 부딪침, 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 부담감,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이루다 보면 즐겁고,
어떤 면에서는 인생의 성공자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지금 이렇게 여행하는 게 평생 가슴에 남을 거라는 건 확실해요.
김선우 57세. 서명희 55세 부부
언젠가 인도의 한 버스터미널에 내렸을 때 안내 표지판이며,
버스 시간표며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던 적이 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영어 표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낯선 곳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없다는 건 공포에 가까웠다.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봤지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유일한 길은 본능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간섭하기 좋아하는 인도 사람들은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끌며 뭔가 설명하려 들었다.
그중 누구의 제스처를 따를 것인지 정신을 차리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난생처음 가본 곳에서는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이 활짝 열린다.
이런 게 배낭여행이다.
배낭여행을 젊은 사람만 한다는 건 오해다.
그런 편견은 주로 젊은 사람들이 배낭여행을 하고
이들의 여행 스타일이 배낭여행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배낭여행을 큰돈 들이지 않고 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배낭여행은 가난한 나라로 가는 여행이 아니다.
여행의 한 가지 스타일일 뿐이다.
꼭 배낭을 매고 가야 배낭여행인 것도 아니다.
슈트케이스보다는 어깨에 메는 배낭이 자유롭고 편하기에 배낭을 선호하는 것뿐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배낭여행이라는 말보다 자유여행이란 말이 더 적당하다.
나이 들어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하는 건 모든 여행자들의 로망이다.
나이 든 부부가 패키지 팀에 끼어 여행하는 게 아니라 커다란 배낭을 들러 메고 여행을 하고 있다면
젊은 여행자들은 더더욱 열광한다.
중년의 부부가 몇 개월씩 배냥 여행을 한다는 건 그만큼 특별해 보인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카오산 로드에서도 나이 든 부부의 모습은 흔하지 않다.
간간이 서양 부부의 모습이 보일 뿐, 한국인 중년 부부의 모습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늘 손 붙잡고 같이 다녔어요.
김선우 서명희 부부를 만난 건 초저녁, 흐릿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때였다.
난 그때 카오산 로드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 친구 메구미와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메구미는 의류 판매사원으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태국으로 와서 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넓지 않은 거리 저편에 동양인 중년 부부가 걸어가고 있었다.
두 분이 한국 분들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숨에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한국 분들이시죠?"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어떻게 알았느냐고 웃으며 맞아주신다.
내가 지금 여행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괜찮다면 내일 만나 여행하신 이야기를 듣고 싶다, 했더니 대답은 안 하고 '허허' 웃기만 하셨다.
3주 넘게 카오산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 중년 부부였다.
다음 날 아침, '왓 차나 쏭크람'이라는 절 뒤편의 한 레스토랑에서 부부를 만났다.
두 분의 어깨 뒤로 스킨헤드 백인 친구가 앉아 있었는데
부드럽게 웃고 있는 두 분 모습과 나란히 보여 재미있었다.
두 분은 충남 논산에서 왔다.
나이는 각각 쉰일곱과 쉰다섯. 제과점을 운영하다 여행을 나오기 전 정리했다.
아저씨는 이전에 두세 번 배낭여행을 한 경험이 있지만 아주머니는 처음이다.
한국을 떠날 때는 인도, 네팔, 캄보디아를 두 달 동안 돌아볼 계획이었지만.
인도에서 체류가 길어져 예정보다 한 달 지나 방콕에 도착했다.
아주머니는 난생처음 배낭여행을 온 거라고 하셨잖아요. 소감?
남편이 몇 차례 배낭여행을 할 때마다 나도 한번 따라가야지. 따라가야지 했거든요.
그런데 가게를 그만두면서 '이번이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갈 마음을 먹였죠.
마침 결혼 30주년이기도 하더라고요.
인도에 가서는 환경이나 모든 것이 우리나라에 비해 너무 열악한 것 같아
과연 잘 견딜 수 있을까 굉장히 고민을 했어요.
첫날밤엔 잠도 설쳤다니까요.
하하~ 그러다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남들 다 여행하는데 나는 왜 못하겠냐 하면서 마음을 바꿔 먹고 보니까 조금 견딜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 뒤로 쭉 여행을 잘 했고 요즘에는 귀국 날짜가 다가오니 조금 아쉽다고 할까"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들어 하는 여행은
좋은 호텔에서 자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 식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이 먹어 힘들게 어떻게 배낭여행을 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두 분은 어떻게 해서 배낭여행을 하게 된 건가요?
97년도에 유럽에 한 번 간 적이 있어요.
4개국을 패키지로 여행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 후 쉰이 넘어 배낭여행이란 걸 한번 해보니까 내가 걸었던 골목길,
먹었던 음식, 거리의 풍경까지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거예요.
편안한 여행도 좋지만 배낭여행을 하면서 현지인들과의 만남,
생소한 곳에서의 부딪침, 또 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 부담감,
이런 것들을 다 이루면서 다니는 게 더 즐거웠던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인생의 성공자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물론 어떨 때는 막막해서 눈 앞이 캄캄해요.
하지만 이렇게 여행하는 게 머릿속에 언제까지나 남을 거라는 건 확실해요.
아주머니도 배낭여행이 패키지여행보다 더 좋으세요?
패키지여행은 편하니까 좋은 면도 있잖아요.
패키지여행은 경제적으로도 벅찬 것 같아요.
주위에서는 해외 여행 간다 하면 "돈이 많으니까 가지" 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배냥 메고 다니니까 너무너무 가격이 싸더라고요.
밥값이랑 여관비, 호텔비가 싸니까 너무 좋아요.
경제적으로 저렴하니까 더 기쁜 것 같아요.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쇼핑하는 것도 좋고 골목골목 현지인들과 마주치는 것도 좋아요.
다음에도 패키지보다는 배낭으로 오고 싶어요.
여행을 하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잖아요. 두 분은 어떠세요?
이렇게 나이 먹어 여행을 다니니
첫째는 내가 가족들, 친구들,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대한 적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7남매 형제들 중 소원한 형제도 있고
친구들 중에도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거리감을 느꼈던 친구가 몇 있어요.
그런데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정말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때 가족과 주변 사람들 생각을 하면 내가 잘한 일도 생각나고 잘못한 일도 생각나는데
특히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했을까 하는 반성과 후회를 하게 돼요.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가족들, 형제들, 친구들, 아내한테, 자식들한테 이렇게 해야지,
좀 더 다가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이번에도 그런 각오를 하고 돌아갑니다.
옛날에 하던 버릇 버리고 가까이 가야지....,
특별히 힘들거나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영어를 전혀 못하기 때문에 혹시 길을 잃거나 마누라 잃어버릴까 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태국도 그렇지만 인도에 가면 교통질서라는 게 없거든요.
사람이 피해 가든지 차가 피해 가든지 해야 되는데,
행여 누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늘 손 붙잡고 다녔어요.
차가 오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길을 건널 때 눈치껏 빨리 건너야 하는 게 힘들었죠.
아주머니는 처음 배낭여행을 하는 거라 더 힘드셨을 것 같은데, 언제가 힘드셨어요?
인도에서 기차를 탈 때였는데 인도의 기차역은 한국처럼 작지 않고 플렛 홈이 굉장히 넓더라고요.
시간표가 있어도 출발, 도착 시간표만 있지 플렛 홈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아서
도대체 기차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보니 출발 직전에야 플렛 홈이 정해지더라고요.
행여 기차를 놓칠까 봐 플렛 홈이 정해지면 우리가 탈 기차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어요.
일단 출발하고 나면 편하기는 했지만....,
아, 한 가지가 또 있어요!
인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나라여서 장거리 이동을 할 때 종종 이층 침대버스를 타게 되거든요.
그런데 도로가 고르지 못해 차가 얼마나 뛰는지 내장이 파열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다행히 아침에 일어나서 별 탈이 없길래 엊저녁에 다이어트는 잘했구나 했죠.
하하....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장거리 이동을 할 때는 버스를 몇 시간이나 탄 건가요?
최고 35시간까지 탔어요.
7~8시간은 보통이고 13시간도 걸리고 20시간도 걸리고 그랬어요.
이런 게 보통이더라고요.
두 분이 함께 여행하면 다 틀 일도 생길 것 같아요.
다툰 적은 별로 없고 나 혼자 토라진 때는 많아요.
인도와 네팔에 있다가 태국에 오니까 음식 천국 같잖아요?
그러니 집사람이 여러 가지 음식들을 골고루 먹어 봤으면 좋겠는데 안 먹으니까 내가 삐치죠,
하하....,
소년 같은 표정을 짓는 아저씨는 서슴없이 '삐친다'라는 표현을 썼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없으세요?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이나...,
인도 캘커타 숙소에서 나이 든 서양인 부부를 만난 적이 있어요.
말이 잘 통하는 건 아니니까 마주치면 아는 체만 하고 지내다가 헤어질 때는 인사도 없이 헤어졌어요.
그런데 그 부부를 방콕에서 다시 만나게 된 거예요.
우리를 보더니 자리에서 뛸 듯이 반가워해서 너무 고마웠어요.
우리는 반가워도 잘 표현하지 못하잖아요.
반갑게 맞아줘서 정말 감사했어요.
여행을 하시면서 '참 좋다!'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던가요?
행복이라는 단어의 범위는 넓은데 나는 우리 마누라의 얼굴 표정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있었어요.
만족해하는 표정, 별 거 별 거 다 보고, 별 거 별 거 다 타보고,
별 거 별 거 다 먹어보고 하면서 좋아하는 표정을 보고 나는 정말 행복했어요.
집에서는 내가 돈 관리를 하거든요.
그런데 여행 와서는 내가 돈 쓸 줄도 모르고 하니까 남편이 애기 다루듯이 다 해줘요.
(큰 웃음)
그런 점에서 조금 행복한 걸 느끼는 것 같아요.
아저씨가 다 해주신다고요?
길을 건널 때 세 살 먹은 아기가 길 건너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손 잡아주고요.
매사를 노심초사 강가에 내놓은 아기 보듯이 봐줘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좋았어요.
아저씨는 아주머니가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고 자기가 행복하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아저씨가 보살펴줘서 행복하다고 했다.
각자 무엇이 좋았다고 따로따로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 함께여서
완전한 행복이 두 분 모습이었다.
※ 이 글은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박준 - On the Road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넥서스BOOKS - 2006. 06. 10.
[t-24.05.17. 20240508-153817-3]
'일상 정보 > 사람들(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어라 바람아 - 김효선 여성신문 대표 (0) | 2024.03.06 |
---|---|
청년 마도로스가 이끄는 보물선 (0) | 2024.03.01 |
김형석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다시 시작해 보자 (0) | 2024.02.06 |
'걸으면 해결된다' 29년만의 우승 LG 차명석의 한강 ‘싱크로드’ (0) | 2024.02.05 |
노점으로 번 51억 기부... ‘충북대 어머니’ 교내에 잠들다 (0) | 2024.01.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