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 2024. 2월호」
청년 마도로스가 이끄는 보물선
김 승 주 (항해사)
김승주는 11만 톤짜리 화물선의 운항을 책임지는 국내 일등항해사다. 선적된 컨테이너들이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운반되도록 갑판을 책임지고 수십 명의 선원을 관리하며 사납게 몰아치는 격랑과 맞선다. 하지만 그녀가 거센 폭풍우 속에서 지키고 싶은, 진짜 귀한 것들은 따로 있다.
미국 고전소설《모비딕》에는 모비딕이라는 흰고래가 등장한다.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에이해브 선장에게 모비딕은 공포의 대상이자 집념의 불씨다. 일등항해사 김승주(31)에게도 바다는 모비딕 같은 존재다. 두렵지만 전진하게 만드는 동력이자 냉혹하지만 아름다운 생업의 터인 것이다. 그녀가 삶의 돛을 활짝 펴고 굳건히 물살을 헤쳐 나가는 이유다.
20대 청춘을 오롯이 바다와 함께 보낸 김승주는 삼등, 이등항해사를 거쳐 4년 전 일등항해사라는 빛나는 타이틀에 닻을 내린 9년 차 항해사다. 오랜 시간 거친 파도 위에서 다사다난한 일을 겪은 그녀지만 그녀를 소개하는 수식어는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 전 세계 0.1%에 속하는 여성 항해사. 전 세계 125만 명의 선원 중 2% 남짓한 여성 선원, 그중에서도 그녀는0.1%를 차지하는 화물선 종사자에 해당할 만큼 특출난 능력을 지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운항하는 선박의 규모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진다. 컨테이너 1만 개가 선적되는 11만 톤 무게의 화물선으로, 에펠탑보다 길고 축구장 네 개를 합친 크기에 비견된다. 거대한 화물선을 이끌고 무사히 바닷길을 달려 선적물을 안착시킬 때까지 이뤄지는 총 관리 감독이 일등항해사의 임무이기에 서른한 살 청년의 여린 어깨에 놓인 책임은 무겁기만 하다.
“삼등, 이등항해사일 때는 각각 수속 처리와 항로 계획이라는, 주어진 업무만 잘 해도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일등항해사는 항해 전반에 관여해요. 비상 상황에 지체 없이 대응하기 위해 배의 구조와 장단점을 꿰뚫고 있어야 하고, 조타 명령도 내려야 하죠. 선내에서 발생하는 폐기물 처리나 시설물 고장까지 해결하는 만능 일꾼이니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져요. 배에서만큼은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어요.”
부산항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루프톱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밝고 유쾌한 아가씨다. 근처 한국해양대학교를 다니면서도 이런 멋진 곳이 있는지 몰랐다며 신기해하는 명랑한 그녀가 늠름한 레인저 로봇처럼 변신한 모습은 어쩐지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선장을 보좌하면서 스무 명의 선원들을 통솔해야 하니 승선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엄격한 리더가 될 수밖에 없다. 훌륭한 리더라면 으레 그러하듯 그녀 역시 배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항해의 목적을 가장 강조한다. 출항을 앞둔 첫 회의에서 선원들에게 화물을 차질 없이 운반해야 함을 주지시키는 일엔 예외가 없다.
“전 안전 항해를 철칙으로 여겨요. 좌초나 충돌은 반드시 막아야 해요. 화물은 물론 사람의 목숨과도 직결되니까요. 그래서 안전에 관한 문제점이 발견됐을 때 제일 크게 화를 내요. 비바람 치는 날씨에 제대로 고박하지 않은 컨테이너가 보이면 아무리 나이 많은 담당자라 해도 따끔하게 주의를 주죠. 선원의 건강도 안전과직결된다고 생각해서 제가 만든 일일 점검표에 선원들이 아침마다 자신의 컨디션을 표시하도록 해요. 그래야 몸이 좋지 않은 선원의 업무를 다른 동료나 제가 꼼꼼히 체크하고 보완할 수 있으니까요.”
김승주 항해사가 특별히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이유는 화물의 높은 경제적 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한 번 출항하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항해하는 그녀가 그동안 목도해온 바다의 민낯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잔잔하다가도 돌연 무섭게 바뀌는 바다는 매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초강력 태풍 속 운항을 일컫는 ‘황천(荒天) 항해’는 한자는 다르지만 황천길이 연상될 정도로 위험한 순간인데, 무시무시한 태풍이 배의 앞뒤에서 발생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그녀는 아직도 등골이 섬뜩하다. 진도 8 이상에 버금가는 파동에 맥을 못 추고 이리저리 쓰러지는 선체를 라이프 재킷을 끌어안은 채 바라보는 심정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러다 모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살면서 웬만하면 겪고싶지 않아요. 하지만 최대한 안전한 항로를 선택해도 철마다 어쩔 수 없이 태풍과 마주쳐요. 알면서도 항해에 나서는 것이죠. 일등항해사로서 총 다섯 번 항해했는데 위기에 익숙해지긴 커녕 오히려 두려움이 커지네요.”
김승주 항해사가 바다 위에서 맞닥뜨리는 고난은 하나 더 있다. 어쩌면 태풍보다 더 위압적일지 모를 지독한 외로움. 가족과 친구도 없고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아 세상과 단절되는 망망대해에서 느끼는 고독은 지루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를 바닷속 깊숙이 끌어내린다. 항해사로 일하는 동안 할머니 두 분 모두를 바다 위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는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 대신 서있던 바닷길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언제나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는 가족에게 자신도 힘을 주는 사람이고 싶지만 현실은 반대여서 속상할 따름이다. 불편한 마음으로 나섰다가 가뜩이나 길고 고단한 항해가 더 고달파질까 걱정돼, 집안의 대소사를 웬만해선 전하지 않는 식구들의 배려마저 그녀에겐 이겨내야 할 너울이 되곤 한다.
비록 바다가 밑바닥에 사나운 파도를 숨기고 있어도 그 품이 그토록 넓은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거센 격랑을 견디고 나면 남은 항해에 필요한 지혜를 보상처럼 내주는 걸 보면 말이다. 성난 물결도 언젠가는 잠잠해지므로 겁먹지 말고 배짱 있게 맞설 것, 하나의 파도를 넘으면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므로 대자연 앞에서 극복이란 말은 부질없다는 것, 그저 자신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길밖에 방도가 없다는 것. 그녀의 가슴속을 비추는 등댓불 같은 진리들은 맹렬한 폭풍우를 뚫고 낚아올린 인생의 산물들이다.
“바다에서 가장 마음 깊이 배운 점은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순간에 위기가 온다는 사실이에요. 항해법에선 폭풍우를 만났을 때 제일 금기시되는 일이 엔진 정지예요. 대학 시뮬레이션 교육 시간에 키를 왼쪽으로 돌려라, 오른쪽으로 돌려라 하는 친구들의 말에 우물쭈물하다가 암초와 충돌한 적이 있어요. 현실에서도 여러 번 비슷한 상황에 처할 뻔하면서 알았죠.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다음 길은 어떻게 든 생기기 마련이니 멈춰선 안 된다는 것을요.”
무수한 판단과 선택의 순간을 지나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그녀에겐 두세 달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잔뜩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면서 마음껏 게을러져도 괜찮은 시기지만 그녀가 이끄는 삶의 엔진은 육지에서도 멈추는 법이 없다. 작년 여름휴가 때는 4개월간 뮤지컬을 배워 〈심야식당〉이란 무대에서 열연을 펼쳤고, 2년 전 겨울 휴가 때는 바디프로필 촬영을 위해 혹독한 운동과 식단 관리를 병행하며 도전 의식을 불태웠다. 두 달 전 미국 시애틀과 캐나다 벤쿠버를 거치는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휴가 중인 그녀는 이번엔 항해사란 직업에 관한 실용서를 집필할 계획으로 분주하다. 언제든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생각하면 하루하루를 헛되이 흘려버릴 수 없는 그녀다.
어찌 보면 우린 모두 ‘죽음’이란 도착지를 향해 생애의 물길을 저어가는 항해자다. 그래서인지, 인생이란 거대한 배를 실제 바다 위에서 이끄는 한 청년 마도로스의 파란만장한 항해일지에 자꾸만 눈과 귀가 쏠린다.
에디터 - 한재원
사진 - 이권호
출처 - 샘터 2024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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