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 정채봉. 류시화 / 샘터(샘터사) 1998. 05. 01.
저녁 종소리 - 정채봉
어머니.
어머니 세상에도 가을이 와 있습니까.
아들이 사는 여기는 햇볕도, 바람도 싸아한 가을입니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새하얀 서리를 뒤집어쓰고 있는 배추밭을 보았습니다.
문득 어머니의 제사가 며칠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낙엽질 때 돌아가시던 길이 홑옷 입고 가시기에는 춥지 않으시던가요?
얼마 전 저는 생전 처음으로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1주일 후 결과를 보러 가서 B형 간염이 잠복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사는 어머니로부터 옮겨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요?”
그러자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간염은 태내에서도, 젖으로도 옮겨지는 것이라고 일러주더군요.
저는 그때 내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물증을 가지게 된 사실이 이상하게도
소중히 가슴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손녀인 리태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더군요.
저는 정말 죽도에 가슴이 섬벅 베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어리광이 가시지 않아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빨고 다니는 저 철부지 나이에
어머니는 시집을 오셔서 아홉 식구의 물동이를 이고 살지 않으셨습니까.
여고 2학년이 되어서도
교복 다림질을 제대로 못해 땀을 뻘뻘 흘리는 리태한테 한 마디 해주었습니다.
“우리 엄만 지금 네 나이인 열여덟에 나를 낳았다는데...”
이때는 입을 오리 주둥이처럼 비죽 내밀고 있던 어머니의 손녀도,
스무 살이 되어 성묘를 갔을 적에는
“너와 동갑 나이에 여기로 오셨단다” 했더니
“이렇게 아무도 없는 산속에...”라며 말을 맺지 못하고 울먹이더군요.
거기서 리태가 물었습니다.
아빠 나이가 그때 몇 살이었느냐고. 세 살이었다고 하자
“그럼 아빤 엄마 얼굴도 모르겠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릅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어머니의 내음은 아련히 기억되어 있습니다.
바닷바람에 묻어오는 해송 타는 내음.
웬일인지 그 내음이 느껴질 때면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어머니 제사가 지나간 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들녘에 나가서 토끼풀을 뜯어가지고 돌아오니 이불 호청을 깁고 있던 할머니가 불렀습니다.
“너 없는 사이에 너그 담임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다면서?”
저는 마음이 켕겨서 고개를 저었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저를 보지 않은 채 바늘귀에 실을 뀔 양 계속 거기만 주시하시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해송 타는 냄새에 네 에미가 떠오르다니...
그 시절에는 군불을 생솔로 때었지만서두... 허긴 네 외가 가는 길이 솔밭길이긴 하다.
솔띠재라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꽉찬 고개를 넘어야 했거든.
너를 업고 네 에미가 친정을 몇 번 다녔으니 그 솔냄새가 너희 모자한테 은연중에 배었을지도 모르지...
네 어미 얼굴을 보여 주랴?”
할머니는 일어나서 장롱 위에 있는 부담을 끌어내렸습니다.
어머니.
저는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뚜껑을 열어 보여 준 그 부담 속에서는 열일곱 살에 시집온 어머니의 소지품이 나왔습니다.
여러 벌의 옷과 함께 남치마며 인조 저고리며 단속곳이며,
그리고 색이 바래지 않은 흉배도 있었고 나막신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부담의 맨 아래에 한지로 싸여 있는,
생콩 비린내가 나는 듯한 어머니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저한테 참으로, 참으로 여리다는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습니다.
둥근 턱에 솔순 같은 눈,
바람받이에 있는 해송 같은 낮은 코에 작은 입,
정말 명이 든 데라곤 어디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박속 같은 여인이었지요.
멍하니 앉아서 사진 속의 어머니를 들여다보고 있는 저한테
할머니께서는 또 하나의 슬픈 과거를 일러주셨습니다.
“네 에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도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죽었다.”
“세 살이었다면서 내가 그렇게 말이 늦었던가요?”
“아니지,
너희 삼촌들이 형수라고 부르니까 너도 덩달아서 형수라고 했지. 형수 젖, 형수 물하고.”
저는 피식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울음보다도 짙은 회한의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 제 앞에는 문득 환상의 지구역이 떠올랐습니다.
순간마다 무수한 어른들이 떠나가고 대신 어린 아기들이 내려오는 곳.
스무 살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
그날 그곳을 떠나는 늙은 분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는 엄마의 쪽찐 머리를 보고
혹시 남겨 놓고 가는 아이가 없느냐고 물어서 울린 사람은 없었는지요?
자꾸 뒤돌아보이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별리하셨는지요?
어머니,
저는 서른한 살 때 첫 아이를 얻었습니다.
아이는 우리가 낯선 듯 처음엔 울고 보채더니
예닐곱 달이 되면서부터는 예쁜 짓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스운 일이 하나 없는데도 저 혼자 방글거리곤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러는 승태가 귀여워서 입을 맞추다 말고 해송 타는 내음을 느꼈어요.
순간 언젠가 고모가 한 말이 환청처럼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네 에미처럼 무심한 여자는 드물 것이다.
네가 배고파서 울어도 좀체 젖줄 생각을 안하는 것이야.
보다 못해 우리가 재촉하면 그때야 일손을 놓고 가서 젖 한 모금 찔끔 주고 금방 돌아오곤 했단다.”
그제야 저는 나이 어린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짚어낼 수 있었지요.
아이 우는 소리에 타지 않을 엄마 속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달려오고 싶은 마음보다도 시누이들한테 눈치 보일까 봐 일자리를 뜨지 못했을 테지요.
아무리 울보라고 소문난 저였대도 때로는 엄마 품에서 웃어 보이기도 하였겠죠.
그러나 부끄러움 많은 어린 엄마로서는
누가 볼까 봐 저의 어린 빰에 볼 한 번 부비는 것도 참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이승에서 함께 지낸 불과 4년여 동안에도
어머니의 몸과 마음에 찰과상을 입혔다는 것을 고모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런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일본으로 가신 아버지는 영 오실 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군에 가 있었을 때서야 비로소 다녀가셨으니 꼭 18년 만이었습니다.
지금 저한테는 어머니의 산소 앞에서 연신 소주잔만 비우시던 모습뿐입니다.
그 아버지가 쉰여섯 나이로 일본 부인 앞에서 운명하셨다는 부음 역시도 가을에 받았습니다.
당시 숙부께서 아버지의 유해를 선산으로 모셔 오자고 했을 때는 응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다시 거론되었을 때는 순순히 따랐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를 위해서 모셔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머니.
푸른 바다가 약간 물려 있는 일본의 와카야마는 우리나라의 진주와 같은 전원 도시였습니다.
오사카에서 떠난 차는 우리 고향 순천을 갈 때와 같이 평원을 지나고 산악 지대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경사가 심한 고갯마루를 내려서자 도시가 펼쳐져 있었는데
아버지의 집은 바닷자락과 만나는 뚝방 아래의 마을에 있었습니다.
거기 이복동생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한사코 그 마을을 떠나시지 않으려 했다는군요.
저는 어슴푸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포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동네의 위치가 우리 고향 신성 마을의 앉음새와 흡사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방에서 아버지가 즐겨 베셨다는 목침을 베고 누웠습니다.
그러자 무심결에 건너편 벽에 걸려 있는 오래된 액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땀땀이 수를 놓은 풍경이었는데 그것은 밀레의 ‘만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들녘과 거기에 서 있는 농부가 우리 한국인 부부로 바꿔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들녘 끝의 초가집 교회,
그리고 우리 식의 두엄더미,
치마 저고리를 입고 수건을 쓴 부인과 핫바지 차림의 남정네,
그 곁의 지게 작대기로 받쳐져 있는 바지게 얹힌 지게.
저는 벌떡 일어나서 수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 수 그림의 맨 아래 귀퉁이에 새겨져 있는 이름을 보았습니다.
‘정순’
아, 어머니.
호적에서 말고 어머니의 성함은 처음이었습니다.
호적에서는 그나마 붉은 선으로 눌려 있어 얼마나 싫었는지요?
그런데 거기에서는 직접 수놓으신 생이름이 ‘저녁 종소리’에 다소곳이 귀기울이고 있었으니.....
아마도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오신 것을
아버지가 당신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고 보신 것이겠지요.
그때야 저는 아버지의 그곳 세월도 회한과 인고의 나날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작품은 걷어 오지 못하였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그곳 동생이
아버지가 귀히 여겼던 것 하나는 간직하고 싶다며 내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버지의 유해를 둘러친 병풍인 양 제 가슴 속 그림 없는 풍경으로 삼아서 왔습니다.
어머니.
지금쯤 우리 고향에는 산국이 피어서 흔들리고,
재 너머서는 파도 소리가 소소히 들려오고 있을 테지요.
그리고 우리 선산 아래 밭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있겠지요.
깨도 걷고, 콩도 걷고, 고구마도 캐었을 테지요.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돌아오신 아버지의 소원대로
바지게를 받쳐 두시고 정답게 저녁 기도를 드리고 계신지요?
저는 멀리서 종이라도 울려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안녕히 계셔요.
저녁 종소리 - 정채봉
어머니.
어머니 세상에도 가을이 와 있습니까.
아들이 사는 여기는 햇볕도, 바람도 싸아한 가을입니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새하얀 서리를 뒤집어쓰고 있는 배추밭을 보았습니다.
문득 어머니의 제사가 며칠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낙엽질 때 돌아가시던 길이 홑옷 입고 가시기에는 춥지 않으시던가요?
얼마 전 저는 생전 처음으로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1주일 후 결과를 보러 가서 B형 간염이 잠복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사는 어머니로부터 옮겨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요?”
그러자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간염은 태내에서도, 젖으로도 옮겨지는 것이라고 일러주더군요.
저는 그때 내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물증을 가지게 된 사실이 이상하게도
소중히 가슴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손녀인 리태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더군요.
저는 정말 죽도에 가슴이 섬벅 베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어리광이 가시지 않아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빨고 다니는 저 철부지 나이에
어머니는 시집을 오셔서 아홉 식구의 물동이를 이고 살지 않으셨습니까.
여고 2학년이 되어서도
교복 다림질을 제대로 못해 땀을 뻘뻘 흘리는 리태한테 한 마디 해주었습니다.
“우리 엄만 지금 네 나이인 열여덟에 나를 낳았다는데...”
이때는 입을 오리 주둥이처럼 비죽 내밀고 있던 어머니의 손녀도,
스무 살이 되어 성묘를 갔을 적에는
“너와 동갑 나이에 여기로 오셨단다” 했더니
“이렇게 아무도 없는 산속에...”라며 말을 맺지 못하고 울먹이더군요.
거기서 리태가 물었습니다.
아빠 나이가 그때 몇 살이었느냐고. 세 살이었다고 하자
“그럼 아빤 엄마 얼굴도 모르겠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릅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어머니의 내음은 아련히 기억되어 있습니다.
바닷바람에 묻어오는 해송 타는 내음.
웬일인지 그 내음이 느껴질 때면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어머니 제사가 지나간 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들녘에 나가서 토끼풀을 뜯어가지고 돌아오니 이불 호청을 깁고 있던 할머니가 불렀습니다.
“너 없는 사이에 너그 담임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다면서?”
저는 마음이 켕겨서 고개를 저었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저를 보지 않은 채 바늘귀에 실을 뀔 양 계속 거기만 주시하시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해송 타는 냄새에 네 에미가 떠오르다니...
그 시절에는 군불을 생솔로 때었지만서두... 허긴 네 외가 가는 길이 솔밭길이긴 하다.
솔띠재라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꽉찬 고개를 넘어야 했거든.
너를 업고 네 에미가 친정을 몇 번 다녔으니 그 솔냄새가 너희 모자한테 은연중에 배었을지도 모르지...
네 어미 얼굴을 보여 주랴?”
할머니는 일어나서 장롱 위에 있는 부담을 끌어내렸습니다.
어머니.
저는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뚜껑을 열어 보여 준 그 부담 속에서는 열일곱 살에 시집온 어머니의 소지품이 나왔습니다.
여러 벌의 옷과 함께 남치마며 인조 저고리며 단속곳이며,
그리고 색이 바래지 않은 흉배도 있었고 나막신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부담의 맨 아래에 한지로 싸여 있는,
생콩 비린내가 나는 듯한 어머니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저한테 참으로, 참으로 여리다는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습니다.
둥근 턱에 솔순 같은 눈,
바람받이에 있는 해송 같은 낮은 코에 작은 입,
정말 명이 든 데라곤 어디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박속 같은 여인이었지요.
멍하니 앉아서 사진 속의 어머니를 들여다보고 있는 저한테
할머니께서는 또 하나의 슬픈 과거를 일러주셨습니다.
“네 에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도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죽었다.”
“세 살이었다면서 내가 그렇게 말이 늦었던가요?”
“아니지,
너희 삼촌들이 형수라고 부르니까 너도 덩달아서 형수라고 했지. 형수 젖, 형수 물하고.”
저는 피식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울음보다도 짙은 회한의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 제 앞에는 문득 환상의 지구역이 떠올랐습니다.
순간마다 무수한 어른들이 떠나가고 대신 어린 아기들이 내려오는 곳.
스무 살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
그날 그곳을 떠나는 늙은 분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는 엄마의 쪽찐 머리를 보고
혹시 남겨 놓고 가는 아이가 없느냐고 물어서 울린 사람은 없었는지요?
자꾸 뒤돌아보이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별리하셨는지요?
어머니,
저는 서른한 살 때 첫 아이를 얻었습니다.
아이는 우리가 낯선 듯 처음엔 울고 보채더니
예닐곱 달이 되면서부터는 예쁜 짓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스운 일이 하나 없는데도 저 혼자 방글거리곤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러는 승태가 귀여워서 입을 맞추다 말고 해송 타는 내음을 느꼈어요.
순간 언젠가 고모가 한 말이 환청처럼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네 에미처럼 무심한 여자는 드물 것이다.
네가 배고파서 울어도 좀체 젖줄 생각을 안하는 것이야.
보다 못해 우리가 재촉하면 그때야 일손을 놓고 가서 젖 한 모금 찔끔 주고 금방 돌아오곤 했단다.”
그제야 저는 나이 어린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짚어낼 수 있었지요.
아이 우는 소리에 타지 않을 엄마 속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달려오고 싶은 마음보다도 시누이들한테 눈치 보일까 봐 일자리를 뜨지 못했을 테지요.
아무리 울보라고 소문난 저였대도 때로는 엄마 품에서 웃어 보이기도 하였겠죠.
그러나 부끄러움 많은 어린 엄마로서는
누가 볼까 봐 저의 어린 빰에 볼 한 번 부비는 것도 참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이승에서 함께 지낸 불과 4년여 동안에도
어머니의 몸과 마음에 찰과상을 입혔다는 것을 고모들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런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일본으로 가신 아버지는 영 오실 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군에 가 있었을 때서야 비로소 다녀가셨으니 꼭 18년 만이었습니다.
지금 저한테는 어머니의 산소 앞에서 연신 소주잔만 비우시던 모습뿐입니다.
그 아버지가 쉰여섯 나이로 일본 부인 앞에서 운명하셨다는 부음 역시도 가을에 받았습니다.
당시 숙부께서 아버지의 유해를 선산으로 모셔 오자고 했을 때는 응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다시 거론되었을 때는 순순히 따랐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를 위해서 모셔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머니.
푸른 바다가 약간 물려 있는 일본의 와카야마는 우리나라의 진주와 같은 전원 도시였습니다.
오사카에서 떠난 차는 우리 고향 순천을 갈 때와 같이 평원을 지나고 산악 지대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경사가 심한 고갯마루를 내려서자 도시가 펼쳐져 있었는데
아버지의 집은 바닷자락과 만나는 뚝방 아래의 마을에 있었습니다.
거기 이복동생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한사코 그 마을을 떠나시지 않으려 했다는군요.
저는 어슴푸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포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동네의 위치가 우리 고향 신성 마을의 앉음새와 흡사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방에서 아버지가 즐겨 베셨다는 목침을 베고 누웠습니다.
그러자 무심결에 건너편 벽에 걸려 있는 오래된 액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땀땀이 수를 놓은 풍경이었는데 그것은 밀레의 ‘만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들녘과 거기에 서 있는 농부가 우리 한국인 부부로 바꿔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들녘 끝의 초가집 교회,
그리고 우리 식의 두엄더미,
치마 저고리를 입고 수건을 쓴 부인과 핫바지 차림의 남정네,
그 곁의 지게 작대기로 받쳐져 있는 바지게 얹힌 지게.
저는 벌떡 일어나서 수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 수 그림의 맨 아래 귀퉁이에 새겨져 있는 이름을 보았습니다.
‘정순’
아, 어머니.
호적에서 말고 어머니의 성함은 처음이었습니다.
호적에서는 그나마 붉은 선으로 눌려 있어 얼마나 싫었는지요?
그런데 거기에서는 직접 수놓으신 생이름이 ‘저녁 종소리’에 다소곳이 귀기울이고 있었으니.....
아마도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오신 것을
아버지가 당신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고 보신 것이겠지요.
그때야 저는 아버지의 그곳 세월도 회한과 인고의 나날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작품은 걷어 오지 못하였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그곳 동생이
아버지가 귀히 여겼던 것 하나는 간직하고 싶다며 내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버지의 유해를 둘러친 병풍인 양 제 가슴 속 그림 없는 풍경으로 삼아서 왔습니다.
어머니.
지금쯤 우리 고향에는 산국이 피어서 흔들리고,
재 너머서는 파도 소리가 소소히 들려오고 있을 테지요.
그리고 우리 선산 아래 밭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있겠지요.
깨도 걷고, 콩도 걷고, 고구마도 캐었을 테지요.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돌아오신 아버지의 소원대로
바지게를 받쳐 두시고 정답게 저녁 기도를 드리고 계신지요?
저는 멀리서 종이라도 울려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안녕히 계셔요.
[t-07.07.31. 20230705-1509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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