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 인생수업」
[210606-141654-014]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일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이다.
여러 해 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우리의 워크숍에 참가한 40대 초반의 여성이 자신의 결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금요일 오후,
나는 혼자서 차를 몰고 시내 외곽 쪽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주말이라 고속도로가 붐볐지만, 어서 빨리 교외로 나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고속도로 중간쯤 갔을 때 앞서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나도 차를 정지한 뒤, 백미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내 뒤를 따라오던 차 한 대가 전혀 정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차는 전속력으로 돌진해 왔습니다.
그 차의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한눈을 팔았으며, 곧 내 차를 강하게 들이받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차의 속도, 그리고 내 차와 앞 차의 간격을 볼 때, 나는 아주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순간 나는 운전대를 움켜쥐고 있는 내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꽉 잡았던 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양손을 옆으로 내려놓았습니다.
운전대를 놔버린 것입니다.
삶에, 그리고 죽음에 순순히 나 자신을 맡겼습니다.
뒤이어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후, 사방이 고요해지고, 나는 눈을 떴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정했습니다.
내 앞에 있던 차는 박살이 났고, 뒤 차 역시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습니다.
내 차는 그 중간에서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내가 몸의 긴장을 푼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근육이 긴장하면 심한 부상을 입을 확률이 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단지 다치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것 이상의, 더 큰 의미를 지닌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꿀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손바닥 위에 부드러운 깃털이 놓인 것처럼 평화롭게 손을 편 채로도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문턱 가까이 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여성 역시 한 가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배움, 곧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배움입니다.
인간 모두의 깊은 내면에는 자신이 되기를 갈망하는 어떤 존재가 있습니다.
그 존재에 가까이 다가갈 떄,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배움을 얻으려하고 그 해답을 찾습니다.
두려움과 후회와 싸우고,
의미와 사랑과 용기를 추구하며, 상처와 상실, 덧없이 흘려가는 시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찾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려고 시도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나 종교, 신, 또는 그런 것들이 있다고 여기는 장소에서 해답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이들이 돈과 지위, 완벽한 직업 등에서 의미를 찾으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내 그런 것들에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들이 고통을 가져다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삶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길을 따르다 보면,
삶에 의미 따위는 없으며 행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지식이나 진리의 추구, 또는 창조적인 일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불행이나 죽음 앞에서 그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 배움들은 무엇일까요?
수십 년 동안, 죽음을 앞둔 이들과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을 치료하면서
우리는 인간에게 필요한 배움들이 결국은 누구에게나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두려움, 자기 비난, 화, 용서에 대한 배움입니다.
또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배움, 사랑과 관계에 대한 배움입니다.
놀이와 행복에 대한 배움들도 있습니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난 내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즐겁다."라고 누군가는 말했듯이,
삶의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입니다.
삶의 이 여행에서 우리가 맞붙어 싸워야 할 것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지만,
결코 우리가 감달할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환상과 행복의 실체를 배우고,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아나갈 것입니다.
또한 삶을 아름딥게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자신이 이미 갖고 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큰 상실감에 빠졌을때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고, 간직하고,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밖에서 행복을 찾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그 대신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삶의 의미와 진정한 부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직장이나 가족에 대한 좋은 소식, 월급 인상이나 휴가를 기다리면서 내일을 살지 않습니다.
'오늘'의 모든 풍요로움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슴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삶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수업과 같습니다.
그 수업들에서 우리는 사랑, 행복, 관계와 관련된 단순한 진리들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삶의 복잡성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흐르는 단순한 진리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런 사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대부분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두려움, 불안, 기대 심리가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자구라는 행성 위를 함께 걸어가고 있지만 우리들 각자는 외롭고,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때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더 많이 성장합니다.
조건이 가장 나쁠 떄, 오히려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배움을 통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삶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배움을 얻는 주채는 누구인가?
다시 말해, 나는 누구인가?
아마도 이것이 첫번째 질문이면서 가장 어려운 질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이 질문을 던집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경험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경험 자체인가, 경험하는 자인가?
나는 내가 자란 과정의 결과물인가?
나는 변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변화한 후에도 여전히 나인가?
아니면 돌에 박힌 화석처럼 변화할 수 없는가?
당신은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당신에게도 틀림없이 결점이 있겠지만 그것들이 당신은 아닙니다.
병에 걸렸을 수도 있지만 그 병이 당신은 아닙니다.
재산이 많을 수도 있찌만 당신의 은행 잔고가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은 결코 당신의 이력서, 배경, 성적, 실수, 육체, 역할, 직함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 안에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불변의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없어지거나 나이, 질병,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왔으며 죽을 때도 함께할 진정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놀랍게도 당신은 변함없이 당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시작과 끝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것일까?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단순한 진리가 드러나는 것일까?
그런 상황이 아니면 결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서도 그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궁극적인 배움입니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미 조각상이 대리석 안에 있다고 상상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어 원래 존재하던 것을 꺼내 주웠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완벽한 조각상이 누군가가 자신을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 안에 있는 위대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위대함의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가장 뛰어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들을 재거해 버렸을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현실에서 쓰고 있어야 하는 가면과 역할들에 가려져 있기가 쉽습니다.
부모, 회사원, 공동체의 리더, 아웃사이더, 모범생, 반항아,
아픈 부모를 돌보는 착한 아이등의 역할은 우리의 자아를 파묻는 바윗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그런 역활이 강요되기도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돼라',
'여자답게 행동하라',
'회사에서 승진하려면 유능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좋았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아."
결혼하기 전의 그들은 그 자신들이었지만,
결혼한 뒤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남편'과 '아내'의 역활을 떠맡으러고 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편과 아내가 어떠해야 하는지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그것에 맞춰 행동하려 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스스로 어떤 배우자가 되고 싶은가를 찾는 대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난 삼촌 노릇은 훌륭하게 해냈는데, 아빠 노릇을 하려니 정말 힘이 들어."
삼촌이었을 때는 아이들과 마음으로 교류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되자, 자신이 맡아야 할 특정한 역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역활이 그가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역할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크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그 대가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커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이 가정의 '관리자'에 불과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그들은 자신들이 사실 좋은 사람이지만 가족과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인간관계는 잘 풀릴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언제나 의견충돌과 실망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문제를 떠맡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버리지 못한다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자신이 되었을 떄 그동안 자기가 맡은 역할이 너무 무거웠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지금 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기쁘다'
또한 자신이 그동안 다른 이들을 속여 왔음을 깨닫습니다.
'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했다.
착하게 굴어서 다른 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면서.'
당신은 이제 자신이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또한 자신이 한 행동들의 근원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착하지 않다는 두려움,
천국에 못 갈 것이라는 두려움,
호감을 못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당신은 보상을 받기 위해 그 역할을 이용한 것입니다.
"난 언제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간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도 다른 이들과 아무 차이없는 한 사람의 인간일 뿐임을 깨닫는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모두 인정할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역할을 잃는 것이 슬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가까워지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본래의 당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늘 같은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늘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본래의 자신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들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할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환상일 뿐입니다.
거짓된 모습에 대한 환상을 버릴 때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정의 내리기 위해 타인을 살펴봅니다.
그래서 타인의 기분이 나쁘면 우리 자신도 실망합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런 방어를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건강하고, 완전하며,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인생의 시작에 있든 끝에 있든,
절정기에 있든 절망의 나락에 있든, 우리는 언제나 그 모든 상황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앓고 있는 병이나 직업이 아니라, 당신 자신일 뿐입니다.
삶이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
사람들은 때로 자신이 생각해온 것과는 다른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당황하곤 합니다.
우리가 병에 걸려 더 이상 은행원, 여행가, 의사,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날이 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만일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만일 당신이 사무실의 성실한 직원, 이기적인 삼촌, 헌신적인 이웃이 아니라면 당신은 누구인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하게 진실해지러면,
또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려면 일상적인 일에서 그것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입고 있는 옷에 이르기까지,
기쁨과 평화를 주는 것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의 눈에 가치 있게 보이려고 일한다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자신이 얼마나 붙잡혀 사는지 알면 놀랄 것입니다.
가끔씩은 억누르고 있던 충동에 몸을 맡기고, 이상하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무엇을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요.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누구인지,
또는 적어도 당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마이클 조던 같은 뛰어난 운동 선수도 아니지만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 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타고난 재능을 눈부시게 꽃피울 수 있습니다.
본래의 당신은 가장 순수한 사람이며 완전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바라로 나 자신이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나입니다.
자신의 본질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는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 해 전 나(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운 좋게도 시카고 의대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수로 뽑힌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수들에게는 매우 명예로운 일입니다.
교수라면 학생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을 받게 되었다는 발표가 나던 날, 다들 평상시와 다름없이 친절하게 나를 대했습니다.
하지만 상에 대해 언급하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미소 뒤에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아동 심리학자인 동료 교수가 멋진 꽃다발을 보내왔습니다.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이지만, 어쨌든 축하해요.'
그 순간부터 나는 이 남자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가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제나 할 수 있을 것이며, 내 곁에 있어도 안전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신에 가까워지려면 자신의 어두운 면과 결점에 대해서도 솔직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한 남자가 건강이 몹시 안 좋은 70대 후반의 자기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분을 보내 드리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난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했죠.
'할머니, 전 할머니를 보내 드릴 수 없어요.'
이기적으로 들리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게 내 진심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난 만족한단다.
내 삶은 멋지고 완벽했어.
더 이상 내 모습이 생기로 가득 차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난 이미 이 여행에서 많은 것을 누렸어.
삶이란 마치 파이와 같지.
부모님께 한 조각,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조각, 아이들에게 한 조각, 일에 한 조각,
그렇게 한 조각씩 떼어 주다 보면
삶이 끝날 떄쯤엔 자신을 위한 파이를 한 조각도 남겨 두지 못한 사람도 있단다.
그리고 처음에 자신이 어떤 파이였는지조차 모르지.
난 내가 어떤 파이였는지 알고 있단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알아내야 할 몫이지.
난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이 생을 떠날 수 있단다."
그 남자는 내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난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안다'라고 말씀하셨을 떄, 난 그분을 보내 드릴 수 있었어요.
그 말씀이그렇게 만든 거죠.
난 할머니에게, 내가 죽을 때쯤엔 나도 할머니처럼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어요.
할머니는 마치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어떤 파이인지 알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단다.'" (p36)
※ 이 글은 <인생수업 >의 일부를 필사한 것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 인생수업
역자 - 류시화
이레 - 2006.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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