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성장교육(인문.철학.교양.

떠날 때와 죽을 때 - 사랑이여, 그 영원한 생명이여

by 탄천사랑 2024. 3. 12.

·「김동길 - 떠날 때와 죽을 때」

 

 

 

사랑이여, 그 영원한 생명이여
넓고 깊은 사랑의 뜻
'사랑'하면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을 생각하게 마련이고, 또 그런 경향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가장 강렬하고 가누기 힘든 것이 이성 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종류를 따지자면 여러 가지가 있고, 
설사 뿌리는 하나라 하더라도 갈래는 여럿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낱말은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거기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또한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고 살기가 쉽습니다.
마치 우리가 공기를 호홉하고 물을 마시고 살면서도 그 고마움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자기의 목숨을 버립니다.
그것도 사랑은 사랑인데 아주 무서운 사랑입니다.
'나라 사랑'이란 말이 하도 많이 쓰여서 이제는 우리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어렵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천하게 들리기조차 하지만, 사랑 중에도 고결한 사랑이 나라 사랑입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 신념이나 결심 때문에 죽음의 길을 택한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기 위하여 어떤 고생도 사양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마침내 단두대에 오르거나 화형장에 나가 장작더미 불길 속에 타 죽으면서도
'심두멸각(心頭滅却) ​이니 불도 또한 시원하다'라고 읊을 수 있다면 참으로 놀라운 삶입니다.
그토록 큰 사랑을 가졌으므로 
순교자는 역사의 방향을 바로잡는 사람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어쨌건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힘 있고 고상한 감정이 사랑입니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한국어 대사전>에는 무려 164.125자가 수록되어 있다는데
그 가운데서 한자나 외래어를 다 빼면 순수 우리말이 74.612 자라고 합니다.
그 75.000자 가까운 낱말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낱말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어느 낱말을 고르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그 한마디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막상 '사랑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전에 보면, 사랑은 대략 셋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첫째 중히 여기어 정성과 힘을 다하는 마음,
둘째 애정에 끌리어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한 관계나 대상, 
셋째 일정한 사물을 즐기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한자로 표시하면, 애 (愛), 애정 (愛情), 애호(愛護)가 될 것입니다.

'애'는 애국자나 순교자의 사랑입니다.
'애정'은 핏줄끼리의 사랑 또는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애호'는 취미나 기호에 바탕한 사랑인데 그렇다고 업신여겨서는 안 될 귀중한 사랑입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즐겨 불러온 노래의 대부분이 사랑에 관한 노래입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도 사랑의 노래요 '목포의 눈물'도 사랑의 노래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모든 노래도 들어 보면 주제가 사랑입니다.
서양 사람들도 사랑을 노래의 주제로 삼는 것은 우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단테도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사랑을 가장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영국 시인 토머스 모어 (Thomas More)의 노래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 뜻을 따라 우리말로 옮겨 본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님이여 믿어 주오 변치 않을 이 마음을
내가 설레게 다정할 손 젊은 매력
마술사의 마술인 양 내일이면 사라져도
그대의 사랑스러움 가실 줄이 있으랴.
세월 따라 청춘이야 가는 것이나
젊음의 뒤안길 그 언저리에
내 진정소원마다 푸르르게 얽히오리.


이성에 대한 사랑이 고상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종교가 성 (性)에 바탕한 사랑을 미워하고 저주한다면 결코 올바른 종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건강한 아름다움을 무시하고는 참된 종교가 설자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스탠리 엥글바트 (Stanley Englebardt)라는 사람이 어떤 잡지에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글을 하나 발표했는데 매우 흥미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플로이다 어느 해변에서 30여 년 전에 여자(후에 그의 아내가 된 여자)를 한 번 만난 뒤에
그의 감관 (感官)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전에 없이 기운이 생겼고, 그날 만남에 관련된 꽃과 음악은 종전과 전혀 다르게 느껴졌답니다.
영어에도 '사랑에 빠진다(to fall in love)'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는 과연 그런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로 서로 만나지 않고 몇 달을 지내더니 
정말 견딜 수가 없을 만큼 기운도 빠지고 의욕도 없어져 또다시 만나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다.

이 두 사람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데,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랑은 사람의 과학적 연구만으로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신비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30년 전 그 해변가에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그중에는 자기의 아내가 된 그 여자보다 더 예쁘고 늘씬한 여성들이 수두룩했고 
오히려 미모에 있어서는 그 여자가 많이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 한 여자에게만 관심이 가고 
다른 여자들에게는 여자로서의 매력을 일절 느끼지 않게 되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식는다느니 사랑도 변한다느니 하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러나 참 사랑에는 식는 일도 없고 변하는 일도 없습니다.
아벨라르 (Abelard)가 엘로이즈 (Heloise)를 사랑하고, 
단테가 베아트리체 (Beatrice)를 사랑한 사실이 그런 사랑의 본보기같이 생각됩니다.

아널드 (Arnold, Matthew)라는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 사랑이여, 우리는 서로 진실합시다!
꿈의 나라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세상은
다양하고 아름답고 새로웁지만
진정한 기쁨도, 사랑도, 빛도, 확실성도, 평화도,
고통에 대한 도움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승화될수록 아름답습니다.
성욕이나 허영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춘기의 젊은이들이 
사랑에 대한 아무런 소양도 없이 불장난처럼 열을 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마땅한 믿을 만한 선배나 스승이나 부모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차차 나이가 먹으면서 
남녀를 막론하고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사랑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영국의 여류 시인 중 브라우닝 (Elizabeth Barrett Browning)이라는 훌륭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노래로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을 울려 주었습니다.

그대 진정 나를 사랑하거든 
사랑 그것 때문에만 사랑해 주오
lf thou must love me 
let it be for  naught except for ldve's sake only.


어찌하여 '사랑 그것 때문에만 사랑해야 하는가?
브라우닝은 그 논리를 이렇게 펴 나갑니다.

만일 웃는 모양이나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사랑한다거나, 
부드러운 말씨나 또는 두 사람의 생각이 잘 들어 맞아서,
혹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는 등등의 
무슨 조건 때문에 하는 사랑은 확실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브라우닝의 말은 그런 것들이 다 변해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랑한다는 상대의 그런 생각이나 느낌도 변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그런 사랑은 다 불안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룩된 사랑은 또 그렇게 식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그것 때문에만 사랑해 주오'라는 애절한 노래를 읊은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이 사랑의 전부는 아닙니다.
수십 년 전에 미국에 처음 가서 뉴욕이라는 큰 도시를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시청 앞에 동상이 하나 서 있기에 누구의 동상인가 하고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네이단 헤일 (Natan Hale)로 예일대학을 갓 나온 21세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워싱턴 장군의 휘하 군대에 뛰어들어
첩보장교가 되어 영국군의 배후에 침투하여 활약하다가 불행히도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영국군이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였지만, 
그는 워싱턴군의 비밀을 하나도 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금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라 사랑의 애끓는 정성 때문에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사형이 확정되어 이를 집행하기에 앞서, 
남기고 싶은 말이 없는가고 물었을 때 다음 한마디를 남겼답니다.

"나는 내가 내 조국을 위해 버릴 수 있는 목숨이 하나뿐임을 유감스럽게 여길 따름이다
  (l only regret that l have but one life to love for my country)"

그가 남긴 이 마지막 말이 그의 동상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하는 
시조 한 수를 남기고 선죽교에서 철퇴에 맞아 쓰러진 
정몽주의 정신이 바로 그런 정신 아니겠습니까?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믿습니다.


사랑으로 만나는 진정한 의미.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결합이라는 말의 뜻은, 이념을 같이하는 남녀가 
어떤 사업이나 혹은 목표가 뚜렷한 혁명 같은 것을 위해 서로 얽힌다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은 성 (性)입니다.
간혹 변태성욕자들이 나타나 동성끼리의 결합을 정당화하려 들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결혼은 이성 (異性) 간에만 성립되는 인간관계입니다.

내 집작에, 
결혼이란 말은 일본 사람들의 영향 때문에 우리 언어생활에 정착한 낱말인 듯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결혼이란 말 대신에 혼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지금도 결혼식이 끝나고 동회나 구청에 제출하는 서류의 명목이 
'결혼 신고서'가 아니고 '혼인 신고서'입니다.

결혼이라 하건 혼인이라 하건 
문제는 '혼 (婚)'이라는 이 한 글자에 모든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 한자는 '계집 녀 (女)' 변에 '날 저물 혼 (昏)'인데,
아마도 날이 저물고 나서 남자와 여자가 공공연한 비밀처럼 만나는 것으로 
혼인의 첫날밤이 깊어갔던 것이리라.

남자와 여자가 남자와 여자로서 만나 가질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이었을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산업화된 사회에서도 
성은 날이 저물고 나서의 일이라는 관념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창굴도 낮에는 한가하겠지.
홍등가란 말이 언제부터 쓰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등을 켜야 하는 밤 시간이 돼야 영업이 시작됩니다.

농경시대에는 더 했을 것 아닌가?
새벽에 일어나면 밭에 나가야지 
남편과 아내가 한자리에서 뒹굴며 누웠을 시간적 여유인들 있었겠는가!
온종일 밭 갈고 김매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면 해는 이미 저물었을 것입니다.

정말 혼인은 그 시간부터였으리라.
내외가 방을 따로 쓸 수도 없는 처지였으니, 
부모가 잠들기를, 
아이들이 잠들기를, 
때로는 할머니-할아버지마저도 곤히 잠들기를 기다려야 했던 
젊은 부부의 사정이 매우 딱한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선인들의 성생활에 불가결의 요소이어서 
특히 동양인의 체격이 왜소하고 그 기상이 활달치 못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성을 어두울 때로 국한시키고, 
이를 잠자는 것과 결부시킨 사실은 결혼의 핵심을 파헤치는 일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줍니다.

우리말이나 일본 말에서뿐 아니라 영어에서도 남녀의 성행위에는 '잔다'라는 말로 대신하는데,
영양이 충분치 못했던 그 시대에는 '성'이 끝난 뒤의 휴식이나 안정이 절대 필요했을 것입니다.
밭 갈다 말고, 김매다 말고, 
모내기하다 말고 우리 조상들이 밝은 태양 아래서 성을 즐겼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그러다간 정말 농사도 못 짓고 저승길을 가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성이야말로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낭비하고는 도저히 맡은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결혼식만 보고 결혼의 실질적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신랑이 목욕재계한 깨끗한 몸으로 새 옷 맞춰 입고 
새 구두 사 신고 이발하고 머리에 기름 바르고 의젓하게 서서 
신부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보고는 결혼이 무엇인지 알 갈이 없습니다.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천사처럼 걸치고 
머리에 면사포 쓰고 신부화장 곱게 하고 꽃다발 끼고 사뿐사뿐 신랑 서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만 보고 결혼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것은 다 눈 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혼의 알맹이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경주로 해운대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간다지만,
그렇게 낭만적으로 추억할 만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니 꿈이니 하면서, 
저 자신도 모르는 소리를 뇌까리면서, 
화려하게 장식한 결혼의 문을 열고 들어서지만 
십중팔구 결혼은 그런 낭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꼬집어 말하자면, 
결혼은 인류의 존속을 희망하는 신의 뜻에 대한 순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들과 딸을 낳는 일이 결혼의 최대 사명임을 잊지 말기를!



※ 이 글은 <떠날 때와 죽을 때>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김동길 - 떠날 때와 죽을 때
자유문학사 - 1995. 12. 01.

 [t-24.03.12.  20240310-15542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