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앞 편집부 - 인생의 가장 행복한 반시간」
[190617-172650]
내 나이 22세 때 일본 유학시절이었다.
봄철 기후가 명랑한 날이었다.
스키치 박스를 메고 도야마가하라에 사생을 나갔다.
서가를 버티어 놓고 그림을 그리기에 열중하다가 곁눈으로 보니까
왠 텁수룩하고도 끌밋하게 잘생긴 청년이 정신없이 서서 오랫동안 보고 있다.
나는 한참 그리다가 배가 고프기에 옆에 놓았던 도시락을 가지고 저편 언덕으로 갔다.
그 청년은 돌아서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보고 내가 그 자리를 떠나도 가지를 않고 서 있다.
나는 도시락을 먹으며 멀리서 그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내 편으로 뒤를 두고 무엇을 들여다보고 한참 않았더니 일어서서 내 편을 한번 보고 가버린다.
나는 도시락을 다 먹고 잠깐 서성거리다가 다시 그리려고 그 자리로 왔다.
닫혔던 스케치 박스를 열어젖히려 할 때 무슨 종잇조각 한 장이 끼여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집어보니 훌륭한 일장 편지이었다.
- 아, 오늘 하늘빛은 예없이 곱고 날씨조차 따뜻한 날, 넓은 벌판에 한 선녀가 서 있습니다.
내가 왜 만돌린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던고!
당신의 그림 옆에서 한 곡조 울렸으면 곧 별유천지가 되었겠는걸. 당신의 그림은 매우 유망하외다.
많이 정진하시오.
나를 다시 만나보실 마음이 계시거든 오는 일요일에 富土見町敎會로 와주십쇼.
N 生 -
나는 혼자 깔깔 웃었다.
그러나 단순하던 머리는 복잡해져서 전과 같이 그림이 그러지지를 아니하였다.
돌아와서 그 편지를 다시 보고 다시 보며, 그 글씨, 문구, 그 사람 심리를 생각해 보았다.
불량자다.
그러나 교인이라니 그렇지도 않다.
연필로 썼으나 명필이니 대학 정도다.
그림을 아는 체했으니 화가인가 보다.
그 일요일에 오라는 교회까지 갈 열정과 용기가 없었으나 그날은 유난히 길었다.
하루 지나고 이틀 가고 하는 동안 흐지부지 잊어버렸다.
그해 여름이었다.
나는 해수욕을 하러 방주로 갔었다.
선생의 친구집에 있었다.
주인 딸이 자기 사돈 집에 청년 화가가 와 있는데 소개를 하겠다 하고 데릴러 간다.
조금 있다가 동경음악학교에 다니다가 돌아 온 사촌형과 청년 한 사람이 들어온다.
"나는 나카무라라 합니다.
많이 사랑해 줍쇼"하며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깜짝 놀라 반색을 하며,
"올봄 어느 날 도야마가하라에서 스케치하셨지요?" 한다.
"네"하고 아무 말 없는 나는 대강 짐작하였다.
그 후 네 사람은 늘 함께 달밝은 밤 해변가에 산보도 하고 가까운 섬까지 선유도 하였다.
N은 때때로 내게 윙크를 보냈다.
그러나 모른 체할 뿐이었다.
N은 얼마 아니되어 먼저 동경으로 갔다.
하루는 주인 사촌집에서 하인이 와서 동경서 전화가 왔으니 곧 오라고 한다.
나는 갔다.
전화를 받았다.
"K이요?
나는 N이요. 보고 싶으니 얼른 돌아오오"
그 말만 하고 딱 끊는다.
나는 아무 영문없이 웬셈인지 몰랐다.
주인 영감은, 'N에게서 무슨 전화야?'하고 눈을 딱 부릅뜨고 주인집에서는 수군수군하였다.
나는 그를 원망할 뿐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개학 때가 되어 동경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동창생이 올라오며, 어느 청년이 와서 나에게 면회를 청한다고 한다.
내려갔다.
거기에는 N청년이 와서 있었다.
"돌아오셨소?"
"네! 그런데 이렇게 찾아주지를 말아요."
"그러면 할 말이 좀 있으니 하학 후 돌아갈 때 들려주십쇼"
주소를 가르쳐준다.
오후에 돌아가는 길에 들렸다.
N은 과자와 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와하였다.
과자와 차를 권하면서,
"K, 나하고 결혼해 주지 않겠소?"
"못해요"
"왜요? 내가 일본사람이라고 그래요?
내가 조선사람이 되면 될 것 아니야요?
나도 문별도 있고,
상속할 재산도 있고, 결혼하자는 여자도 있지만 다 버리고 K를 따르고 싶어요.
네? K, 결혼해 주어요."
그는 내 손을 붙잡고 부르르 떨었다.
"안돼요."
나는 이렇게 거절하고 돌아왔다.
어느 날 우리 오빠 하숙에 N이 나타나 면회를 청하였다.
오빠는 만나보았다.
"나는 나카무라라 합니다. 많이 사랑해 주십쇼"
"네, K子에게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청할 것이 하나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K와 나와 결혼하도록 하여주십쇼."
"그것은 날더러 말할 것이 아니라 K子에게 말씀해 보시오"
그는 다시 할 말이 없이 돌아갔다.
어느 날 황혼이었다.
나는 省線을 타고 나가노역에서 내렸다.
컴컴한 곳에 어느 청년이 섰다가 불쑥 나서며,
"おかえり(돌아오시오)?"
"이게 왠일입니까?"
"당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K, 일전에 내가 청해던 말 생각해 보았소?"
"생각할 여지가 없어요"
"왜요?"
"그럴 수가 없어요."
"왜요?"
"그럴 수가 없어요." 돌아설 때 그는 품에서 무엇을 꺼냈다.
"너 죽이고 나 죽자!" 번쩍하는 단도였다.
"아이구머니나!"
나는 악을 쓰고 달아났다.
그는 쫓아오지 아니하고 말뚝같이 서 있었다.
그 후 <白樺> 잡지에 난 'K子에게'라는 제목으로, 얼마나 자기가 K를 사랑한다는 것을 명문으로 썼다.
어느 잡지사에서 이것을 발견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 후 8년 만에 文房堂 畵具店에를 갔다가 우연히 N을 만났다.
"재미가 어떠십니까?"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실심해하며.
"나는 그동안 장가를 들었다가 이혼을 했어요. K. 지금은 딴 사람의 妻이지?" 하고 눈을 감는다.
두 사람은 악수로 작별한 후, 해마다 되풀이되는 帝展入選發表 신문 지상에서,
그의 이름이 눈에 뛸 때도 있고 눈에 띄지 않을 때도 있다.
이상한 편지 한 장이 이렇게 인연이 깊을 줄이야. (P222)
※ 이 글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반시간>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풀앞 편집부 - 인생의 가장 행복한 반시간
도서출판 풀잎 - 1990.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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