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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 이어령

by 탄천사랑 2024. 5. 17.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

 

 

 

제3부/27.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모든 짐승은 사람을 피하는데 제비는 왜 인간이 사는 집안에 집을 짓고 사나.
인간을 믿는 제비의 마음 때문에 인간은 제비를 해하지 않는다.

왜 제비만은 사람을 믿고 날 잡아먹으라는 듯 사람들이 사는 집에 집을 지을까요?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천적들이 덤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의문을 품는 자는 도망가고, 
믿는 자는 인간의 보호를 받는 것인데, 과학은 이런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목사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믿고 안심하고 잡아먹힐 각오를 하고 제일 가까운 안채에 떡하니 집을 짓는 것이지요. 
사람을 믿고 와서 둥지를 트는데 어떻게 잡아먹겠습니까?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지성과 영성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의심 속에서, 끝없는 의문 속에서 지성은 커집니다. 
하지만 참새나 독사, 까마귀처럼 사람 집에 집 짓는 슬기와 섭리는 얻지 못합니다. 
제비처럼 믿어야만, 
인간의 힘을 빌려 다른 짐승들을 퇴치하고 자식들이 편안하게 살 집을 짓듯이, 
그렇게 믿어야 평화를 얻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발이 부러져도 흥부가 와서 치료해 주었거든요. 
제비가 사람 사는 집에 둥지를 트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하나님 집에 굳건한 믿음을 갖고 집을 지어놓으면 해로운 것들이 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알을 낳으면 하나님의 섭리대로 먹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시편 84장 3절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하물며 인간이 제단 옆에 둥지를 틀지 않겠습니까?
시편을 다시 보면, 
'제단 옆에 제비처럼 믿고 둥지를 틀면 독사도 까마귀도 독수리도 오지 못한다. 
 내 알은 틀림없이 부화할 것이고 내 새끼는 하늘을 나는 날개를 얻을 수 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8장 7장을 보세요.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흥부는 제비가 복바가지씨를 물어다 줄 것을 생각하고 도와준 것이 아니지요. 
불쌍해서 딱해서 도와준 것이지요. 
그것을 '바이오필이어(생명에 대한 사랑)'라는 생명계의 보편적 감정이지요. 
흥부를 성경 속에 옮길 수 있어요.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제비는 정확히 봄이 됐을 때 제일 먼저 날아옵니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오면 봄이 오는 겁니다. 
이렇게 신의를 지키는 것이지요. 
하지만 너는 제비만도 못하다. 
제비는 때를 알아서 정해진 때에 오는데, 너는 왜 때가 됐는데도 오지 않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아, 
한국 백성들아, 때를 알고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 
가장 흔한 법을 지키는 것도 못하느냐,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시편,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제비는 우리에게 귀한 박을 물어다 줍니다. 
이것이 지성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성의 세계에서 얻는 선물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제비 자체가 영성, 하나님, 육체를 가진 예수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제비가 "콘솔, 콘솔"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콘솔은 울음소리의 의태어입니다. 
위로한다는 뜻으로 제비울음소리를 나타낸 의성어지요. 

'걱정 마라, 걱정 마라.' 부활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권에서 제비는 비둘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서양에서는 제비는 갈증, 굶주림의 상징입니다. 
제비 새끼들이 먹는 것을 보십시오. 
어미가 오면 막무가내로 입을 벌립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고 목마르면 그렇게 계속 보채는 것일까요. 
'스왈로우 swallow'가 동사로 쓰이면 '마시다' '먹다'가 되어서 자연히 제비 하면 굶주림과 갈증이 연상됩니다. 
그 갈증과 굶주림을 모르면 영성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막처럼 척박한 환경에서의 굶주림과 갈증이 정신적으로 승화된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성서는 일관해서 가장 굶주린 단계인 배고픔부터 가르쳐주고, 
거기에서 나아가 또 다른 배고픔과 갈증을 가르쳐주고, 
마지막에는 영성에 도달하는 갈증을 가르쳐줍니다. 

내가 성서에서 발견한 것은 갈증과 굶주림이 영성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갈증과 굶주림은 지적인 것이었지만, 
영적인 굶주림과 갈증은 누가 채우고 풀어주는가, 
백과사전이나, 내 서가에 있는 책들이 풀어줄 수 있는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사실 구약은 시편 말고는 잘 읽지 않고 신약만 읽던 사람인데, 
알고 보니 신구약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구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원수를 대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25장 21절을 보십시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구약이든 신약이든 생명에 관한 한 원수에게라도 사랑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영성을 위해 배고파하는 사람에게는 빵을 주고 목말라하는 자에게는 물을 주라는 말과 통하는 것입니다. 
원수라 할지라도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면,  먹을 것을 또 찾습니다. 
그건 이미 육체의 배고픔이 아니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으려는 영혼의 갈증, 
영혼의 굶주림이지요.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먹을 것을 넘어서,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까지 내놓는 단계까지 가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그 단계가 아주 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옛 언약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왜 이런 사막으로 우릴 끌어 왔으냐, 
우리에게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을 약속해 놓고 목말라 죽는 이런 곳에 왜 왔느냐고 들고일어납니다. 
그때 모세는 기도를 드립니다. 
살려달라고. 그러자 
'그 지팡이로 바위를 쳐라, 그럼 물을 얻으리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믿지 않고 의심부터 합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보이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믿게 하려 하는데, 
그래도 정 급하면 기적을 보여주시지요. 
하나님도 참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셨을 겁니다. 
그렇게 모세가 바위를 치니 진짜로 물이 솟아나오고, 
그제야 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와, 이거 진짜로구나' 하고 모세를 따르게 되지요. 

그때 그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이 바로 생명수인데, 
여러분은 물론 모세가 아니지만, 
완전한 절망 속에서 문을 두드리면 바위가 깨지면서 생명수가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실로 갈증과 배고픔이 없으면 영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서에 빵 이야기, 
물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p211)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
열림원 -  2010. 05. 13.

[t-24.05.17.  20240516-172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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