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 - 2023. 9~10. Vol. 233」
동부간선도로
이찬재, 안경자 부부
"SNS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젊은 친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좀 가볍게 살면 어때요.
늘 무게만 잡고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남기기 위해 일기장을 펴는 대신 SNS 앱을 연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쓰는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간 짤막한 글에
해시태그까지 달아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80대의 나이에 '좋아요' 세례 속에 푹 빠져 사는 이찬재, 안경자 부부를 만났다.
하루 한 장씩 남기는 취미 일기
1942년 동갑내기 교사 부부 이찬재 씨와 안경자 씨는 결혼 14년째 되던 해에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1981년 열 살배기 아들과 여섯 살 난 딸을 데리고 브라질로 이민을 갔어요.
친정 부모님이 먼저 가 계셨거든요.
가족이 기반을 잡아둔 상태였기에 어려울 것도 없겠다,
새로운 세상을 만날 기회라고 생각하고 가게 된 거죠."
말은 그랬지만, 새로운 땅에서 삶을 가꾼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
고단했던 시간들이 그럼에도 다정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알뚤과 알란,
두 손주 덕분이었다.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일을 했죠.
그러는 동안 아들은 자신의 꿈을 찾아 뉴욕 유학길에 올랐고,
딸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요.
그 즈음엔 저희가 가업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기에 손주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맞벌이하는 딸네 부부를 대신해 손주들을 매일 차로 등하교 시키며
등교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이들의 일상은 언제나 사랑과 웃음으로 북적거렸다.
그런 두 사람의 일상은 딸네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하루아침에 고요해졌다.
부부가 'SNS'라는, 어쩌면 브라질보다 더 낯선 세계를 만나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멍하게 보냈던 것 같아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아들이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죠.
아들이 어릴 적에 제가 그림엽서를 그려준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처음엔 무슨 그림이냐며 손사래를 쳤어요."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을 새로운 취미로 채워보라는 아들의 성화에 찬재 씨는 두 손을 들었다.
스케치북과 펜을 들고 공원에 나가 그림을 그렸더니 이번에는 SNS에 올려보라는 거다.
온라인으로 남기는 그림 일기장이라나 뭐라나.
"인스타그램이라는 데에 그림을 올리래요.
처음엔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서 싫다고 했어요.
그런데 일기를 쓴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올려보면 추억이 될 거라는 말에 그러겠노라 했죠."
그렇게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만들었던 계정이 훗날 40만 팔로워를 거느리게 되고
유명한 계정에만 붙는다는 파란 배지를 받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미래를 향해 보내는 편지
80대 어르신이 SNS를 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가장 어려웠을까.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고 등록하는 일련의 '게시' 과정일 거라 예상했지만,
이들은 뜻밖의 단계에서 애를 먹었단다.
"수채화는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느낌의 그림이잖아요.
그런데 그림을 카메라로 찍으니 질감이 사라지고 밋밋해지더라고요"라는 경자 씨의 말에
찬재 씨가 맞장구를 쳤다.
"제일 어려운 게 사진 찍는 거예요.
무작정 밝은 곳에서 찍어야 하나 싶어서 백화점 같이 아주 환한 곳에 그림을 들고 가 찍기도 했죠.
그림의 느낌을 담아내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찬재 씨의 계정에 손주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쌓이게 된 데도 아들의 역할이 켰다.
어린 손주를 안고 무심결에 뱉은 말이 아들의 가슴에 콕 박혔던 것.
"손주를 보고 있으니 문득
'이 아이가 크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텐데, 그때 이 녀석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아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남겨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어요."
찬재 씨가 그림을 그리면 경자 씨가 글을 붙였다.
한국말이 서툰 손주들을 위해 아들과 딸이 각각 영어와 포르투갈어로 번역을 했는데,
그 덕분에 이들의 마음이 전 세계 아들, 딸 그리고 손주들에게 닿았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든 지도 어느 덧 8년.
이제는 전 세계의 40만 손주들에게 편지를 띄우고 있다.
그러는 동안 SNS를 좀 더 잘 운영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요즘에는 해시태그를 좀 덜 써요.
처음에는 계시 글마다 '#수채화' '#편지' 같은 해시태그를 꼭 붙였는데
그게 오히려 우리의 감성을 해치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보니 해시태그를 좀 덜어내는 게 트렌드 같기도 하고요."라는
경자 씨의 이야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듣는 찬제 씨.
이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인플루언서'였다.
SNS라는 여전히 흥미로운 세상
부부는 5년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손주들의 말에 약 40년에 가까운 부라질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완전체 가족이 된 이들은 얼마 전 또 새로운 세상에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딸이 보여준 신문물, '틱톡'이었다.
"한국에 귀국하고 얼마 안 있어 코로나 19가 터지는 바람에 꼼짝없이 집에만 있게 됐어요.
심심하던 차에 딸이 재미있는 영상이 잇다며 보여주더라고요.
아마 '지코'의 아무 노래 챌린지 였을 거예요.
어린 친구들이 심취해서 춤을 추는데, 그게 이상하지가 않더라고요
같이 해보자는 딸의 말에 춤을 배웠는데,
우리 모습이 우스워 한참 깔깔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간단한 동작인데도 운동을 하듯 힘들었고,
동작을 외우는 과정에서 치매 예방도 되는 것 같아 괜히 으쓱해졌다.
젊은 친구들을 쫓아가다 보니 정말 젊어지는구나 싶었단다.
젊은 사람들은 말한다.
트로트 가락은 다 비슷하다고.
반대로 어른들은 요즘 노래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어른들의 문화는 고루한 것이고, 어른들에게 요즘 문화는 가벼운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벽 너머에 두고 바라볼 땐 도무지 서로를 이해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다르다.
두 사람에게는 '에이, 내가 무슨, 이건 젊은 애들이나 하는 거지.'라는 게 없다.
못 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그냥 한번 해보는 거란다.
"SNS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젊은 친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좀 가볍게 살면 어때요.
늘 무게만 잡고 있으면 재미없잖아요."라는 말을 끝으로
"요즘은 스우파(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챙겨 보고 있어요.
헤이 마마(Hey mama) 챌린지도 했었거든요."라는 경자 씨.
도무지 80대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래와의 즐거운 수다처럼, 이 대화가 끝이 나는 게 아쉽게만 느껴졌다. (p15)
writing - 조수빈
photo - 안호성
동부간선도로 [t-23.11.08. 20231107-08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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