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국회 도서관 2023. 7+8 I Vol.512」
서편제 공연중 이자람 (중앙일보에서)
인터뷰 - 이자람 공연예술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멀티테이너’라는 말이 더는 낯설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오래된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이들의 존재감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자람은 그런 보석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리꾼부터 가수, 기타리스트, 배우, 영화음악 작곡가, 현대무용가 그리고 작가 등 수식어가 너무도
많은 이자람을 만났다. 무엇으로 불리든 익숙함과 낯선 사이,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감행하는 실험과 탐구,
그 속에 깃든 치열한 자기 성장에 대한 고민은 여전했다
지난해 수필집 『오늘도 자람』을 출간하셨어요. 첫 수필집에 어떤 내용을 담고 싶었나요?
코로나 시기에 공연들이 멈추는 것을 겪으며 제가 스스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제 작업들이 아무도 모르게 순간의 예술로만 존재하다가 소멸될 수 있겠다 감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보신 출판사 관계자가 책을 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고 그렇게 지난해 책을 냈습니다.
보고 있으면 참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건 다른 일들, 이를테면 소리를 하거나 연기를 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 일이었나요?
다른 일들은 그 순간에 그저 몰입하면 돼요.
무대에 서든 공연을 하든 말이죠.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보여줄 언어를 고를 줄 알아야 해요.
이미 쓰여진 각본이나 가사가 있는 다른 일들에는 없는, 글쓰기만의 고유하고도 독특한 과정이죠.
어릴 때부터 나름 글을 써와서 익숙한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독자가 ‘나’로 특정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글쓰기는 또 아주 달랐어요.
‘이자람’을 검색하다 보니 재미있는 기록이 나오더군요. 미처 몰랐어요. 기네스 세계기록 보유자란 걸요.
제가 동초제 춘향가를 배웠는데 그게 8시간이나 되는 가장 긴 판본이거든요.
저는 그저 제가 사사한 춘향가를 완창했을 뿐인데, 8시간이 나왔어요.
아버지가 이건 분명 기네스 세계기록감이라며 영국 기네스협회에 연락하셨지요.
심사를 거쳐 1999년 ‘최연소 최장 시간’ 춘향가 완창으로 세계기네스북에 올랐어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한때 기네스 세계기록 보유자였지, 지금은 아니에요.
제 기록을 깬 새로운 기록 보유자가 나타났거든요.
소리꾼, 명창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로 변신하셨더군요.
스펙트럼을 넘나들며 도전하는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도전의 원동력이라…… 글쎄요.
그런 건 딱히 없는 것 같은데요? 저는 하고 싶으면 해요.
흥하든 망하든 일단 해요.
국악고등학교를 다니다 서울대에 입학해 제일 먼저 한 일이 메아리라는 동아리에 가입한 것이었어요.
동아리에서 기타를 배웠고 기타 연주가 참 재미있었어요.
내 안의 마그마 같은 에너지를 분출하기에 아주 적합했다고 할까요(웃음).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인디밴드에 대한 꿈을 동아리 활동으로 실현하게 된 거죠.
‘마침내’.
밴드 활동 외에도 라디오 방송 DJ, 가야금 연주자, 기타리스트, 영화 OST 작곡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오셨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지만, 그래도 가장 나답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판소리할 때가 아닐까요.
가장 많은 분들이 알고, 또 기억하는 모습이기도 하고요.
어릴 때부터 입어와 어느덧 몸에 꼭 맞는 편안한 맞춤복이 된 직업이기도 해요.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 싶어 ‘소리’가 그리울 때도 있어요.
그때는 귀소본능을 느끼는 연어처럼 다시 ‘소리’로 돌아가기도 하지요.
목소리가 무기이자 악기인 만큼 관리에 만전을 기할 것 같아요.
한결같은 소리를 유지하는 비법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저는 ‘몸’이 재산 목록 1호라고 생각해요.
몸이라는 건 결국 컨디션이고, 또 컨디션은 마음과 떼려야 뗄 수 없거든요.
컨디션 관리를 위해 제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잠이에요.
하는 일이 많은데, 잠도 많이 자야죠.
박사 논문을 쓰면서도 잠을 줄인 적은 없어요.
잠을 줄이면 죽는다는 각오로 숙면을 사수했다고 할까요(웃음).
올봄에는 연극 <오셀로>의 ‘에밀리아’로 관객들을 만났죠.
아주 오랜만에 선 연극무대라고 들었는데 어땠나요?
박사 논문과의 사투를 끝내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려는 사이 제안이 들어왔어요.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기념작이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인 <오셀로>였죠.
질투로 인해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인데
제가 맡은 역은 갈등의 축이 되는 손수건을 전달하는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였어요.
오랜기간 연극을 해오신 배우분들께 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과
동시에 ‘연기’를 너무 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연기를 너무 잘해서는 안 된다. 그건 어떤 의미일까요?
무대에서는 그저 에밀리아로 보여야지, 이자람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다행히 제가 출연한다는 말을 듣고 연극을 본 친구가 다 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연극 정말 좋았어.
그런데 넌 대체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 거야?”
순간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육중한 추가 사라지는 듯한 개운함을 느꼈어요.
‘이제 됐다!’ 싶었거든요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다 보니,
어쩌면 스스로를 새로운 한계 상황에 자꾸 몰아넣고, 이걸 깨고 넘을 수 있나 시험해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최근 계속 그 생각을 해요.
난 왜 이렇게 살까.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곳에 깊숙하게 일원으로 소속되는 경험이 저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줘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되는 거죠.
밴드도 똑같아요.
저희 밴드가 단독 공연을 한다고 해도 사람 몇 안 와요(웃음).
솔드아웃은 커녕, 큰 공연장 빌리면 관객을 못 채울까 봐 걱정하는 그런 밴드예요.
그래서 뭐든 더 열심히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늘 그런 마음이라서.
왕성한 독서가로도 알고 있어요. 주로 언제, 어떤 책을 읽으시나요?
독서를 위해 정해 놓은 시간은 없어요.
정해 놓은 책도 없고요.
손에 잡히면, 시간이 나면, 언제든 읽고 싶은 책을 읽어요.
책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삶에 대한 태도를 반추해 보기도 하는 거죠.
책을 읽는 목적은 없지만 책을 읽고 난 후 생긴 변화는 있는 셈이에요.
최근 무대에 올린 창작극 <이방인의 노래>도 유명 소설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 들었습니다.
네.
오래전 읽고 감명을 느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집 『이방의 순례자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에요.
처음 그 단편을 읽었을 때 너무 좋아 읽자마자 잠을 잤어요.
책을 읽고 잠을 잤다는 건 그만큼 그 감동을 품에 꼭 안고 싶었다는 말이거든요.
잠에서 깨자마자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저 이 소설, 꼭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그렇게 외국 문학이 현대적인 판소리로 재탄생하게 된 거죠.
소설의 어떤 점이 와닿았고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언가요?
소설은 고향이 동일한 세 사람,
전직 대통령과 라사라와 오메로 부부가 제네바라는 타지에서 우연히 만나며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사이였던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대면하면서,
각자가 가졌던 오해와 미움이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의’로 변화하며 벌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메시지를 전달한다기보다 그들이 만나는 과정을 최선을 다해 잘 전달해보고 싶습니다.
다들 어디론가 떠나는 휴가철인데 어떤 계획이 있나요? 여행에 동행할 책은 뭘까요?
삿포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어요.
세세하게 여행 계획을 짜는 편이 아니라 가고 싶은 온천만 찾아 놓고 나머지는 공란으로 비워 뒀어요.
가서 채우면 되니까요.
책은 알짜배기로 딱 한두 권만 가져갈 생각이에요.
박완서 선생님 책과 폴란드 작가인 올가토카르추크의 책을 가져갈까 해요.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면서,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그 글들과 느리게 호흡해볼까 해요.
수필집 표지에 ‘매일의 나는 다르고, 그 다름은 내가 된다’고 적혀 있더군요.
앞으로도 매일 달라질 계획인가요?매일의 나는 다르고, 그 다름은 또 다른 나예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 서서히 쌓이며 결국 내가 돼요.
<이방인의 노래>만 해도 그래요.
2014년에 초연했던 때 이 작품을 하고 싶었던 이유와 지금의 이유가 달라요.
동기가 달라진 걸까요?
연출과 어느 것이 맞는지 얘기를 좀 나눠봐야겠어요(웃음).
저는 포기하고 또 재건하는 수많은 과정을 통해 하루를 쌓고 저를 쌓아요.
언제나 느슨하지 않은 시선과 호흡으로 관객에게 전해줄 파동의 헤르츠를 조절하고 있고요.
앞으로도 이렇게 현미경처럼 바라보는 순간들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삶의 조각들을 기분 좋게 이어가고 싶어요
이자람공연예술가
숨 쉬는 판소리, 판소리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서 온 천상 ‘소리꾼’이다.
서울대 국악과 재학시절에는 국악뮤지컬집단 ‘타루’를 이끌었으며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리드보컬이자 기타리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라디오 DJ, 작곡가, 각본가, 연극배우 등으로보폭 넓은 활동 영역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천가>, <노인과 바다>, <이방인의 노래> 등 작품마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끌어내고 있다.
지난해 그간 기록한 단상들을 모은 첫 수필집 『오늘도 자람』을 펴냈다
글 - 임지영
사진 - 완성플레이그라운드
출처 - 월간 국회 도서관 2023. 7+8 I Vol.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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