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국회도서관 - 2023. 06. Vol.511」
책이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어항을 관리하며 알게 된 것
어느덧 물 생활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처음 물고기를 키우기 시작했을 때는 물고기 키우는 사람들을 가리켜
‘물 생활’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좀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관상용 물고기’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물고기를 키운다는 것은 그저 소박하고 소극적인 취미일 뿐인데
그걸 두고 생활이라 부른다는 것이 좀 겸연쩍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물속에 들어가서 사는 것도 아닌데 물 생활이라니,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들이 자신의 취미를 과장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장난스러운 표현이 아닐까 괜히 의심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물 생활 6개월 차에 접어든 지금,
나는 물고기 키우며 경험하는 이 모든 것을 물 생활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느낀다.
물고기를 키운다는 것은 다만 그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인 물속에서 ‘생활’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내 어항에 있는 금붕어는 한 마리이고, 이름은 ‘일레븐’이다.
이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열 마리의 금붕어가 죽었다.
열 마리 중 어떤 금붕어에게도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지만,
이 금붕어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부를 때마다 지난 열 마리를 떠올리며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그들과 일레븐 사이에는 나의 물 생활 적응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물고기는 예민하다.
특히 온도에 무척 예민하다.
산소와 수온의 조절을 적절하게 유지하지 못해 물고기들이 죽어갈 때
내가 느낀 것은 완전한 무력감이었다.
물고기들이 어딘가 이상한 모습을 보여도 내가 직접적으로 물고기에게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살고 있는 물속 환경을 조금 더 낫게 만들어 주는 묵묵한 실천들뿐이었다.
금붕어의 연속된 죽음을 보며 공포에 빠져 있던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일레븐은 오랫동안 꽤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다.
수온 조절, 산소 투입을 비롯해 수초들과 물속의 청소부라고 불리는 다슬기까지 넣어 준 뒤로
활동량이 훨씬 많아진 게 눈으로도 보인다.
요즘 나는 거의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우주에 투입된 특공대의 마음으로 내 어항 속 수질을 관리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기후 위기를 비롯해 환경을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거대한 비유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온도가 급격하게 변하지 않게 신경 쓰고,
수질오염을 일으키는 물질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 되는 수초를 심는다.
급격한 환경 변화는 물고기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물은 20% 정도씩 자주 갈아주는 것 또한,
한 번에 모든 것이 바뀌는 게 아니라 안과 밖이 언제나 섞이는 구조를 만드는 중요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의 많은 것들이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많은 문제들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꿈을 찾고 그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 그렇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또한 그렇다.
특정한 사건이나 특정한 해결 방식에 있어 어느 한 가지가 열쇠가 되어 주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우리 인생이 어항과도 같다고 생각해 보자.
물고기를 아마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띤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이런 물고기를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단지 먹이를 잘 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게는 책이야말로,
어항에 심은 수초이자 어항에 투입한 다슬기이고,
규칙적으로 넣고 빼는 20%의 물이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산소와도 같다.
책은 우리의 꿈을 직접 실현해 주지 않고, 우리 인생의 난제를 직접 풀어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책은 우리의 꿈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해 주고, 여러 문제가 풀릴 수 있도록 개선시켜 준다.
내가 물려받을 것을 내가 결정하기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많은 것들을 상속받는다.
상속받은 것들의 목록에는 세속의 눈으로 봤을 때 득이 되는 것들도 있고, 반대로 짐만 되는 것들도 있다.
누군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이미 부유한 상태로 태어나고,
다른 누군가는 부모가 다 갚지 못한 빚들을 대물림 받으며
아직 살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저당 잡힌 채 태어나기도 한다.
꼭 물질적인 것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문화와 환경을 비롯해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힘들고,
그러한 조건들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나에게 책은 내가 상속받을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기회의 땅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온 인류의 지식 중 내가 원하는 누군가를 나의 계보로 결정할 수 있다.
이는 내가 처한 현실과 나를 규정하고 있는 조건들과 무관하게 꿈꿀 수 있는 나의 세계이고 나의 자유였다.
책 만드는 사람이나 책 쓰는 사람,
또는 출판이라는 세계와 관련된 자들의 마음에 드는 사변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도서관을 좋아했던 것은, 도서관에서만이 나 자신이 무중력 상태의 나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내가 골라 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책들은 나를 어디로도 갈 수 있는 자유의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 도서관 저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시간들이 나를 질식하지 않고,
살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이전의 물의 일부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물이 들어왔다.
인생의 마디마다 책들이 있었다.
그 책들이 내 안에 들어오며 이전의 나를 갱신시켰고,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가까스로 세계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중학생 시절 학교에 있던 작은 도서관에서 읽었던 두 권의 책은
나에게 최초로 ‘절망’과 ‘실패’에 대한 감각을 알려주었다.
나아가 인생의 묘미가 바로 그 절망과 실패 속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줬다.
그것은 지금 내가 문학에 삶을 모두 다 걸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결국에는 백기 투항하고 만 책이다.
고립된 채 우울하기만 해 보였던 요양원의 분위기와
펼쳤다 하면 잠이 쏟아지는 육중한 문체들은 좀처럼 내게 자신을 보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그 책을 놓고 싶지 않았다.
완독에 실패한 첫 책으로서의 『마의 산』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책이라는 것이
세상과 구분된 채 내가 언제든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게 의미 있는 건 어떤 훌륭한 지식을 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실패조차 내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이 주는 이상한 자부심과 뿌듯함이 책 읽는 시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이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이후 읽은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다.
당시 성실한 모범생으로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나는,
주인공 한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성실하고 똑똑한 한스가 비참하게 몰락해 가는 이야기는
기존의 내 세계관 안에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세상이 원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 성실한 것이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실함이 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들고 내가 원하는 삶의 모범생이 되는 것이지,
모두의 모범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진실을 몸으로 알게 된 계기였다.
지금도 내가 왜 그토록 문학적인 작품들을 읽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학은 내가 생각해 오던 세상의 법칙과 다른 감각을 느끼게 하고, 다른 진실을 들려주었다.
한마디로 어른들이 내게 말해 주지 않거나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문학에 탐닉하기 시작했고, 문학에 관한 관심은 곧장 한국의 시와 소설들로 이동해 갔다.
백석의 시를 통해 외롭고 쓸쓸한 삶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꿋꿋하게 살아 나갈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진실을 소박하면서도 낯선 분위기로 접할 수 있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이라는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지금에 와서 말로 표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토록 하찮아 보이고 심지어는 단 하나도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가족들의 열거 속에서 작은 인생의 맛을 알게 되어 버렸으니까.
문학은 나로 하여금 누구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을 수 있는지 결정함으로써
내 삶의 계보를 만들어 나가고 싶게 하는 장르였다.
나는 정서의 기원에 백석을 두고,
헤르만 헤세를 두고,
또 그 밖의 많은 시인과 소설가, 통틀어 작가라는 존재를 위치시킨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때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당장 해결해 주지 않는다.
책은 내 삶에 어떤 직접적인 관여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은 늘 나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간접적으로는 모든 문제에 다 끼어들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책을 성실하게 읽는다는 것은 내 삶을 도와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살아가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거시적이고,
간접적인 방법만이 물고기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인 것처럼,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느리고 간접적인 독서는 우리 삶을 성숙하게 만드는 가장 빠른, 그리고 정확한 방법이다.
절망과 실패의 이면을 보여 주는 문학을 나의 기원이자 나의 유산이며 나의 미래라고 정했을 때,
나는 소설 속 한스와 같은 운명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 냈다고 믿는다. (p59)
박혜진 편집부장의 내 삶에 들어온 책
토마스 만 - 『마의 산』 / 을유문화사
헤르만 헤세 - 『수레바퀴 아래서』 / 민음사
글 - 박혜진 / 민음사 편집부장
출처 - 월간 국회도서관 / 2023. 06. Vol.511
[t-23.06.14. 230611-174833-2-3-3]
'일상 정보 > 사람들(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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