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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목적에 배신당한 삶

by 탄천사랑 2023. 11. 17.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좋은생각」


내가 살고 있는 바닷가 실버타운으로 친구 부부가 먼 길을 찾아왔다. 
나를 살펴보고 위로를 해주기 위한 것 같았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니?”​ 친구가 조심스겁게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을 보고 명상을 하지.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필을 써. 글을 쓰는 게 나의 기도야. 
 그렇게 하다 보면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바닷가로 가서 산책을 하지. 
 오후에 돌아오면 다시 내가 구상한 소설을 써. 그러면 금세 밤이 오고.”​

소년 시절부터 나는 매일 구체적인 할 일을 목표를 잡고 그걸 달성하면 엑스표로 지우곤 했다. 
사라진 수많은 엑스표 속에 나의 희망과 목적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면 우리 부부가 네 스케줄에 방해가 되겠구나?”​  친구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멀리서 사랑하는 친구 부부가 찾아와 주었는데 기도한번 못한게 글을 못 쓰는 게 그렇게 방해가 되는 것일까? 
 찾아온 반가운 친구에게 내 시간과 마음을 주는 게 더 중요하고 즐거운 일 아닐까? 
 나는 자네 부부에게 그냥 감사할 뿐이야.”​

나는 나의 진심을 말해 주었다. 
사랑이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게 아닐까. 
평생을 어떤 목적을 세우고 그날그날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 속에서 살아왔다. 
어쩌면 그런 벽속에 갇혀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즈음 뒤늦게 다른 생각이 들었다.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은 없었을까. ​


아이들이 한창 귀여울 때 나는 실력을 늘이겠다고 자기 발전을 하겠다고 방문을 닫아걸고 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시간은 정지해 있지 않고 아이들은 컸다. 
나는 소중한 것을 놓쳐버렸다. 
아이들에게 내 시간을 주는 게 사랑이었다는 걸 몰랐다. 
어떤 허망한 목적이 항상 나의 삶을 방해하고 희생하게 해 왔던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다. 

명문학교의 합격을 목적으로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다. 
고시도 마찬가지였다. 
합격하면 행복을 거머쥘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합격을 한 순간의 찰나의 기쁨이 있었을 뿐 곧 허무가 다가왔다. 
허무가 다가오고 이제 뭘 하지? 하고 나는 정신의 텅 빈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실패도 해 봤다. 
그때도 허무가 엄습했다. 
그것봐 나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 하는 좌절감이 들었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허무한 건 마찬가지였다. 
목적을 달성하면 행복하리라는 기대는 항상 배신을 당했다. 
차라리 목적이 없었더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아주 돈이 많은 영감의 사건을 처리한 적이 있었다. 
부두 노동자로 출발한 그는 돈이 인생의 목표였다. 
판자집에서 살면서 시장바닥에 버려진 상한 야채들을 주워다가 국을 끓이고 보리밥을 삶아 먹고 살았다. 
그는 압구정동과 대치동 일대의 몇 만평을 소유하는 땅 부자가 됐다. 
천문학적 액수의 주식과 현찰도 가지게 됐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압구정동 땅을 사자고 왔을 때 그는 괴로웠다고 했다. 
더 큰 부자를 보고 그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인 그는 돈을 쓰지 않았다. 
은행지점장이 명절에 선물하는 조기를 받고 좋아하고 증권사에서 보내는 프라이드 치킨을 반겼다. 

식당에서 옆자리 손님이 남긴 술이 들어있는 병을 슬쩍 들고 와 마시곤 했다. 
갑자기 저승사자가 다가와 그의 뒷머리채를 잡았다. 
폐섬유증이라는 진단이 그에게 내려진 것이다. 
갑자기 목표가 없어진 그는 짙은 허무 그 자체였다. 
그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내가 번 돈들을 다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싶어. 
 아니면 바다에 던져버리던가. 
 나는 속았어.”​

그의 공허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절실한 말이었다. 
그는 많은 돈을 다급하게 인간의 바다에 던져버리고 죽음 저쪽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부자가 되려는 목적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보다 행복 하지 않았을까. 
그가 부러워하던 더 큰 부자였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목적을 세웠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그는 기어코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목적이 그를 불행하게 한 것은 아닐까. 

정치인으로 나라를 휘어잡고 싶어하던 검사 출신의 선배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암이 그를 찾아왔고 그는 병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의사에게 죽여달라고 사정했다. 
그는 아프지 않던 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검사 뼈다귀를 타고 난 것도 아닌데 출세할려는 목적만 달성하려다가 인생을 헛살았어.”​

나는 요즈음 어떤 목적보다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위나 재물은 무상한 것이다. 
욕망은 충족되면 곧 다음 욕망을 낳고 목적으로 자신을 위장한다. 
어떤 목적이던 삶을 배신한다. 
삶이란 사는 것이지 과제를 수행하는 건 아니다. 
목적을 위해 삶이 희생 되어서는 안되니까.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집 '좋은생각 메일진' 에서
 좋은생각 - http://master@positiv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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