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브래프먼. 롬 브래프먼 - 스웨이(SWAY)」
Chapter 1 - 그는 왜 허가 없이 이륙하였나
584명을 죽게 한 테네리프 섬의 비극
KLM 4805편에 탑승한 승객들은 미처 몰랐겠지만
그 비행기의 조종석에 앉은 파일럿은 전 세계에서 가장 경험 많고 실력 좋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기장인 야코프 반 잔텐은 비행 솜씨가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세부 항목에 대한 세심한 주의, 체계적인 접근법, 흠 잡을 데 없는 비행 가록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KLM의 안전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항공사가 그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 잡지에는 미소 짓는 빈 잔텐 기장의 모습과 함께
"KLM은 여러분의 약속 시간을 지켜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가 실렸다.
노련한 조종사들 조차도 그를 일종의 유명인처럼 생각했다.
암스테르담에서 카나리아 제도의 라스 팔마스 공항으로 향하는 보잉 747기의 조종실에서
반 잔텐은 틀림없이 뿌듯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날의 비행은 반 잔텐의 트레이드마크답게 매끄럽고 정확했다.
일정은 단순했는데, 라스 팔마스에 착륙해 연료를 주입하고 새 승객들을 태워서 고국 네덜란드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반 잔텐은 항공관제탑에서 긴급 메시지를 받았다.
테러리스트가 설치한 폭탄이
공항 꽃 가게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지상에서 엄청난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일로 라스 팔마스 공항은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폐쇄될 예정이라고 했다.
반 잔텐 기장은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건 차분함을 유지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야말로 이런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수차례나 실시해온 당사자 아닌가.
사실 반 잔텐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대응하는 방법에 관한
6개월 짜리 안전 교육 과정을 진행하다 막 본업에 복귀한 터였다.
기장은 표준 절차에 따라 원래의 도착지에서 50해리 떨어진 테네리프 섬에 착륙하라는 명령을 준수했다.
그의 비행기는 오후 1시 10분 그곳에서 같은 이유로 우회한 다른 비행기들과 합류했다.
테네리프가 뉴욕 JFK 국제공항과는
매우 다르리라는 것쯤은 노련한 비행기 조종사가 아니더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테네리프는 조그만 공항이라 활주로가 하나뿐이어서 초대형 여객기를 여러 대 소화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았다.
비행기를 활주로 가장자리에 안전하게 세워놓은 기장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자 갑자기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필수 휴식시간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얼마 전 모든 조종사가 준수해야 할 엄격하고 복잡한 규칙을 도입했다.
본부와 연락을 취하고 재빨리 시간을 계산해 본 반 잔텐은
아무리 늦어도 오후 6시 30분 이전엔 이륙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필수 휴식시간이 시작되고 나면 절대 비행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건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구금까지 가능한 범죄행위였다.
하지만 휴식시간을 지키는 것 역시 복잡하고 귀찮은 범죄행위였다.
테네리프에는 대신 업무를 맡아줄 교대 승무원도 없으니 수백 명의 승객이 밤새도록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면 항공사는 승객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 줘야 하는데 이 섬에는 호텔 방도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서 지체하면 KLM 항공사 전체가 줄줄이 운항을 취소해야 할 것이다.
잠시 동안의 우회로 어쩌면 악몽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반 잔텐이 받았던 스트레스와 왜 그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절약하려고 했는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건 마치 중요한 회의에 늦었는데 차가 빨간 신호등에 걸린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되도록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써보지만 자신의 평판이 걸린 문제인 데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상황에 짜증만 점점 커질 뿐이었다.
그런데 반 잔텐이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라스팔마스 공항의 운영이 재개되는 즉시 이륙할 수 있도록 승객들을 기내에 그대로 싣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테네리프 관제탑에 근무하는 항공교통 통제관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곳 열대 섬의 작은 공항이 라스팔마스 폭발 사고 때문에 우회한 전 세계 각국의 비행기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런데 항공교통 통제관들은 비행기들을 게이트 밖으로 서둘러 내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관제탑의 직원 수가 적어 공항에 모인 비행기들을 통제하기 역부족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들은 트랜지스터라디오로 생방송 축구 경기 중계를 들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착륙 20분 뒤 반 잔텐은 승객들을 내리게 하라는 관제탑의 지령을 들었다.
승객들이 한동안 이 섬에 머물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부터 테네리프의 상황은 느릿느릿 진행되기 시작했다. 결국 20분은 1시간이 됐다.
그러자 반 잔텐은 지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승무원들과 전략 회의를 여는 한편 KLM 본부에 연락해
필수 휴식시간이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보았다.
지상에서의 1 시간은 어느덧 2시간이 됐다.
그때 그에게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테네리프에서 미리 급유를 끝내놓으면 라스 팔마스에 돌아가 다시 이륙을 준비할 때
30분 정도 시간을 아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 절약 아이디어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 잔텐이 급유를 시작하자마자 드디어 라스 팔마스 공항의 운영이 정상화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35분이 소요되는 연료 보급 프로세스를 중단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마침내 비행기가 이륙 준비를 마치자 이번에는 기상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활주로에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것이다.
반 잔텐은 테네리프에서 급유하기로 했던 결정을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얼른 이륙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하지만 안개는 점점 더 짙어져 가시거리가 300미터 이하로 떨어졌다.
조종실 창문 밖을 내다보아도 활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반 잔텐은 안개가 짙어질수록 테네리프 관제탑이 공항을 폐쇄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 밤을 테네리프에서 보내지 않고 그곳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의 창문이 점점 닫히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떠날 시간이다.
그런데 반 잔텐의 다음 행동은 전혀 그답지 않았다.
그는 엔진의 회전 속도를 올렸고 이에 비행기는 기우뚱하며 활주로 쪽으로 나아갔다.
"잠깐만요" 부기장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ATC 허가가 없었잖아요."
"나도 알아" 반 잔텐은 브레이크를 밟으며 대답했다.
"어서 물어 보게"
부기장은 무선 통신을 켜고 관제탑에 '활주로 진입' 허가 (비행 계획에 대한 승인)를 받았으나
정작 중요한 '이륙'허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륙을 굳게 결심한 반 잔텐은
계기판을 완전히 올리고 힘찬 소리를 내면서 안개 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반 잔텐의 비행기가 가속도를 내던 중,
갑자기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활주로에 팬암의 보잉 747기 한 대가 서 있었고, 반 잔텐은 그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제 멈추거나 방향을 틀 도리가 없었다.
반 잔텐은 본능적으로 서둘러 이륙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서! 제발!' 그는 비행기를 재촉했다.
그가 필사적으로 기수를 들어 올리자 후미가 땅에 끌리면서 눈부신 불꽃이 뛰었다.
반 잔텐이 조종하는 비행기의 기수는 팬암 비행기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충돌을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동체 하부가 팬암 비행기의 기체 상부를 강타하고 말았다.
KLN 비행기는 활주로를 450미터 정도 더 달리다가 폭발해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반 잔텐과 승무원,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그날 하루 584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먼저 기계적인 결함이나 테러리스트의 공격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날 사건의 경황을 꿰맞추어보니 활주로 위에 있던 팬암 1736편은
유도로의 분기점을 놓쳐 엉뚱한 장소로 흘러들어 오게 된 것이 분명했다.
짙은 안개도 사고에 한몫했다.
반 잔텐은 팬암 비행기를 볼 수 없었고, 팬암 조종사도 KLN 비행기를 볼 수 없었으며,
관제탑 통제관들에게도 두 비행기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관제탑에는 근무 인원이 부족했고 그나마 있던 통제관들도 축구 중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반 잔텐이 허가 없이 이륙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노련한 조종사이자 KLM 항공사의 '안전 교육 책임자'인 그가
그토록 분별없고 무책임한 결정을 내렸을까?
※ 이 글은 <스웨이(SWAY)>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오리 브래프먼. 롬 브래프먼 - 스웨이(SWAY)
역자 - 강유리
리더스북 - 2009. 10. 19.
[t-24.04.04. 20240401-1729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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