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국회도서관 2024. 3 ㅣ VOL.518」
내 삶에 들어온 책
학자로서의 삶에 지표를 만들어준 위트 넘치는 선학(先學) 조지 박스의 『어쩌다 보니 통계학자』
- 책을 열심히 읽는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어른들 모두 나를 대견하게 여기며 기대를 걸어주셨기 때문이다. 막연히 이 때부터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학자가 된다면 ‘평생 돈을 받으며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어른들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 읽기의 즐거움을 깨우치던 어린 시절.
강원도에서 장남에, 장손으로 태어나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교사셨던 할머니 덕에 교육에 관심이 높았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지지해 주신 할아버지 덕분에 책에 흥미를 붙일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는 나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시내에서 나랑 만나자!”라고 말씀하셨고, 할아버지를 따라나서면 항상 코스는 똑같았다. 시내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세트를 하나 사 먹고, 만 원 용돈을 받은 후에 동네에서 가장 큰 서점인 동아서관에 갔다. 할아버지는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한 권 사라고 하시며 책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주셨고 나는 신나서 책을 골라 서점을 나와 집에 돌아왔다
위인전에 나오는 분들처럼 그곳에서 운명적인 책을 만나거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책 읽기가 즐거운 일이란 것을 처음 배울 수 있었다. 5학년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사서 읽었다. 담임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한 번 이야기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샀다. 그냥 개미가 나오는 소설인가보다 하고 골랐는데 책방 직원이 “5학년짜리가 이걸 읽는다고?” 라며 깜짝 놀라는 모습에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내용은 잘 이해를 못했지만 어른들이 대견해하는 것이 좋아서 책을 읽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현혹되다.
6학년 때 서점에서 산 책 중 기억에 남는 것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이었는데, 1999년 당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강원도 촌놈 꼬맹이였던 나는 ‘얼마나 재밌길래 세계에서 1등 문학상을 받았을까!’하는 생각(재미에도 서열이 있다고 생각한 K-어린이)에 책을 샀는데, 서른 페이지도 읽기 전에 책을 덮었다. 표현도 너무 어려웠고 어린 나이에 읽기엔 음습한 분위기가 불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을 열심히 읽는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어른들 모두 나를 대견하게 여기며 기대를 걸어주셨기 때문이다. 막연히 이 때부터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학자가 된다면 ‘평생 돈을 받으며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어른들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성적에 맞춰 학과를 정했다. 막연히 학자가 되고 싶었다.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내 성정에도 맞고, 평생 공부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좋은 지도 교수님과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공부했다. 2018년 여름 학기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해에 교수가 되었다. 스스로도 대견했고 주변의 칭찬과 기대도 이어졌다.
교수가 되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게 찾아오는 것은 절망감이었다. 학자가 되어 세상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는 점점 사라지고, 위대한 연구물 앞에 점점 위축되기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려운 내용들이 연구되고 복잡한 연구물들이 끊임없이 출판되는 환경 속에서 과연 나는 부끄럽지 않은 교수로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몰려왔다. ‘다른 교수들은, 다른 박사들은 어렵지 않게 척척 잘 해내는 것 같은데… 다들 천재처럼 보이는데… 왜 같은 교수인 나에게는 이렇게 어려울까?’ 고민하다 문득 ‘진짜 세상이 알아주는 천재적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공부했을까?’라는 질문에 생각이 닿았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 책이 조지 박스의 『어쩌다 보니 통계학자』였다. 학부 시절 통계학 수업을 들으며 봤던 이름이다. 시계열 분석으로 유명한 분이셨고 위스콘신 대학에 통계학과를 설립한 분이셨는데, 그 분의 일대기를 담은 자서전이었다. ‘이렇게 입지전적인 인물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학자가 되고 연구물을 만들었을까?’ 기대하며 책을 읽었다.
생각과 달리 조지 박스는 학창시절 중위권 성적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화학에 소질이 있어 열여섯 살에 화학자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스무 살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스물한 살에 군대에서 동물 실험 생화학 측정 문제를 맡게 되었는데, 한 대령이 “통계학을 배운 적이 있느냐?”라고 물었고, 그 질문에 “로널드 피셔가 쓴 책을 읽어보려 했으나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대령은 “그 책을 읽어봤다니 당신이 적임자군. 자네가 맡게.”라 말했고 박스는 엉겁결에 “네,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군대에서 엉겁결에 한 대답 때문에 이렇게 위대한 통계학자가 되다니 인생의 아이러니를 배울 수 있었다. 영국 군대도 “미술대학 나온 사람 손 들라.”고 해서 손들면, “나와서 축구 코트 그리라.”고 시키는 한국 군대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재밌었다.
이후 왕립 통계학회 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된 콕스(Cox)와 묶어서 사람들이 “박스와 콕스라니! 같이 논문이라도 써보지 그래?”라는 말을 듣고는 실제로 둘이 함께 ‘박스 콕스 변환’이라는 논문을 펴내기도 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에 불과하다. 화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글을 씀으로써, 선생은 제자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의 삶을 표현하듯, 학자도 학문을 지속함으로써 본인의 삶을 표현하며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때로는 진중하게, 또 때로는 가볍고 위트 있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부심이 만들어내는 겸손함.
통계학자인 본인이 ‘통계는 과학 연구의 부산물’이라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부산물이라고 하면 덜 가치 있게 느껴지거나,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을 텐데 정말로 본인이 하는 학문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교육평가도 어떻게 보면 통계 연구의 부산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정말 좋아하는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보면 하루키에게 에세이는 소설을 쓰고 남은 재료를 모아다가 쓰는 것에 불과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훨씬 재밌고 의미 있다. 하루키의 소설은 굳이 사서 읽지 않지만 그의 에세이는 모두 사서 소장한다. 독자가 즐겁게 읽으면 그 자체로 크게 기여한 것 아니겠는가.
조지 박스의 생애를 톺아보며 ‘어떻게 전 생애에 걸쳐서 평생 즐겁게 연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의 답도 얻을 수 있었다. 조지 박스하면 같이 떠오르는 단어가 ‘월요일 밤의 맥주 모임’이다. 그 모임에 가면 어느 사람이든 어떠한 통계적 문제를 가지고 오든 맥주를 마시며 함께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다. 친구들(교수, 대학원생 모두)과 통계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을 나누었다고 한다. 다른 이의 고민을 들으며 본인이 생각하던 문제의 해답을 얻기도 하고, 새로운 연구 주제를 떠올리기도 한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대학원생은 위스콘신에서 배운 모든 것보다 월요일 밤의 맥주 모임이 더 좋았다고 대답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모임이 얼마나 즐겁고 배울 점이 많았을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조지 박스 본인도 이 모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니 ‘나도 화요일 밤의 맥주 모임을 만들어 볼까?’ 하는 유쾌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물론 나는 맥주만 마실 것 같지만...
학자는 학문의 지속으로 삶을 표현한다.
박스 같은 사람도 논문이 게재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을까? 책에서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시계열 분석』이 다른 학자들로부터 거센 비평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는 ‘독창적인 연구는 언제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라며 쿨한 태도로 연구를 지속한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교과서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타고난 두뇌의 소유자가 아닌 교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조지 박스는 그의 삶으로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에 불과하다. 화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글을 씀으로써, 선생은 제자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의 삶을 표현하듯, 학자도 학문을 지속함으로써 본인의 삶을 표현하며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때로는 진중하게, 또 때로는 가볍고 위트 있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연구들과 내 연구를 비교하며 위축되기보다는, 내 연구도 세상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조금 더 낮은 자세로 남들보다는 조금 더 열심히, 그리고 함께 학문하는 삶을 살고 싶다.
이 책의 제일 첫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함께 연구하며 친구가 된 제자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박스처럼 똑똑한 사람은 못 돼도 박스처럼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교수가 되어보자는 소망을 품어본다.
『어쩌다 보니 통계학자』, 조지 박스, 박중양 번역, 생각의힘, 2015
글 - 조명근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
출처 - 월간국회도서관 2024. 3 ㅣ VOL.518.
[t-24.03.05. 20210305-1645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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