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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 480원 어치의 축복

by 탄천사랑 2007. 5. 24.

· 「류시화 -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480원 어치의 축복
누구나 한 번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떤 이유 없는 허무감과 슬픔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마치 어느 전생에선가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았던 것처럼 원인 모를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 무렵의 내가 그랬다. 
나는 인생의 허무감에 젖은 채로 버스를 타고 북인도 대륙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생의 슬픔만이 아니라 먼 전생으로부터 전해지는 어떤 슬픔이 나를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런던 어는 날. 내가 탄 버스 위로 성자 한 명이 오랜지 색 누더기를 걸치고 올라탔다.
이마에는 노란색. 붉은 색. 흰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고 
발꿈치까지 내려올 성싶은 긴 머리는 둘둘 말려 머리 꼭지에 얹혀 있었다.

성자는 버스에 타자마자 운전사와 심한 입씨름이 붙었다. 
말이 빨라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눈치를 보니 성자가 차비가 없는 모양이었다. 
성자는 설령 돈이 있다 해도 낼 수 없다는 당당한 태도였다.

인도 땅에서 사두(힌두 탁발승)들은 자난 수십 년 동안 기차든 버스든 공짜로 타는 것 자랑으로 여겨왔다. 
신과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자신들의 생을 바치고 있으니 차비 따위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도 사회 역시 큰 변화를 맞이 하고 있었다. 
신세대인 20대 버스 운전사는 성지든 시바 신이든 
요금을 내지 않으면 절대로 버스에 태워줄 수 없다는 완강한 자세였다.

시대의 변화를 절감한 늙은 성자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에 맨 보따리 안을 뒤적여 칠이 벗겨진 손거울을 꺼냈다. 
성자는 그것을 차비 대신 운전사에게 내밀었다. 
아침마다 이마를 비춰보며 신의 문양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성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손거울이었다.

운전자가 쓸모도 없는 그런 물건을 받을 리 없었다.
오히려 화만 돋우었을 뿐이었다.
젊은 운전자는 더욱더 큰소리로 성자를 윽박질렀다.
성자는 손거울을 도로 집어넣고 이번에는 때묻은 소라 고동을 내밀었다.
이른 새벽 갠지스 강가에서 대지의 어머니인 강을 행해 뿌웅 뿌웅 문안 인사를 올리는 데 필요한. 성자의 필수품이었다.

운전자는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성자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던지 운전석에서 일어나 성자를 버스 밖으로 떠다 밀려고까지 했다.

그 순간 성자는 사람들의 동정의 동정심을 구하기 위해 버스 안을 둘러 보았다.
승객들은 운전사의 비위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모를 척하고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성자는 문득 인도인들 틈바구니에 장발을 하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 역시 얼른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지만 이미 그에게 발각된 뒤였다.
성자는 운전사에게 나를 손짓해 보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선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나는 모른 체하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남의 일에 말려들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자는 손가락으로 어깨를 툭툭 쳤다.
마지못해 쳐다보자 그는 마치 신의 메시지를 전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만나려고 이 버스에 탔다. 
 그러니 그대가 내 대신 차비를 무는 것이 당연한 일이로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성자의 복장을 한 사람이 차비 몇 푼을 빼앗으려고 거짓말을 하다니! 
나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또 다시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두들기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슬픔은 곧잘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외로움은 인간을 공격적으로 만든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성자를 행해 소리쳤다.

"난 당신을 만나자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허튼 소리 그만두고 저리 가요, 
 남의 돈으로 버스를 타려거든 차라리 걸어서 다니라고요,"

내 목소리가 하도 커서 버스 안의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다.  
나는 기분도 좋지 않은 판에 대판 싸움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성자는 알아듣기도 힘든 인도식 영어로 즉각 맞받아쳤다. 

"그것이 왜 그대의 돈이란 말인가? 
 그대는 지금 그까짓 5루피를 갖고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대는 그것이 자기가 잠시 보관하고 있는 돈이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이런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 뭄바이 (붐 베이)에선 한 남자가 내 가방을 뒤져 물건을 갖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그때도 내가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가느냐고 항의하자 그 남자는 당당하게 내 어리석음을 훈계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이것이 당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잠시 이것을 갖고 있을 뿐이다. 
 주인이 모자를 벗어 잠시 벽에 걸어 놓는다고 해서 그 모자가 벽의 소유란 말인가?"

인도인들의 막힘없는 논리는 논리학의 할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와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성자가 과연 나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는가의 사실 여부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면 내가 질 게 뻔했다. 
힌두교의 인연론은 그 교리가 성립되는 데만 1천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니 그 유창한 논리를 내가 무슨 수로 당해낼 것인가. 

제풀에 싸움을 포기한 나는 차장에게 5루피를 던져주었다. 
성자는 기분이 좋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사태는 해결되었다. 
버스는 이윽고 인도풍의 아열대 태양광선 속으로 출발했다. 

나는 그때 히말라야 산중의 데라둔으로 가는 중이었다. 
하리드와르, 데라둔, 무쑤리와 같은 마을들은 내가 번역한 바바 하리 다스의 소설 <성자가 된 청소부>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그 책을 번역하면서 언젠가 작품의 무대가 된 그 지방들을 여행해 보리라고 마음먹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성자는 당연한 듯이 내 옆에 앉은 남자를 밀쳐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머리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하도 오래 이를 닦지 않아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꼼짝없이 고역을 치를 판이었다. 
나는 냄새를 피해 얼굴을 외면했다. 
그러는 내게 성자가 대뜸 물었다. 

"그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가?"

나는 무심코 데라둔에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성자는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버스를 잘못 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데라둔행 버스임을 확인하고 탔는데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버스 행선지를 다시 확인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성자가 얼른 나를 끌어 앉히며 말했다. 

"그대는 표면적으로 볼 때 지금 데라둔으로 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아. 
 데라둔은 공간 속의 한 지점일 뿐이지. 
 지금 그대가 향해 가고 있는 시간 속의 지점은 그곳이 아닌 다른 곳이야."

그렇다면 그곳이 어디냐고, 성자는 사뭇 철학적인 어조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든, 사실 그대는 신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야. 
 그대가 데라둔으로 가든 히말라야로 가든 실제로 그대는 신에게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을 뿐이지. 
 그대는 신에게 이르기 위해 수많은 생을 윤회하고 있어."

그러면서 성자는 엄숙히 결론을 내렸다. 

"신에게로 향하는 그대의 여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내가 그대 앞에 현신한 것이라네."  

그리고 사실은 자기가 전생에서부터 나를 기다려 왔노라고, 성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선언했다. 
그런데 이렇게 버스 안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감동적이냐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생에 나는 그의 첼라(제자)였고 그는 나의 구루(영적 스승)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 중에 내가 도망쳐서 어디로 갔나 했더니 한 생이 지난 이제서야 버스 안에서 만났다는 것이었다. 
인연의 고리는 너무도 단단해서 누구도 그것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노라고 성자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성자가 설명을 하는 동안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고개를 빼고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바로 앞좌석에 앉은 얼굴 시커먼 남자는 아예 우리를 향해 돌아앉아 재밌어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남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치아가 온통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인도인들이 즐기는 판(마약 성분의 씹는 담배)을 너무 많이 씹어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전생에 대해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성자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잠자코 그의 주장을 들어주었다. 
이때 버스 운전사가 뭐라고 떠들자 승객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날 갖고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성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다시 내게 물었다. 

"자, 그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아까처럼 데라둔으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하면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금방 앵무새처럼 '신에게로 가는 중'이라고 따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성자는 다시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에게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성자는 또다시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 역시 틀린 대답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대가 신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지만, 신은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그대가 어디를 향해 간다고 해서 신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지." 

마침내 나는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을 만날 수 있죠?"

성자는 이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찌르며 짧게 말했다. 

"내 축복을 통해서지!"

당당하고 확신에 찬 주장이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제게 축복을 내려주실 수 있나요?" 

성자는 역시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야, 하지만 돈을 내야 돼!"

승객들은 마침내 이 희한한 구경거리의 결말 부분에 이르렀다는 걸 직감했는지 다들 침을 삼키며 나를 지켜보았다. 
저 어리숙한 외국인 여행자가 노련한 성자에게 어떻게 당하나 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럼 돈을 낼 테니 신을 만날 수 있도록 지금 당장 축복을 내려주시죠." 

성자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주머니에서 1루피를 꺼내 성자에게 바쳤다. 
성자는 자기 손바닥에 놓인 백동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금액이 작아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말했다. 

"물론, 돈의 많고 적음으로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축복을 내리는 내가 신명이 나도록 도와주는 것은 그대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나는 할 수 없이 5루피를 더 얹어주었다. 
그래도 성자는 신명이 나는 표정이 아니었다. 
10루피를 더 바치자 마침내 성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리하여 북인도의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16루피(480원) 어치의 축복을 성자로부터 받았다. 
성자는 노란색과 붉은색 물감을 꺼내 내 이마에 무늬를 그리고 민트라(신성한 주문)를 읊어대기도 하면서 
"하리 옴! 옴 나마 시비야!"를 소리도 낭랑하게 외쳤다. 
그는 이번 생에서 내가 틀림없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길고 유창한 말들을 내 머리꼭지 위에다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의식이 끝나자 앞자리에 앉은 이빨 붉은 남자를 선두로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히말라야 산중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난데없이 울려 퍼진 그 박수소리는 
성당과 교회에서 행하는 어떤 영세식과 세례식 때보다도 더 열렬한 축하였다.

성자의 축복을 받고 나니 내 자신이 신에게로 성큼 다가섰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의 절망과 슬픔에 젖었던 한 여행자는 빈털터리 성자의 유머와 재치 덕분에 마음이 한결 밝고 여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 밝고 여유로운 세계가 내게는 곧 신의 자리였다. 

성자가 내려준 그날의 축복은 까닭 없는 허무감에 흔들리던 한 젊은이의 영혼을 간단히 치유해주었다. 
테라둔까지 가는, 아니 신에게로 가는 버스 여행은 그렇게 두 시간이 걸렸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 이 글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t-07.05.24.  20210509-17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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