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 山房閑談」
여기저기서 꽃이 피었다가 지더니 이제는 온 산천이 신록으로 눈이 부시다.
나무마다 달리 제 빛깔을 풀어 펼쳐내는 그 여린 속 얼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록은 그대로가 꽃이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찬란한 화원이다.
내 오두막 둘레는 아직 꽃 소식이 없다.
얼마 전까지도 눈이 내려 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있다.
5월 초순쯤에야 벼랑 위에 진달래가 피어날 것이다.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가 시리다.
최근 한 잡지사에서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대담을 해 달라는 청이 있었다.
산과 들에 새잎이 눈부신 이 생명의 계절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그 조화에 한몫을 거드는 일이 될 것이다.
행복의 기준이라니,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단 말인가.
만약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다면 그건 진짜 행복일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다른 환경과 상황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기준(틀)으로 행복을 잴 수 없다는 말이다.
내 식으로 표현한다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로 물어야 한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 꽃향기처럼 들려오는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면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철이 바뀔 때마다 꽃과 잎과 열매를,
바람이 숲을 스치고 지나가듯이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어느새 꽃이 피고 잎이 펼쳐지고 열매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과 밖이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가 되면 모든 현상은 곧 우리 내면의 그림자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두 개의 화분 곁으로 다가가서 ‘잘 잤는가.’라고 문안 인사를 건넨다.
지난 입춘날(2월 14일)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꽃시장에 들려 바이올렛 화분을 하나 사 왔다.
단돈 천5백 원에.
그때는 정갈하게 핀 세 송이 꽃이 눈을 끌었다.
화분 중에서도 가장 작은 화분이었다.
4월 초에 다시 그 꽃시장에 들러 같은 화분을 하나 더 사 왔다.
나야 성미가 괴팍해서 전부터 홀로 떨어져 살기를 좋아하지만
화분은 달랑 혼자서 지니는 것이 외롭고 적적할 것 같아 친구를 하나 데려온 것이다.
가지런히 놓아둔 화분에서는 서로가 겨루듯 활기차게 스무 송이도 더 넘는 꽃들을 저마다 피워내고 있다.
가끔 물비료 원액에 물을 타서 주고 잎에는 분무기로 물을 뿜어준다.
처음에는 모르고 잎에도 물비료를 뿌려주었는데 얼룩이 생기는 걸로 보아 식성이 다른 것 같았다.
이 두 개의 화초를 가까이서 보살펴 주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살아있는 것을 가까이 두고 마음을 기울이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이런 걸 행복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가슴은 이렇게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서 밀물처럼 차오른다.
한밤중에 종종 겪는 일인데, 엊그제도 자다가 기침이 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낮 동안 미루어 두었던 방 안 일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는 사이에 기침은 멎는다.
정신이 아주 맑고 투명해진다.
촛불을 끄고 벽에 기댄 채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있으면
아, 말고 투명한 이 자리가 바로 정토(淨土) 요, 별천지(別天地)이다.
이 밖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가슴이 따뜻해진다.
‘좋고 좋구나.’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을 일러서 행복이라 하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래서 한밤중에 나를 깨워준 그 기침에게 때로는 고마움을 느낀다.
옛 어른들이 병고로써 약을 삼으라는 그 가르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 얼마 전에 내 오두막에서 일어난 일이다.
내가 천식 때문에 한밤중에 기침을 많이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는 신도분이 푹신한 의자를 하나 보내주었다.
이 의자의 구조는 앉는 기능뿐 아니라 바른쪽에 달린 나무 손잡이를 조작하면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그런 특이한 의자다.
몇 차례 써보면서 내 분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우선 푹신해서 누우면 이내 잠이 들었다.
아주 친절하고 편리한 의자였다.
그런데 날이 가면서 이토록 편리한 의자기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무엇보다도 오두막 분위기에 커다란 그 덩치가 낯설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토록 편리한 의자가 수행자의 분수에 맞지 않았다.
모처럼 산골까지 나를 찾아온 의자한테는 미안하고 미안했다.
의자의 천갈이까지 새로 해준 호의를 어떤 식으로 사양할까를 두고 이리저리 고심했다.
바로 엊그제 새벽 예불 끝에 내 입선 죽비 소리를 듣고 문득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떠올라 결단을 내렸다.
그 의자를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나니 아주아주 홀가분했다.
그 빈자리에서 어떤 충만감을 보았다.
부담스러운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빈자리가 홀가분함으로 채워졌다.
옛날 어떤 스님이 값비싼 향나무 침상을 쓰다가 온몸에 부스럼 병이 났다.
고생고생 끝에 참회를 하고 겨우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비도량참법’은 여기에서 유래된 참회의식이다.
육중한 의자가 나를 깨우쳐주기 위해
이 궁벽한 산골에까지 찾아 왔구나 생각하니 그 ‘의자 보살’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행복에 어떤 조건이 따른다면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거리낌이 없는 이 홀가분함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외부적인 여건 보다도 묵은 틀에 갇혀 헤어날 줄 모르는 데에 그 요인이 있을 것이다.
마음에 걸린 것이 있어 본마음인 그 따뜻함을 잃으면 불행해진다.
마음을 따뜻하게 가져야 거기에 행복의 두 날개인 고마움과 잔잔한 기쁨이 펼쳐진다.
당신은 행복한 쪽인가,
아니면 불행한 쪽인가.
한 생각 크게 돌이켜 다 같이 행복의 쪽에 서기를 비는 마음이다.
※ 이 글은 <山房閑談>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법정 - 산방한담(2판)
샘터(샘터사) - 200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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