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 「버리고 떠나기」
산에 살면서 철이 바뀔때마다 느끼는 일인데, 계절의 변화는 바람결에서 시작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때에 맞추어 바람을 타고 오는 것 같다.
예년같으면 백로를 고비로 마른 바람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올해는 백로가 지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무더운 날씨였다.
그러더니 며칠 전부터 설렁설렁 마른바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스쳐가는 나뭇잎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파초잎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는 넓은 잎이라 서걱이는 소리도 치마폭에서 나는 소리같고,
댓잎을 스치는 소리는 어쩐지 소소(蕭蕭)하다.
후박나뭇잎과 오동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또한 각기 다르다.
나무마다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서걱이는 마른 바람소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바람결에 가을이 묻어 있다.
바람은 인간의 정서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꽃향기를 싣고 오는 부드러운 봄바람에 우리들 가슴은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바람이 난다'는 말도 생겼을 법하다.
'바람기' '바람둥이'란 말도 이 바람에 연유하고 있다.
서걱이는 가을바람 소리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기운이 서려 있다.
여름날 더위와 물것 때문에 멀리했던 등불이 다시 정다워진다.
그래서 가을을 가리켜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고 한 모양이다.
등잔을 꺼내어 기름을 붓고 심지를 갈아 불을 밝히니, 방안이 한결 아늑하고 그윽하다.
등잔이 귀찮을 경우에는 손쉬운 촛불을 밝혀도 가을밤의 정취를 누릴 수 있다.
이 풍진세상을 허둥지둥 살아가느라고 메마르고 팍팍해진 우리들의 심성을
때로는 이 은은한 조명을 통해서 쓰다듬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정서적인 안정과 영혼의 휴식을 위해서는 오장육부가 환히 들여다 보일것 같은
눈부신 전등불 보다는 은은한 등잔불이나 촛불이 좋다.
아무리 일에 지쳐 고단하고 바쁜 일상일지라도 마음만 내면
잠들기전 5분이나 10분쯤 닳아지고 거칠어진 심성을 맑게 다스리는 향기로운 시간쯤은 가질 수 있다.
그런 시간을 통해 잃어비린 생기와 삶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낮동안 서로 시새우며 으르렁거리던 사람들도,사소한 의견충돌로 말다툼한 직장의 동료들도,
악의없이 무심히 뱉은 말 때문에 오해의 벽이 두터워진 사이도,
서걱이는 가을 바람에 귀를 기울이거나 등불아래 앉아 삶의 자취를 되돌아 보면,
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갈 일들이라는 걸 알아 차리게 될 것이다.
며칠 전부터 서걱이는 바람을 타고 오동잎이 지고 있다.
이른아침 우물가에 나가보면 성급한 벚나뭇잎들이 이슬을 머금고 흥건히 누워 있다.
여름날에 그토록 무성하던 잎들이 가을바람 앞에 묵묵히 자리를 비켜주고 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 자신도 언젠가는 낡은 옷을 벗듯이 현재의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지상의 관계에서 풀려날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친구의 가슴에 못을 박아서는 안된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입히거나 서운하게 해서는 안된다.
결국은 그 못과 피해와 서운함이 내 차지로 돌아오게 될 것이니까 ---.
엊그제는 지난 여름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전에서 간신히 되돌아선 친지가 그의 친구들을 데리고 다녀갔다.
아직도 척추수술의 뒤탈을 없애기 위해 갑옷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인 그는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 어떤것이라는 걸 전 존재로써 실감했을 것이다.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살아있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실컷 웃으며 떠들다가 산을 내려가고 나니, 내 뜰은 서걱거리는 가을 바람으로 다시 소생하였다.
만약 그가 사고로 죽었다면 재(齋)나 지내주며 슬퍼하다가 점점 기억에서 사라져 갈걸 생각하니,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덧 없는 것인가를 새삼스레 되새기게 된다.
따뜻한 방바닥이 다시 좋아져서 여름철에 쓰던 침상을 내놓았다.
추석이 오기 전에 발도 거두어 들여야하고, 지난 장에 사다놓은 한지로 창문을 새로 발라야겠다.
추석이 지나면 산 위에는 햇살이 엷어지고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새로 바른 창살로 비쳐드는 가을 햇살을 바라보고 있으면 은은한 삶의 속뜰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그 맑은 바람결에 실려 뜸했던 소식이 우표를 달고 날아든다.
"연이틀 가을을 재촉하는 단비가 오시고 있습니다.
빌딩 사이사이 스며 있는 안개는 도시의 아침을 깨어나지 못하게 지그시 잠재우고 있는 듯합니다.
안개 자욱한 날은 그렇게 짧던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고,
혼자서 이 생각 저 생각 드러내어 가지치기도 하면서 그리운 사람들 얼굴도 그려봅니다."
서걱이는 바람결은 편지를 쓰고 싶게 만든다.
전화의 목소리보다 편지에 스며있는 음성이 훨씬 정답다.
여름날처럼 눅눅하고 칙칙한 사연이 아니라,
가을하늘같이 맑고 투명한 삶의 여백을 나누어 보내야 한다.
산자락에는 벌써 억새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오는 추석 연휴에는 어차피 일손을 놓아야할 것이므로 지리산에 가서 억새꽃이나 보고 올까.
산바람에 물결치는 은발을 보고 있으면 그 물결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진다.
밤이 이슥해진 지금 창밖에서 후박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사람의 발자국 소리인가 해서 귀를 세운다.
아,가을이 내리는 소리. (p171)
※ 이 글은 <버리고 떠나기>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 91. 9. 19 >
법정 - 버리고 떠나기
샘터(샘터사) - 1993.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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