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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일상에서 쉼의 여유와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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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동-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그릇을 닦으며

by 탄천사랑 2022. 12. 2.

「채희동 -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그릇을 닦으며


                                                  윤 미 라
        
어머니,
뚝배기의 속끓임을 닦는 것이
제일 힘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차곡차곡
그릇을 포개 놓다가
보았어요.
물 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내가 그릇이라면,
서로 포개져
기다리는 일이 더 많은
빈 그릇이라면,
내 뒷면도 잘 닦아야 하겠네요.
어머니, 내 뒤의 얼룩
말해주셔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사람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라고,
그래서 앞모습을 가꾸기 위해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며 자신의 앞모습을 가꾸는데 온갖 정성을 다한다. 
심지어 앞모습을 더 잘 꾸미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설거지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설거지를 해놓고 보니 그릇의 뒤가 다른 그릇의 앞이었다는 사실을.

차곡차곡
그릇을 포개 놓다가
보았어요.
물 때 오른 그릇 뒷면
그릇 뒤를 잘 닦는 일이
다른 그릇 앞을
닦는 것이네요.

어쩌면 사람의 관계란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보고 사는 일보다는 
나의 뒤와 너의 앞이 서로 포개져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머물던 자리에 누군가가 다시 찾아오고, 
네가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내가 서게 되는 것. 
그래서 앞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더 좋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에게 뒷모습만 보여주셨습니다.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걸레질하고, 
물긷고 밭 매고….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뒷모습이셨습니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머문 그 자리에서 오늘도 내가 살고 우리 가족이 삽니다. 
내 어머니가 아름다운 것은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 때문입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신새벽에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아저씨의 뒷모습으로 거리의 깨끗함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남모르게 가난한 이들을 돕는 손길에는 
요사스러운 앞모습이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없는 뒷모습만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늘의 영광을 비추는 
앞모습이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화사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땅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뿌리가 있어야 하듯이, 
새 생명은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통해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릇 안은 우리 마음이요, 그릇 뒤는 우리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릇의 안쪽(마음)을 잘 닦았다 하더라도 그릇 뒤쪽(생활)이  더러우면, 
그 그릇(사람)은 제대로 닦았다 할 수 없습니다. 
또 그릇의 뒤쪽을 잘 닦았다 하더라도 그릇의 안을 닦지 않았다면, 
그 그릇은 온전히 닦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릇의 안과 밖은 하나요, 사람의 마음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설거지를 끝낸 그릇을 다시 쓸 때까지 차곡차곡 포개놓으면서,
그릇 안 쪽에 다른 그릇의 바깥쪽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의 생활(그릇 뒤)이 
내 마음(그릇의 안)과 만나 어머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가족이란 그릇들이 안과 밖이 서로 포개져 있듯이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이 모든 존재의 안과 밖이 서로 포개져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가족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살림살이에는 그릇의 안(내 마음, 생각)으로만 살아갈 수 없고, 
그릇의 안과 밖(생활), 
내 앞모습과 뒷모습, 
내 마음과 생활이 함께 어우러져 다른 존재와 포개져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가족이요, 교회요, 민족이요,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앞모습을 화려하게 치장하기 위해 돈을 들이는 어리석은 짓은 하니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그늘지고 병들고 가난한 뒷모습을 닦기 위해 교회의 얼굴(앞모습)이 뭉개지고
더러워져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뒷모습이 아름다워질 수 있고,
그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릇의 안쪽(영혼)을 닦는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는 내 속사람을 잘 닦아 거룩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하고 수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신자의 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기도하고 말씀 듣고 수도하면서 나의 속(영혼)을 닦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어머니,
뚝배기의 속끓임을 닦는 것이
제일 힘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차곡차곡
그릇을 포개놓다가
보았어요.
물 때 오른 그릇 뒷면

그런데 자기 속사람을 닦기 위해 성전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다가,
오늘 시인처럼 문득 내 등 뒤에서 나의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그릇의 안쪽만 열심히 닦고 그릇의 뒤쪽(행함)이 더럽다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전에서 자신의 앞모습만 열심히 닦고 세상을 닦는 일에 자신의 몸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가랑잎처럼 힘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안과 밖이 온전히 닦여진 존재이십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마음(앞모습)을 품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십자가의 사랑(뒷모습)을 통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앞모습), 네 이웃을 사랑하라(뒷모습).'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이처럼 앞모습과 뒷모습이 서로 만나는 것이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은 번듯하게 꾸며진 내 앞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뒷모습으로 만나는 것임을,
그러기에 우리는 내 존재가 온전히 주님과 포개지기를 원한다면,
영적으로 하나될 뿐만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싱천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온통 자신의 앞모습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은 오늘 시인의 노래처럼 내 뒷면을 닦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 존재가 그릇이라면,  빈 그릇이라면 내 뒷면을 잘 닦는 일이 곧 내 마음을 닦는 일이요,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 가는 일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내 존재가 온전히 포개질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그릇이라면,
서로 포개져
기다리는 일이 더 많은
빈 그릇이라면,
내 뒷면도 잘 닦아야 하겠네요.
어머니, 내 뒤의 얼룩
말해 주셔요.
※ 이 글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채희동 -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생활성서사 - 2005.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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