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데레사 -「 마더 데레사의 아름다운 선물」
이해인 수녀가 만난 마더 데레사
이제 당신은 멀리 계셔도 저는 가까이 듣습니다.
"우리가 깊이 기도할 땐 영원을 만난다."는 그 말씀을 깊이 새기며
캘커타의 아침 해처럼 가난한 이의 마음에 떠오르는 당신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소중한 만남.
1981년 마더 데레사가 2박 3일의 일정으로 한국에 오셨을 떄 나는 잠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그분의 모습을 보았고.
그 단순하고도 확신에 찬 말씀과 정감이 느껴지는 진실한 목소리에 감명을 받았었다.
평소에도 가끔 대하던 그분의 말씀 모음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하던 지난해 늦가을,
나는 자료실의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우리 수녀들이 마더 데레사와 함께 임진각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고,
이것을 사무실 벽에 걸어두고 오며가며 바라보곤 했었는데
뜻밖에도 12월에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무척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개인적인 만남이 아닌 공적인 입장에서 영상자료에 필요한 인터뷰를 그분과 해야 한다는 일이 큰 부담이 되면서도
생애에 흔치 않을 그 만남의 기회가 귀한 선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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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말로, 손짓으로 말려도 듣지 않고 사람들이 달려와서 기어이 사진 한 장이라도 찍고 싶어하는 분,
길을 갈 때면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와 사인을 부탁하고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고 싶어하는 분,
마더 데레사는 누구 못지않게 유명한 인기인이 되어 있었으니 반짝 빛나다 사라지는 세속적인 인기인은 아니다.
그는 가장 허름한 사리에 구멍난 스웨터를 걸친 맨발의 여인,
이미 한쪽 귀는 잘 안 들리고 심장도 정상이 아닌 주름 투성이의 쇠잔한 노인이며
약 50년 전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창설한 이후
오늘까지 줄곧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에 헌신해 온 이 시대의 어머니이다.
요즘처럼 현대화된 세상에 조직없이 일하면서도 아쉬움이 없고,
돈 걱정을 하지 않으며 예수가 계시기에 결코 실망할 일도 없다는,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도 당신이 하던 일은 여전히 계속 잘 되리라고 확신하는 마더 데레사.
부자들의 입을 통해서는 더러 불평의 소리를 들어도
당신이 만난 가난한 이들로부터는 불평하는 말을 못 들었다고 자랑스레 말씀하셨다.
힌두교인, 회교인, 불교인 친구들도 많고,
그들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웃으며 설명하시던 마더 데레사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특히 예수, 하느님, 가난한 이들에 대해 예기할 때 그의 두 눈은 빛났으며,
그 목소리는 힘이 넘치고 카랑카랑했다.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대신해서 내가 어쩌다 그분의 개인적인 성장과정, 가족관계,
오늘이 있기까지의 여러 가지 힘들었던 일이나 에피소드에 대한 질문을 할라치면
어느새 그 내용은 비켜가고 예수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얘기로 다시 돌아와 있곤 했다.
그에게 현재만이 전부이며 가족들조차 싫다고 내다 버리고 외면하는 비참한 몰골의 사람들,
영육으로 외롭고 목마르고 굶주리고 병들어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마음의 상처와 슬픔으로 가득찬 가난한 사람들만이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수녀원엔 아침부터 저녘까지 가난한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들은 수녀원을 자기 집처럼 마음놓고 들락거리고 있었다.
수녀원 앞의 골목길을 지나던 내게 성모님의 메달을 하나 달라고 구걸하던 중년 남자에게
묵주 반지를 하나 주었더니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랑하는 것이었다.
비굴함과 원망이 섞인 표정보다는 부드러운 미소와 평온함을 지니고 있던 그 골목길의 가난한 이들을 잊을 수 없다.
"도심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서 온종일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
자동차 소리 등 온갖 소음과 공해 속에서 일, 명상, 기도를 조화시키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
"워낙 오래 전부터 습관이 되어 괜찮다." 고 대답하셨다.
거리의 소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그대로 끌어안고 그 집에서 살아가는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은 이른 아침의 공동 빨래로 미사와 아침식사 후의 첫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재활원의 나환자들이 일 년에 6천 벌을 짜서 공급한다는 사랑의 선교 수녀회 회원들의 사리,
각자 두 벌씩 갖고 있다는 수도복인 햐안 사리를
우물물을 길어 열심히 빨고 있는 수녀와 수련자들 옆에서 나도 함께 빨래를 행구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기쁨을 노래하는 듯한 그들의 맨발을 유심히 보았다.
빨래터에서 나오다 객실에 들어가니 그곳엔
'그리스도는 이집의 머리이시며
식사 때마다 우리의 모든 대화를 조용히 듣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손님입니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마더 데레사는 사랑과 선물의 집, 평화의 집, 희망의 집 등등 수녀들의 일터마다 이름을 지어 주고,
수녀들에게 필요한 기도문이나 지침, 의미 있는 경구들을 만들어 곳곳에 걸어두었는데
어린이 집 현관에는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무언가 아름다운 일을 해 봅시다.'라고 적혀 있었고,
우리가 빋은 조그마한 명함 크기의 종이엔
'침묵의 열매는 기도.
기도의 열매는 사랑.
사랑의 열매는 봉사.
봉사의 열매는 평화'라고 적혀 있었다.
기쁨, 선물, 아름다움, 기도 등의 단어는 그가 무척 즐겨 쓰는 말인 것 같았다.
어린이 집 외에도 양로원, 감화원, 나환자, 재활원, 죽음을 기다리는 집 등을 들러 보았는데
어디에나 세계 각곳에서 온 진지하고 성실한 모습의 자원봉사자들이 있었으며,
어디에나 마더 데레사와 똑같은 푸른 줄무늬의 사리를 입고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마더 데레사들이 있었다.
특히 '임종자의 집'에 들어가서 책임자인 돌로로사 수녀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왔다갔다 할 때는
누워 있는 환자와 봉사자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 같아 미안했고,
좋은 목적으로라도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송구스러워서 가뜩이나 아픈 마음에 몸까지 아프려고 했다.
이 집은 마더 데레사가 1950년대에 제일 먼저 시작한 자비의 일터라서 더욱 인상 깊었으며,
그가 쓰던 낡은 책상 위엔 지금까지 다녀간 64.530명의,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나간 사람들이 적혀 있는 두꺼운 노트 두 권이 슬픔의 무게로 놓여 있었다.
이름과 언어도 잃어 버리고 표정없이 앉아 있다가도 누군가 다가가 손잡아 주면 봇물 터지듯이 눈물 흘리며
고마워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애쓰는 간절한 눈빛의 사람들,
그곳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 온다.
힌두인은 힌두교 관습대로, 회교인은 회교도 관습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관습대로 장례를 치러 준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어쩌면 그들은 그래서 더욱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하얀 홀이불에 감겨 있는 어떤 외로운 주검 하나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나는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아 왔으나 이곳에 와서 천사처럼 죽어 갑니다.'라고 그 또한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자신은 성녀가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하는 마더 데레사.
스스로를 '가난한 이의 대표'라고 말하며
당신을 만나고 싶으면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봉사하면 된다고 권하시는 마더 데레사.
그의 부드럽고도 강인한 눈빛은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안일한 삶의 태도와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위한 사랑에 투신해야 한다고 조용히 재촉하는 것만 같다. (p147)
199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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