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중희 - 맨주먹으로 성공한 대박기업 대박가게」
김명희 씨 - 추억의 매운탕 맛, 서민의 입맛 사로잡은 대구탕
남편의 사업 실패로 봉천동 골목에서 음식 장사 시작
김명희 씨의 첫 음식 장사는 30여 년 전,
남편의 거듭된 사업 실패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게 되자 아이들이라도 굶기지 않기 위해
골목길에 세를 내어 작은 식당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동네 작은 골목 어귀에서 해장국, 돼지갈비, 삼겹살 등
이것저것 되는 대로 메뉴를 바꿔 가면서 장사했지만 영 신통치가 않았다.
동네 골목길이다 보니 항상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다니고 메뉴도 흔한 것이라 눈길을 끌지 못했다.
결국 4년 동안 봉천동에서 이것저것 메뉴만 바꾸고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했던 메뉴가 보신탕이었는데
당시에 보신탕 붐을 타고 그나마 장사가 제법 돼서 어느 정도 자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대구탕’ 한 가지 메뉴로 특화
자금이 모이자 이제는 동네가 아닌 시내 쪽으로 가서 좀더 특화된 메뉴로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의 삼각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삼각지에 가게를 마련한 후 생각한 메뉴가 ‘대구탕’이었다.
시집와서 시어머니가 끓여 주던 대구탕.
그 독특한 맛을 잊지 못했던 그는 서울에서도 이 대구탕 맛을 선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전골냄비에 즉석에서 끓여내는 대구탕을 개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독특한 맛을 선보였다.
“처음부터 가게가 잘 되었던 것은 아니에요.
당시에는 대구탕이 일식집에서나 파는 메뉴로 인식돼 있었고,
식당 위치도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야말로 파리만 날렸죠.
왜 첫 손님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저는 지금도 저희 집에 온 첫 손님들을 잊지 못해요.”
대구탕집을 찾아온 첫 손님은 군복 입은 군인 3명이었다.
당시 삼각지 부근에는 육군본부가 있어서 군인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이 골목을 지나가던 군인 3명이 우연히 이 집에 들른 것이다.
군인 셋이 둘러앉아 대구탕을 먹으면서
‘예전에 못 먹어 봤던 맛이다. 독특하고 맛있다’며 칭찬을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 군인들이 다른 동료 군인들을 데리고 식당을 찾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군인들 사이에 ‘독특한 대구탕 맛과 인심이 후한 식당’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건장한 군인은 대개 대식가들이 많아서 공기밥 추가가 많았는데
이 집에서는 처음부터 밥 가격을 탕 가격에 포함해서 밥을 추가해도 따로 밥값을 받지 않았다.
밥을 큰솥에 담아 놓고 더 먹고 싶은 사람은 주걱으로 얼마든지 퍼 가도록 했다.
얼큰하고 맛있는 대구탕과 무제한으로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인심이 후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단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후 대구탕집은 군인들로 시작해 소문이 꼬리를 이어가면서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 있는 테이블 8개로는 부족해서 식당 앞 길가에 평상까지 펴놓고 장사를 해야 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한 주인의 횡포로 세든 가게에서 쫓겨나기도
이때 첫 시련이 닥쳤다.
남이 잘 되는 걸 못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느 정도 가게가 자리를 잡을 무렵, 세를 준 집주인의 횡포로 가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중국집을 운영하던 가게 주인이 잘 되는 이 식당을 시기해서 당장 가게를 비우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당장 가게를 비우지 않는다고 덩치 큰 남자들까지 고용하여 영업 중인 가게 안에 막무가내로 들어와 모래를 퍼부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거라고는 이 식당 하나뿐인데
당장 나가라면 어디로 가야 할지 집 없는 설움을 톡톡히 느꼈습니다.”
음식을 매개로 따뜻한 정을 나누는 사람들
가게에서 쫓겨난 김명희 씨는 마침 비어 있던 옆자리의 50년 된 낡은 건물,
바로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가게 자리는 바뀌었어도 그동안 주인아주머니의 후한 인심과
얼큰한 대구탕 맛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단골손님과 소문을 듣고 온 손님들로 가게는 여전히 번성했다.
또한 대구탕 맛이 얼큰하고 독특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지방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 집에서는 생선 재료의 신선도를 위해 아침 일찍 당일에 물건을 구입해서
그 날 소비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손님들에게 최상의 재료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자리가 없어 줄을 선 손님은 혼자 와서 먹어도 친절하게 1인분의 대구탕을 내온다.
당시 근처에서 구둣방을 했던 한 아저씨는
“음식을 먹고 나가는 손님들이
오히려 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식당은 아마 이 집밖에 없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손님들을 잘 만나서 잘 될 수 있었다.”고 손님들에게 공을 돌리는 김명희 씨는
“가게의 수익은 모두 손님들 덕분이므로 음식 재료도 제일 좋은 것으로 쓰고,
밥이나 반찬은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등 최상의 음식과 서비스로 손님들에게 다시 투자한다”고 말한다.
“지금이 있기까지 저희 집을 군인들이 살려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당시 젊은 장교였던 분이 지금은 대장이 되어 온 가족과 함께 찾아와요.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저희 집에 오신 분들을 단순히 손님과 주인관계가 아니라
음식 하나로 맺어진 인간적인 관계,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끈끈한 정을 느낍니다.”
“돈 벌었다고 편히 살려고 하지 마라! 항상 몸을 놀려라!”
20여 년 동안 대구탕 하나를 팔아 번 돈으로 8년 전에는 근처에 작은 건물도 마련했다.
그리고 현재는 주변 사람들의 요청으로 프랜차이즈(대구탕 분점)를 준비하고 있다.
그 동안 돈도 많이 벌었고
부동산도 소유했고 이제 편히 살만한데도 가족들은 아직도 식당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새벽부터 생선과 야채 재료를 직접 골라서 사고, 서빙도 하고 손님들을 직접 맞는다.
지금도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가게는 성황이다.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대구탕 맛을 알리고 음식 하나로 작은 기쁨을 주기 위해서다.
삼각지에 대구탕 집을 연 후, 800원으로 시작한 대구탕 가격은 현재 6,000원이 되었다.
이 6,000원은 6년 동안 올리지 않고 고수하고 있는 가격이다.
그 동안 최상급 생선 재료와 야채 등 원가가 올랐지만 음식 가격은 쉽게 올리지 않고 있다.
박리다매로 얻은 이익을 손님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오늘 내오는 대구탕은 재료가 부족하지는 않은지, 맛은 달라지지 않았는지’ 항상 점검해 본다.
수십 년 동안 매일 한결같이 내온 대구탕이지만 지금도 재료를 계량하고 꼼꼼히 맛을 비교한다.
식당이 잘 된다고 자만하지 않고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는 것이다.
“힘 안들이고 번 돈은 금세 힘 안들이고 나간다.”고 말하는 김명희 씨.
“좀 살만해졌다고 편히 살려고 하지 마라!
항상 몸을 놀려라! 안 쓰면 병드는 게 몸이다.
또 당장 눈앞의 이익을 따지지 말고 손님들의 이익을 위해 일해라!”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땀과 눈물로 일궈낸 삼각지 원대구탕.
이 집을 보면서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 보다 절실히 와 닿았다.
※ 이 글은 <맨주먹으로 성공한 대박기업 대박가게>에 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허중희 - 맨주먹으로 성공한 대박기업 대박가게
황금물고기 - 2005. 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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