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 2006. 08. 29. 문화산책」
뉴욕 도심 맨해튼에서 허드슨강을 건너가면 뉴저지 레오니아에 몽블랑 제과점이 있다. 파리의 아침이 기다란 막대 모양의 바게트 굽는 냄새로 시작된다면, 뉴욕의 아침은 겉은 단단하고 속은 촘촘한 베이글로 시작된다. 매년 여름이면 유럽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뉴욕에 머무는 동안 몽블랑 제과점의 베이글은 나의 아침을 황홀하게 해주었다.
크림치즈를 듬뿍 넣은 갓 구운 플레인 베이글에 커피,안뜰 채마밭에서 방금 뜯은 상추와 민트로 만든 야채 샐러드가 나의 일용한 아침식사. 베이글과 상추의 힘으로 나는 온종일 브로드웨이와 소호,타임 스퀘어와 브루클린 브리지 등을 누비고 다녔다. 해질녘 다시 허드슨강을 건너 레오니아의 몽블랑 제과점으로 돌아올 때면 매번 같은 생각을 했다. 도대체 베이글이 뭐기에 새끼발가락이 으깨지도록 쏘다녀도 나는 지칠 줄을 모르는가.
베이글의 유래는 분분하나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빵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이제 베이글의 명성은 뉴욕의 상징물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자유의 여신상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내가 뉴욕에서 맛본 베이글 중 으뜸은 몽블랑 제과점의 베이글이다.
나는 그곳의 담백한 맛의 플레인 베이글과 건포도가 박힌 레쟁 베이글을 선호했는데,뉴욕에서 보스턴,또 워싱턴DC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몽블랑 제과점에 들러 다리를 쉬곤 했다. 내가 몽블랑 제과점을 찾는 이유는 베이글도 베이글이려니와 그곳에 가면 이런저런 사연으로 뉴욕으로 옮겨와 뿌리를 내리고 사는 한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몽블랑이라는 상호는 유럽의 명산 몽블랑에서 따왔다. 그곳의 박정애 사장은 한국 대기업의 독일 주재원으로 근무한 남편을 따라 오랫동안 유럽 생활을 했고,서울을 거쳐 뉴욕에 정착한 인물. 몽블랑이라는 이름은 유럽에서 가져왔지만,박 사장이 제과점 운영을 결심했을 때 그녀의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옛날 서울에서 이름을 날렸던 몽블랑 제과점이었다. 그러니까 뉴욕의 몽블랑 제과점은 유럽이 아니라 서울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몽블랑 제과점의 아침과 저녁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아침 식단의 주 메뉴인 베이글을 사려는 행렬로 시작해서 담소의 장으로 끝난다. 오후의 단골손님 중에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손 공주님도 있다. 컬럼비아대 동양학 도서관에서 한국학 사서로 정년퇴임한 칠십대 후반의 이해경 선생이 주인공인데,뉴욕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나는 공주님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송별 만찬을 대신했다.
‘고종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다섯 번째 따님. 황실명은 이공,아명은 길상. 1946년 경기여고를 나와 1950년 이화여대 음악과 졸업. 한국전쟁 발발,미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일했으며, 이것이 훗날 사서를 하게 된 계기가 된다. 현재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다.’ 이상은 몽블랑 제과점에서 공주님께 들은 이야기와 위키 백과사전에 기록된 내용의 일단이다.
이 선생이 고국을 떠난 것은 한국전쟁 직후,홀홀 단신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피눈물을 삼키며 비행기에 올랐다. 선생이 왜 고국을 떠나야 했으며,어떻게 살아왔는가. 국가 차원의 예우와 역사가의 객관적인 시선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살아온 한 평생이었다.
헤어지면서 공주님과 깊게 포옹을 하던 나는 얼굴을 붉혔다. 심히 부끄러웠다. 버스를 타기 위해 몽블랑 제과점을 나서는 공주님의 발걸음에는 세상을 초월한 자의 경쾌함이 배어 있었다. 공주님은 오늘도 자원봉사로 뉴욕의 한인 노인들에게 합창을 지도하고 있다.
글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2006.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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