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리히 프롬 - 소유냐 삶이냐」
1. 환상의 종말
무한한 진보라는 저 위대한 약속
-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제한받지 않은 개인적 자유의 보장-
은 산업시대의 개막 이래 각 세대의 희망과 신념을 유지시켜 온 토대였다.
우리의 문명이 인류가 자연을 능동적으로 지배할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지배는 산업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제한된 것이었다.
산업이 진보되어 기계 및 핵核 에너지가 동물이나 인간의 에너지를 대신하고
컴퓨터가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게 되자,
우리는 무한한 생산,
나아가서는 무한한 소비의 길로 들어섰으며, 기술이 우리를 전능全能 omnipotent 하게 하고
과학이 우리를 전지全知 omniscient 의 존재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자연세계를 우리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주춧돌로 사용하여
제2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지극히 높은 존재, 이를태면 신神이 되는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남자, 그리고 점차 여자들도 새로운 의미의 자유를 경험했다.
그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다.
봉건적 사슬은 끊어졌고, 사람들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이것은 상류 및 중류계급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이들의 성공을 본 다른 사람들은 산업화가 그 속도만 유지한다면 결국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 새로운 자유가 미치게 되리라는 신념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위대한 약속'의 영광, 산업시대의 놀라운 물질적 - 지적知的 성취를 마음에 그려봄으로써
비로소 그 실현의 실패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일으키고 있는 충격을 이해할 수 있다.
산업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
1.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2. 자기의 독립된 주인이 되는 꿈은 우리의 사상 - 감정 - 취미가 정부의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종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채기 시작하면서 끝나버렸다.
3. 경제적 발전은 여전히 부강한 나라들에만 국한되어,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간격은 계속 넓어져 왔다.
4. 기술적 발전은 생태학적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냈으며,
이 중 어느 하나, 혹은 이 둘이 합세하여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1952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상황에 과감히 직면하기 위하여.... 인간은 초인超人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적 힘을 갖게 된 이 초인은 초인적 이성理性의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더욱더 가련해진다.
초인이 될수록 자신이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
2. '위대한 약속'은 왜 실패했는가
위대한 약속의 실패는 산업주의의 근본적인 경제적 모순은 제쳐놓더라도
다음의 두 가지 주요한 심리학적 전제에 의해 사업체제 속에 침투되었다.
1. 인생의 목적은 사람이 느끼는 어떤 욕망이나 주관적 욕구의 충족으로서 정의된 행복,
즉, 최대한의 쾌락에 있다. (극단적 쾌락주의)
2.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탐욕은 체제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조화와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단 하나의 예외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티포스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그는 기원전 4세기 전반에 살았던 사람으로써,
만족할 만한 육체적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행복은 쾌락의 총화總和라고 가르쳤다.
그에게 있어서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을 충족시킬 권리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따라서 인생의 목표인 '쾌락'을 실현할 근거가 되고 있다.
에피쿠로스를 아리스티포스의 쾌락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순수한' 쾌락이 최고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고통의 부재(aponia)'와 '영혼의 안정(ataraxia)'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욕구를 충족시키는 쾌락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런 쾌락은 반드시 불쾌감을 동반하고,
따라서 인간을 그 진정한 목적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이론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대조되는 일종의 주관주의主觀主義를 대표했던 것같이 보인다.
다만 이것은 에피쿠로스의 견해에 관한 모순된 기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단정적인 해석을 내린 경우에 있어서이다.
인생의 목적이 모든 인간의 욕망충족에 있다는 이론을 아리스티포스 이후
처음으로 분명히 표명한 사람들은 17세기와 18세기의 철학자들이었다.
그것은 '이익'이 (성경에 있어서, 그리고 후세에 와서 스피노자가 그러했듯이)
'영혼을 위한 이익'이 아니고 물질적 - 금전적 이익을 의미하게 되었던 시대,
중류계급이 그 정치적 굴레뿐만 아니라 사랑과 단결의 모든 유대까지 벗어던져 버리고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더욱 자기 자신답게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된 시대에
쉽사리 생겨날 수 있는 개념이다.
인간본성에 비추어 극단적 쾌락주의가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
또 그렇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론적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관찰할 수 있는 데이터만으로도
우리의 '행복의 추구' 방식이 복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기가 죽고, 파괴적이며, 의타적인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쪽에서는 마구 허송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기주의자라는 것은 내 행동뿐만 아니라 내 성격에도 관계되는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만사가 내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
공유가 아니라 소유가 내게 쾌락을 준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 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로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내 고객을 속여야 하고, 경쟁자를 없애야 하며,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한다.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내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보다 적게 가진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하듯이,
미소를 머금고 이성적이며 성실하고 친절한 인간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에 대한 열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계급전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체제가 계급을 철폐함으로써 계급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구실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체제는 무한한 소비의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가지기를 바라는 한 계급이 형성되고 계급전쟁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또한 전세계적으로는 국제전쟁이 발발하기 마련이다.
'탐욕과 평화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다'
산업사회는 자연을 경멸하고 있다.
또한 기계로 만들지 않은 모든 물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
(최근의 일본과 중국 등을 예외로 하는 유색 인종들)에 대해서도 경멸을 느끼고 있다.
현대인들은 기계적인 것, 강력한 기계,
생명이 없는 것에 이끌리고 있으며, 따라서 점점 더 파괴를 향해서 전진하고 있다. (p21)
※ 이 글은 <소유냐 삶이냐>실린 일부 단락을 필사한 것임.
에리히 프롬 - 소유냐 삶이냐
역자 - 정성환
홍신문화사 - 1988. 08. 10.
[t-07.05.09. 200519-17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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